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
‘군단장 시몬 폴렌티아.’
모제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실 모제에게 있어 시몬 폴렌티아의 죽음이야말로 룬 리그에 참가한 목표였다.
‘이미 놓친 세 명은 아무래도 좋아.’
그들의 죽음 또한 시몬 폴렌티아를 흔들기 위한 과정일 뿐.
과정이 어떻든 시몬 폴렌티아를 죽이면 그만이다.
저벅 저벅.
피어의 본 아머로 무장한 시몬이 무형의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왔다.
저벅 저벅.
모제 또한 펄럭이는 소매를 흔들며 걸어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두 사람의 발소리가 동시에 빨라진다.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앞세우고 모제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는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가속하며.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앙!
파멸의 대검과 빛의 성검을 휘두른다. 굉음이 터져 나오며 주위의 대기가 쩌렁쩌렁 흔들린다.
그때.
꽈아아악!
대검의 손잡이를 붙잡은 시몬의 손에 혈관이 불거지며 힘이 잔뜩 들어가더니.
쩌정!
그대로 검에 힘을 주어 부딪힌 성검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축복을 걸었음에도 놀라운 완력의 차이.
힘에 밀린 모제가 두 다리로 지면에 긴 궤적을 그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슥.
시몬이 검을 쥐지 않은 반대쪽 검지를 까닥거렸다.
모제는 씩 웃더니 기꺼이 앞으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이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걸어간다.
시몬은 파멸의 대검을, 모제가 다시 바닥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서 휘두른다.
쩌정!
검으로 변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모제가 밀려난다. 모제가 이번엔 제 몸을 신의 손으로 한 번 짚은 뒤, 다시 한번 나뭇가지를 집고 성물로 바꾸어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이 뒤로 밀려난다.
성검은 부러진다.
신의 손으로 자신을 한 번 더 짚은 모제가 바닥의 나뭇가지를 손안에 넣고 휘둘렀다. 시몬도 파멸의 대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이번엔 시몬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힘의 차이가 역전되었다.
“에이션트 언데드를 몸에 둘렀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아.”
이미 걸려 있던 축복에, 완력을 증강하는 축복을 두 번 더해 3중첩으로 만든 모제가 시몬이 밀려난 자리를 밟고 저벅 저벅 다가왔다.
그가 성검을 왼손으로 옮긴 뒤, 오른손을 펼쳐 축복을 만들었다.
“네게는 어떤 축복을 주면 좋을···.”
일순.
시몬의 몸이 안광과 함께 사라지더니 모제의 측면으로 번개처럼 들이닥쳤다. 허리가 당겨지고, 두 다리와 팔이 차례대로 따라나온다.
쩌어어어어어엉!
축복을 취소한 모제가 오른손으로 성검을 쥐고 불안전한 자세로 막아냈다. 이 공격으로 모제의 귀 끝이 작게 베이며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제가 뒤로 밀려나는 것보다 빠르게 시몬이 그의 후방을 점유했다.
카가가가각!
모제가 허리를 회전하며 성검을 휘둘렀다. 두 검이 불똥을 튀기며 격돌한다. 모제가 알 만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내가 오른손으로 축복을 걸지 못하게 할 생각이네.’
파멸의 대검에 방대한 칠흑이 느껴진다.
저걸로 이쪽의 무기를 부러뜨리면서 강제로 계속 오른손으로 무기를 쥐게 하는 것.
바로 ‘신의 손’의 공략법을 떠올리다니, 영리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봐야 범재 수준이지만.
‘많은 걸 알아냈어.’
시몬도 상대와 검을 부딪치면서 정보를 모았다.
모제는 늘 자신의 몸에 축복을 걸어둔다. 이것만으로 에이션트 언데드를 입은 시몬과 대등할 정도.
그러나 자신에게 중첩으로 걸 수 있는 건 한 종류의 축복뿐이다.
‘완력을 올리면 속도로, 속도를 올리면 완력으로 대응하면 돼.’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연신 휘두르며 모제의 시선을 끌고 있는 그때.
“전지전능하신 데바께서 가라사대, 그대가 가는 장소가 곧 성소고, 그대가 가는 나라가 곧 성국이니.”
모제가 중얼거리며 성검에 축복을 과주입하여 폭발시켰다.
성검이 펑! 소리가 나며 신성 폭발이 일어나 시몬이 물러나는 사이, 모제가 지반을 짚었다.
<성역화>
‘거리가 벌어지면 안 돼!’
시몬이 물러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득달같이 대검을 앞세우고 달려들었으나.
째애애애애애앵!
지면에서 솟구친 빛의 칼날이 시몬의 돌진을 막아냈다.
“아아. 성소의 전사들이 그대를 반기노라.”
모제가 팔을 휘두르자 동시에 시몬의 좌우사방에서 빛의 칼날들이 계속해서 솟구쳤다. 시몬이 그것들을 받아내거나 부수고 있는 중에.
“보아라. 곧 세상이 물에 잠길지어니.”
