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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제의 축복에 걸린 순간, 시몬은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였다.
일반적인 사고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쓰나미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미쳐 버렸거나 폐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왜지? 익숙한데?’
시몬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몸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으나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감각도 익숙했다. 이제 눈앞의 모제를 넘어, 성벽 밖에서 싸우는 군단의 모습도 넘어, 신성연방의 프리스트와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도 넘어서 모든 걸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알아.’
모든 것을 초월할 것만 같은 감각.
초집중 상태, 콤펠로(compéllo).
위대한 네크로맨서들이 간혹 체험한다는 콤펠로는 시몬도 종종 경험했다. 특히 1학년 시절 저주학 교수 바힐이 시몬을 상시 콤펠로 상태로 각성시키기 위해 <콤펠로니아>라는 기술을 만들어 익히게 했고, 그때 시몬은 잠시 ‘문’을 넘어섰다.
그러나 ‘문’을 넘는 건 금기였으며, 인간은 엿봐선 안 되는 영역이었다. 한 번만 더 문을 넘었다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시몬은 콤펠로니아를 완전히 봉인하고 생활해 왔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것과 거의 흡사한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전에는 저주로 왔다면 이번에는 축복으로 왔다.
‘딱 좋아.’
초월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문’을 넘어서지는 않는 어중간한 상태.
모제는 이 축복을 걸어서 자신을 무력화시키려고 한 것 같았지만, 오히려 시몬에겐 호재였다.
시몬은 잠시 전장을 살폈다.
가장 많은 정보량이 쏟아지는 쪽은 군단의 언데드들이다. 성벽 밖에 있던 언데드들이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 고통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성벽에 붙어서 발톱으로 긁어대다가 공격에 맞아 쓰러지는 구울들, 무리하게 서로가 서로를 쌓아 올리며 성벽을 넘으려는 좀비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서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아쉬워.’
그들의 움직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시몬이 군단에 내린 ‘절대명령’은 언데드의 공격성을 압도적으로 끌어내는 방법이지만, 지금 느끼는 건 언데드들이 그 목표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데드 하나하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시몬은 이들의 목숨이 아까웠고 이들이 발휘할 저력이 아쉬웠다.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컨트롤해 보자.’
성벽 밑에 붙어서 벽을 손톱으로 긁어대기만 하던 언데드들을 움직여 성벽이 무너진 쪽으로 보내고, 그 대신 벽을 잘 타는 스워머들을 보내 성벽을 타고 올라가게 한다.
원거리 공격으로 인해 칠흑을 모두 소진했거나 화살 등이 다 떨어진 언데드들은 앞에 다른 근접형 언데드들과 함께 몰려가는 것을 막고, 뒤로 물려서 칠흑을 회복하거나 바닥의 화살을 챙기도록 하는 등 ‘휴식’과 ‘대기’의 개념을 넣는다.
한곳에 뭉쳐 있는 덩치가 큰 언데드들은 퍼뜨려 놓아서 길을 막지 않게 하고 적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자, 천천히.’
하지만 이렇게 직접 컨트롤하니 새로운 문제점이 보인다.
우회 명령을 내리니, 언데드들은 그것을 따른 뒤에 다음 공격에 대한 공격성과 목표에 대한 집착이 떨어졌다. 언데드의 강점을 살리지 못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문제가 보이면 바로 해결책도 보였으니까.
문제야말로 발전의 기회다.
‘그럼 명령과 언데드의 본성을 분리시켜 보자.’
심플하게 생각한다면 언데드의 본성은 생자를 보면 분노하여 공격하는 정도의 성질 같은 것. 그리고 네크로맨서의 절대명령은, 이 제1 언데드의 본성을 인간 개인의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한다.
우선 언데드의 머릿속에 임무에 대한 목표를 99%로 설정해 두었다면, 이제는 70%. 남은 30%는 언데드들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움직일 여지를 준다.
이 변화를 적용하니, 지능이 높은 메이지형 언데드들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더 이상 칠흑을 다 소모했다고 맨몸으로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물러나거나 힘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다.
또한 절대명령을 각 언데드의 종류에 따라 나누어보았다. 좀비는 무너진 성벽으로 전진, 스워머는 성벽 등반, 스켈레톤 메이지는 성벽 위 적의 공격으로 정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점이 있네. 언데드는 종류가 천차만별이라 같은 카테고리로 묶기 어려워.’
이번엔 아예 절대명령을 조금 더 구체화해 보았다.
심플한 돌격 명령을 가장 위에 두고.
