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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동굴 밖·
해안가·
“이스라필 성녀님·”
바다에 마법진을 펼치고 있는 이스라필의 뒤로, 한 팔라딘이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룬 리그 4일 차가 시작됐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돌아보았다·
“결사의 움직임은 있었나요?”
“아직은 아무런 움직임도····”
“그렇군요·”
콧잔등에 손을 얹은 채 고민하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긋하게 기다려 보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테니까요·”
“성녀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참, 레테의 신성연방 대표팀은 잘 싸우고 있던가요?”
이스라필의 그 물음에 팔라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방금 제가 보던 바로는 암흑연합의 4번 샤텔 마에르와····”
“르바임 메델이 싸우고 있지·”
저벅 저벅·
해안가 옆으로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라딘은 식겁하며 급히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스라필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시작의 동굴에 와 있는 서로의 존재가 거슬리는 듯, 두 사람은 침묵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과거엔 친구였지만, 현재는 앙숙 중의 앙숙· 각자 하늘섬 내 전쟁 반대파와 전쟁 강경파를 이끌고 있는 양대산맥이었다·
스으·
그러다 다나가 손을 휘저어 팔라딘을 자리에서 물렸다·
팔라딘이 공손히 인사하며 떠나자 이스라필이 가벼운 화제를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르바임 메델의 대표팀 합류는 강경파 측의 제안이었죠·”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적당히 쓸 인물을 뽑았을 뿐·”
다나가 태연히 대꾸하자 이스라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참가를 원하지 않더라도요?”
“본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다나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힘은 신성연방에 도움이 된다· 그뿐이야·”
* * *
어린 시절·
르바임의 세상은 ‘새장’이었다·
몇 걸음 움직일 수 있는 새장이 그녀의 방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르바임은 괜찮았다· 원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처럼 새장 속에서 지내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병이었다·
어른들은 그녀가 ‘몸이 불어나는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몸이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 버리는 병·
르바임이 4살이 되니 이제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있었고, 실제로 새장이 몇 개가 터져 나가기도 했다· 어른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르바임을 보고 있었다·
-다 자라면 얼마나 커지는 거지?
-사람이 사는 건물 정도로는 숨길 수 없을 겁니다, 주교님·
-어떻게든 하게! 이런 사태를 해결하라고 자네들이 여기 있는 게 아닌가!
어른들은 르바임을 가둘 새장을 더욱 튼튼한 것으로 가져왔다·
새장은 튼튼했지만, 르바임이 자랄수록 그녀의 몸이 새장에 끼여서 피멍이 들고 피가 흘렀다· 너무 아프고 괴로웠던 어린 르바임은 엉엉 울었다·
그때마다 어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르바임에게 몸이 자라나지 않는 약을 먹이고, 아무리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계속해서 회복마법을 걸어 새장에서 죽어가는 그녀를 살려냈다·
-이 모든 게 병이란다· 이겨내야 한단다·
르바임은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새장이나 어른들은 죄가 없다· 그저 계속 커져서 아프게 하는 자신의 몸이 싫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작은데, 나 자신만 커지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위대한 데바께서 몸이 작아지도록, 그래서 네가 아프지 않도록 도와주실 거란다·
어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르바임에게 끊임없이 회복마법을 걸어댔고, 그녀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데바교 경전을 읽어주었다·
르바임이 매달릴 곳은 신앙뿐이었다· 경전을 보면서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우며 버텼다· 밤마다 살이 새장을 삐져나와 피멍이 들 때, 그녀는 울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어머니, 저를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 순간 하얀 빛이 응답했다·
인위적으로 프리스트를 만드는 신성관 같은 시설도 없이, 르바임이 스스로 신성을 깨우친 순간이었다·
그렇게 1년, 또 1년이 더 흐르고·
-놀랍군! 정말 놀라워!
르바임의 몸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고 지내는 보통 사람들과 비슷해진 것이다·
어른들은 ‘주교님’이라고 부르고, 르바임은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중년 남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대성공이야! 신앙의 힘이 순혈 거인의 육체를 평범한 사람처럼 변하게 한 걸세! 내가 말했지? 신앙에 불가능은 없다고!