쿠구구구구구구구구!
갑자기 시몬의 주위로 거대한 그늘이 졌다. 시몬이 얼른 고개를 들자, 하늘에 거의 마을 하나만 한 크기의 금빛 배가 나타나 있었다.
“그대는 온갖 생물의 암수 한 쌍을 데리고 빠져나갈 것이니라.”
‘이게 무슨!’
시몬이 자세를 다잡았다. 파멸의 대검이 일렁이며 녹색으로 변했다.
<칼 오리지널 – 맹독야차>
커엉!
컹! 컹!
맹독으로 이루어진 개들이 무수히 쏟아져 선체에 틀어박힌다. 시몬을 짓누르려는 선체에 구멍이 생기고, 시몬이 그 안으로 빠져나갔다.
“전지한 어머니께서 가라사대, 나의 백성들아. 어찌 불신의 감정을 저버리지 않느뇨.”
선체에 구멍을 뚫고 빠져나온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제길!’
한 척이 다가 아니었다. 그 위로 한 척의 배가 더 떨어지고 있었다.
시몬이 다급히 파멸의 대검을 붙잡고 다음 기술을 사용했다.
<벨제불 오리지널 – 타락베기>
촤아아아아아악!
대검 끝으로 떨어지는 한 척의 배의 선체를 건드렸다. 선체가 일렁이며 구멍이 생기고 시몬이 다시 그곳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부웅!
두 번째 선체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모제의 오른손이 시몬의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이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틀어 피했지만 신의 손에 휘감긴 축복 전체를 피하지 못했다. 축복이 시몬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끝났네.”
쿠쿵! 쿵!
두 개의 거대한 배들이 떨어져 내리고, 시몬과 모제도 각각 지면에 안착했다. 모제가 여유 있는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한번 변화를 만끽해 보시지?”
시몬이 차분히 대검을 힘주어 잡고 그에게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
한 발의 발디딤으로 시몬은 모제가 아니라, 모제보다 한참을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있었다. 속도를 주체할 수 없던 시몬이 크게 휘청이며 간신히 넘어지기 전에 자세를 다잡았다.
“에이젤을 잡은 그 축복이야.”
모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어때? 너무 빠르니까 오히려 옴짝달싹 못···.”
모제의 말이 멈췄다. 서늘한 감각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시몬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등 뒤에 나타나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
부아아아아아앙!
모제가 다급히 허리를 젖혀 파멸의 대검을 피했다.
[너무 빠르니까 뭐?]
파바바바바바박!
시몬의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그의 주위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몬이 마치 주위에 수천 명이나 되는 것 같다. 모제가 자신에게 건 힘의 축복을 해제하고, 빨라지는 축복으로 제 속도를 높인 뒤 근처의 뾰족한 돌로 성검을 만들었다.
깡!
시몬이 등 뒤에서 검을 휘둘러 모제의 방어 동작을 이끌어낸 뒤 사라지고.
까앙! 깡! 깡!
측면과 후면.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바로 정면과 후면에서 거의 동시에 검을 휘둘러 댔다. 성검을 휘둘러 막아내는 모제의 몸 곳곳에 팟! 팟! 하고 핏줄기가 튀며 치유 불가능한 상처가 남겨졌다.
‘고작 한번 움직여 본 걸로.’
모제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 축복으로 증폭된 속도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쩌어어어어어엉!
그의 발밑에서 나타난 시몬이 모제의 복부를 걷어차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모제의 몸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그보다 더 빠르게 점프해서 올라가는 모제를 따라잡은 시몬이 그의 머리를 향해 파멸의 대검을 내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추락한 모제가 지면에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며 나뒹굴었다. 시몬이 다시 달려왔고 모제가 하는 수 없이 시몬에게 건 축복을 취소했다.
터어어어어엉!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힌다.
시몬이 씩 웃었다.
[왜? 빨라서 좋은데 더 해보지?]
‘이게···!’
모제가 검을 쳐내 시몬을 뒤로 밀어냈다.
축복을 걸어주고 옴짝달싹 못 하는 범재들의 꼴을 보는 것이야말로 모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으나, 시몬은 그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즐거움은, 걸었던 축복을 다시 뺏으면 힘겹게 적응하던 상대가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망가지는 것이었으나.
까아아앙!
시몬은 다시 본래 속도로 돌아오면 돌아온 대로 적응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성역화>
모제가 바닥을 짚은 뒤, 무수한 신성 칼날을 일으켜 공세를 퍼부어댔지만 시몬은 손쉽게 대처했다. 이제는 모제와 거리를 벌리려 하고 있지도 않았다.
마치 축복을 걸 테면 걸어보라는 것처럼.
‘그 도발, 받아주지.’
타아!
시몬이 모제가 날린 백마법을 피하는 사이, 측면으로 우회한 모제가 신의 손으로 시몬의 몸에 축복을 연달아 걸었다.
‘더 잘 보이는 축복!’