그 아래에 세부적인 명령들을 놓는다. 무너진 틈 전진, 성벽 등반, 방어, 포화 공격.
이후 언데드들에게 본능적으로 가장 자신 있는 명령을 따르도록 만든다. 언데드의 분류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명령과 효율에 따라 분류하는 것.
그러자 전장 전체에 변화가 일어난다.
‘재밌다.’
머리가 뻥 뚫리는 것 같다.
즉각적인 움직임에 즉각적인 피드백.
이 군단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거기에.’
이번엔 시몬의 시선이 각 부대의 대장급들, 에이션트 언데드에게로 향했다.
일반적인 언데드와 달리, 에이션트 언데드들은 차원이 다른 풍부한 감성과 생각이 느껴진다. 일반 언데드가 무채색이라면, 이들은 화려한 무지개색이다.
시몬은 그중에서 ‘알라제’에 주목했다.
그동안 알라제는 언데드 엔지니어로서 강렬한 탐구욕과 연구욕, 혹은 그 결과물을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이 게하임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알라제는 정해진 형체가 없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든 자신의 형태가 아니다.
그가 연구하고 발전해 가려는 목적 또한 바로 완전한 자기 자신의 형태를 찾기 위해서였다.
시몬은 이를 공감했고, 그의 욕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콤펠로 상태에서 제시했다.
‘네가 원하는 완전한 모습은 하나가 아니야, 알라제. 완전은 주관적이고, 변수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져. 네가 완전한 형태를 원한다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해야 해.’
그러자 알라제 또한.
시몬이 제시한 이상을 받아들였다.
<게하임>
작은 모습이었던 알라제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이 메시아 시몬처럼 변하고, 발 아래가 거대한 생체 건물처럼 부풀어 오른 형태가 되었다. 그 안에서 무수한 어보미네이션이 하나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명 생체 시설화. 변화하는 어보미네이션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몬이 개인적인 사견을 담았다.
‘내 얼굴은 빼주면 안 될까?’
[···.]
알라제는 이것만큼은 시몬의 명령에 저항했다.
* * *
콤펠로 상태에 진입한 시몬은 정신없이 군단을 지휘하며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의 게하임까지 알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신성연방 진영을 무너뜨리는 건 순식간이라고 생각했지만.
화아아악!
갑자기 하늘 위에 붕 뜬 감각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다시 사고가 정상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콤펠로 상태, 즉 강제 각성 상태에서 깨어난 것이다.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니, 얼굴이 땀범벅이 된 모제가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네. 벌써 축복을 거두어들인 거야?”
시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고맙다.”
시몬은 진심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모제의 표정이 더더욱 난해해졌다.
“···너, 정체가 뭐야?”
모제에게 있어 자신의 축복은 너무 강하기에 자신만 감당할 수 있고, 타인에게는 저주나 다름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을 시몬은 눈앞에서 깨뜨린 것이다. 시몬이 빙긋 웃으며 파멸의 대검을 고쳐 잡았다.
“보시는 대로, 군단장 중 한 명일 뿐이야.”
하.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모제가 결국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래, 인정할게 시몬. 내 축복은 범재에겐 저주지만, 너는 범재가 아니였어. 나와 동등한 하늘의 존재.”
우웅!
모제가 오른팔을 세워 들자 허공에 신성 아공간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지팡이 하나가 내려왔다.
그것은 길쭉한 나무로 이루어진 낡고 오래된 지팡이였으나, 겉보기와는 달리 끔찍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나와의 동등한 격을 가진 존재에게 존중을 표하는 의미에서 지금부터는-”
터업!
모제가 천천히 ‘신의 손’이라 불리는 오른손으로 그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도 목숨을 걸고 싸우겠어.”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 낡아빠진 지팡이가 오른손에 닿는 순간,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대목 로기아(Logia).
과거 이 지팡이에는 ‘문명’ 하나를 휩쓸어 버렸다고 알려진 강력한 재해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사용을 끝으로 모든 힘을 다 소진하여 신성 박물관에나 전시되던 차, 수세대가 이른 지금에 이르러서 모제를 만나게 되었다.
모제가 ‘신의 손’으로 그것을 쥐자, 지팡이가 과거의 힘을 되찾은 것처럼 불길한 빛을 뿜으며 진동했다.
스으.
모제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언더링의 호수숲 천장에 출렁이던 호숫물이 마치 빨간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쏴아아아아!
그 붉은 호수가 마력 역류 현상을 뚫고 내려와 모제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호수숲 전체에 신의 재해가 일어난다. 모제의 오른편의 나무와 풀, 꽃들이 모조리 시들기 시작하고, 왼편에는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군집을 이룬 메뚜기 떼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나는 외로웠어.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모제가 시몬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시몬 폴렌티아.”