시몬의 시야가 갑자기 확 확장되기 시작했다. 시몬은 눈을 감았다.
‘맡길게요 피어.’
[크하하! 물론이다!]
이 또한 에이젤을 통해 당연히 알고 있었고 대처법도 있다. 시몬은 스스로 눈을 감고 시야의 정보량이 증폭되는 것을 차단한 채 피어의 리드에 움직였다.
시몬과 피어는 군단장과 관리자 사이인 만큼 누구보다 강한 사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눈을 감았지만 시몬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모제가 다음 축복을 걸었다.
‘더 잘 들리는 축복.’
시몬은 똑같이 피어에게 리드를 맡기는 것으로 대처했다. 뒤로 물러난 모제가 아공간에서 거대한 병기함을 꺼내 지면에 떨어뜨렸다.
병기함 째로 오른손을 짚어 ‘성물화’한 뒤, 그것의 뚜껑을 열자 온갖 창칼 따위의 무기가 쌩! 소리를 내며 시몬에게 날아갔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성물화된 무기들.
그러나.
쩡!
휘익!
까앙!
눈과 귀에 축복이 걸린 시몬은 너무나 잘 대처하고 있었다. 파멸의 대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부드럽게 쳐내던 시몬이 이내는 흐름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었다.
[더 잘 보여, 더 잘 들려.]
휘익!
휘이이이익!
마치 성물들이 시몬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
신기가 들린 움직임으로 시몬이 피하고 있었다.
[선과 점의 세상. 아닌가? 그 너머의 감각.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면서도 심플하구나.]
터업!
시몬이 검지와 중지를 세워 날아오는 성창을 받아낸 뒤 씩 웃었다.
[진천. 음양. 오화. 음, 뭔가 홍펭교수님이 말씀하신 오행의 합리가 뭔지 알 것 같은데.]
“!”
뭔가 미친 듯이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든 모제가 급히 축복을 해제했다. 시몬이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픽 웃으며 손을 늘어뜨렸다.
[짧지만 고마워, 덕분에 한 단계 더 나아간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말한 시몬은 날아오는 투사체를 정말로 전보다 더 잘 피해가고 있었다. 모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우롱해?’
속도를 과하게 높였더니 그 속도마저 자신의 페이스로 만들고.
감각을 과하게 더했더니 깨달음을 얻어버린다.
모제는 지금껏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시몬 폴렌티아에게 가장 치명적인 축복이 뭐지?’
두뇌 회전을 빠르게 만드는 축복도 있었지만, 메이린의 경우도 있으니 피하고 싶다. 모제가 고민하고 있는 그때.
쿠쿵-
등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것을 포착했다.
성벽 쪽이었다.
성벽 쪽에는 여전히 강화된 신성 언더링들과 7군단의 언데드들이 싸우고 있었다.
모제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좋은 생각이 났어.’
그가 병기함에 남은 성물들을 모조리 날려 버리며 함께 돌진했다. 시몬은 축복을 걸 테면 걸어보라는 듯 제자리에서만 피하고 있었다.
모제가 신의 손에 축복을 휘감아 그에게 날렸다.
‘정보량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축복.’
화아아아악!
새로운 축복이 시몬에게 걸렸다. 모든 성물을 피해낸 시몬이 갑자기 멈칫했다.
‘이번엔 확실하다.’
모제는 경과를 지켜보면서도 확신했다.
네크로맨서들은 언데드들을 사념이라는 것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 녀석은 보통 네크로맨서가 아닌 군단장이다. 일개 소대가 아니라 ‘군’을 움직이는 네크로맨서.
그 사념이란 게 무수히 연결되어 있을 터.
-캬아아아악!
-키이이이!
-께에에에에에엑!
현재 성벽 밖에 군단을 끄집어낸 상황이니 그야말로 엄청난 정보량이 시몬에게 밀려들 것이다.
너무 많은 병력이 일으키는 정보량은 한 명의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끝이네.’
승리가 확정됐다.
나뭇가지를 다시 성검으로 만든 모제가, 제자리에 멈춰 있는 시몬을 향해 던진 그 순간.
터엉!
시몬이 파멸의 대검도 휘두르지 않고 그냥 맨주먹의 손등으로 그것을 쳐서 흘려보냈다.
후우우욱.
하아아아아아.
길게 숨을 내뱉은 시몬이 갑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공기가 바뀌었다.
이쪽은 정적이 찾아왔으나 갑자기 성벽 밖이 뭔가 요란스러워졌다.
타악.
그때 시몬이 제 얼굴에 손을 올리더니 피어의 투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멋들어지게 투구를 벗고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눌려 있던 푸른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시몬의 눈가를 가렸다.
‘뭐지?’
성벽 밖의 소음과 요란함이 더더욱 커졌다.
시몬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전군 공세 중지. 에르제베트, 알라제, 헤르세바. 내 박자에 맞춰 움직여. 그리고 알라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시몬의 두뇌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게하임이야.]
시몬의 새로운 잠재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