<아홉 가지 재해>
모제가 신의 손으로 이 전역 전체에 대재해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몬은 긴장하지도 않는 건지, 여전히 아쉬움이 깃든 표정으로 대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그 축복이나 계속 걸어줬면 좋을 텐데.”
“네가 내게서 살아남는다면-”
모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깟 축복쯤은 언제든지 걸어줄게.”
그제야 시몬도 슬쩍 웃으며 칠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약속, 잊지 마.”
* * *
시작의 동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양측 관중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나 스크린으로 시몬과 모제의 전투를 지켜보며 동굴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댔다.
메이린이 모제 앞에 시몬을 소환했을 때는 암흑연합 측의 격렬한 함성이.
그리고 두 사람이 격돌하다가 모제가 지팡이를 꺼내 재해를 일으켰을 때는 신성연방 측의 뜨거운 눈물과 기도가.
마침내 두 사람이 정면으로 부딪히며 양측 모두에서 귀가 터질 듯한 환호가 계속 이어졌다.
“해내라! 배신의 군단장!”
“제발 제발!”
암흑연합 관중들은 거의 눈이 홰까닥 돌아가 있었다. 목이 성한 자들이 없었다.
“아아-! 모제 형제님!”
“기적을 목도하게 된 것에 대해 신의 감사를!”
신성연방도 마찬가지. 심지어 모제를 향해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라는 극칭을 외치는 자들도 있었고, 여신의 강림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심상치 않습니다! 제7군단장과 신의 손 모제! 이제 두 사람이 이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합니다!
분위기에 심취하여 목이 진작에 쉰 사회자가 확성 수정구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수정구의 마나가 다해서 목소리가 약하게 들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광란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막으며 돌아다니는 팔라딘이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인파를 헤치고 걷다가, 경비 임무는 나 몰라라 하며 룬 리그 관람에 한눈이 팔린 후배 팔라딘 하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가 버럭 외치자, 후배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경비 태세를 갖췄다. 선배 팔라딘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다나 성녀님은 어디 계신가!”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립니다!”
“다! 나! 성! 녀! 님! 어디! 계신가!”
코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선배 팔라딘이 손짓으로 발짓으로 다나를 설명하자 그제야 후배가 알아들었다는 듯 외쳤다.
“다나 성녀님이라면 응접실에 계십니다!”
“그 응접실 내가 방금 다녀오는 길이다!”
“예? 안 들립니다!”
“됐다! 썩을!”
선배 팔라딘이 손을 휙 휘두르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후배는 선배 눈치를 보는 듯 경비를 제대로 서는 척하다가, 관중들이 ‘와악!’ 하고 환호하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마나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결사가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거늘!’
팔라딘이 짜증을 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보다 총지휘관인 다나가 걱정이었다. 응접실에도 없고, 통신 수정구의 연락도 받지 않는다.
‘시끄러워서 동굴 밖으로 나가셨나?’
생각해 보니 나름 합리적인 추론 같았다. 시끄러운 함성에 귀를 틀어막은 팔라딘 성큼성큼 무대 옆 계단을 지나 동굴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어?’
또 한 명의 팔라딘이 대놓고 관중석 가장 끝자리에 앉아 고개를 쭉 빼밀고 마나 스크린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예 자리를 지키지도 않다니. 격분한 팔라딘이 한마디 할 생각으로 다가갔다.
‘자, 잠깐.’
그런데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의자에 떡하니 앉아 팔짱을 낀 채 마나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밑에 빨간색 머리카락이 삐쳐 나와 있다. 그자가 누군지 깨달은 팔라딘이 입을 딱 벌렸다.
“다, 다나 성녀님?”
-보지 않았도다. 대단하다고 해도 학생 수준의 대리전쟁이 아니더냐.
분명 전에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팔라딘은 애써 표정을 고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나 성녀님! 여기 계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결사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처억.
그때 그녀가 손바닥을 펼치며 팔라딘의 입을 막았다.
후드 속 빛나는 두 눈동자는 마나 스크린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다, 다나 성녀님?”
고오오오!
그녀의 동공이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팔라딘을 노려보고는 다시 마나 스크린으로 옮겨갔다. 고작 몇 초간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기백에, 베테랑 팔라딘마저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팔라딘이 도망치듯 물러나고, 다나는 다시 시몬과 모제의 전투를 눈에 담았다.
‘설마.’
제 턱을 짚은 다나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저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