-감축드리옵니다, 주교님·
처음엔 순혈이란 게 무슨 말인지, 어린 시절의 르바임은 알아듣지 못했다·
주교의 이종족 컬렉션이니, 노예 창고니 하는 말도 무엇인지 르바임은 몰랐다·
어쨌든 이제 아프지 않았다· 너무 몸이 커서 부끄럽지도 않았다·
르바임에겐 그것이 중요했다·
그러다 주교는 자신의 성과와 희귀 컬렉션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 했고, 르바임을 연회장에 데리고 왔다·
르바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장에서 빠져나와 넓은 연회장에 오게 되어 기쁨에 들떴다· 그러다 보니 아주 가끔, 긴장이 풀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몸의 일부가 갑자기 확 커지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작은 푸딩을 먹으러 입을 벌릴 때 혓바닥이 확 커져서 덜렁거리거나, 연회장에 들어온 벌을 손으로 쫓아내려 하다가 손이 갑자기 커져서 테이블과 유리창을 통째로 박살 내버린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르바임을 향해 ‘거인’이라고 웅성거리며 끔찍한 것을 보듯 흘겨보았다·
그때마다 주교는 자신을 망신 줬다면서 그녀를 아주 좁은 새장에 가두고는 채찍질하곤 했다·
주교가 짜증을 푼 뒤 돌아가면, 그 뒤에 그녀를 돌봐주는 어른들이 와서 치유마법을 걸어주며 말했다· 네 주인님은 네가 미워서 때린 게 아니라고· 네가 커져서 펑 터지는 게 두려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갔다·
이번에도 르바임이 주교를 따라 연회장에 갔을 때, 한 낯선 여자가 르바임의 손목을 잡아끌며 조용히 말했다·
-너, 잠깐 따라와·
그녀는 자신을 연방 수사관이라고 소개했다· 이내 르바임을 주방 창고로 데려가더니,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며 그녀의 옷을 벗겼다·
-아·
그렇게 드러나고 말았다·
예쁜 드레스에 가려져 있는, 온몸에 남은 새장에 눌린 선명한 자국들이 말이다·
연방 수사관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하며 르바임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우리가 너무 늦어서 정말 미안해·
그 뒤, 주교는 노예매매죄를 포함한 여러 혐의로 체포당해 처형대에 올랐고 르바임은 자유의 몸이 되어 연방 직속 수도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르바임은 아주 어린 아기 때, 거인들이 사는 마을에서 주교 일행이 몰래 납치한 ‘순혈 거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를 도와줄게·
-다시 거인이 되어 마을에 돌아갈 수 있도록·
수사관과 수도사들은 르바임이 다시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
르바임은 새장 밖에서도 커지지 못했다·
* * *
저벅 저벅·
신성연방의 4번, 르바임 메델이 주먹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걸어왔다·
그 앞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엎드려 헐떡거리는 샤텔이 있었다·
힘의 격차는 분명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는 샤텔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르바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르바임이 태연히 말했다·
“그런 꼴로도 나를 동정하는 건가요·”
샤텔은 침묵을 지키며 르바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결국 르바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말해 드리죠·”
그녀가 두 검지를 뻗어서 가슴 앞에 놓았다·
“키젠 학생이라면 그쪽도 결투 중에 ‘방호 슈트’를 입은 적이 있었을 거예요· 거기에 출력되는 배리어 게이지· 게이지는 100%부터 시작하죠·”
그녀의 두 검지 사이에 가로로 선이 그어지고, 신성이 가득 차올랐다·
“누구나 100%의 수치를 가지고 생활한다고 했을 때, 나는 여러 문제로 평시 상태가 10% 정도예요·”
검지 사이에 신성이 일순 확 줄어들며 아주 찔끔 남은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신 예상대로 ‘인간화 시술’의 결과· 당신들 암흑연합에서 부르는 ‘크기 학대’와 같은 말이에요· 나는 새장에 갇혀 지냈어요· 내 잠재된 육체적 능력은 순혈 거인이지만, 나는 10%의 체력만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야 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스윽·
그녀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여기서 내 10%의 체력을, 100%로 회복하기 위해 치유마법을 걸면 어떻게 될까요?”
우우우우웅!
그녀의 오른팔이 신성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약물로 절여진 내 몸을 본래 상태로 되돌릴 정도로 강력한 치유의 힘이라면?”
치유의 효과가 적용되며, 그녀의 얇은 오른팔이 그녀의 몸 전체보다 더 거대하고 우락부락하게 커졌다· 지켜보던 샤텔의 눈이 부릅떠졌다·
“짧은 시간, 본래 제가 가져야 했을 거인의 육체로 되돌아오는 거죠· 놀랄 거 없어요·”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만으로도 온 팔에 강렬한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이었다· 주먹이 서서히 줄어드는 듯하더니 다시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순혈 거인처럼 커지고, 순혈 거인 그 이상의 힘을 낼 수는 있지만,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에 커진 몸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거인, 르바임 메델의 정체였다·
“궁금증이 해결됐나요? 이제 룬 리그 내내 저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걸 그만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요·”
“····”
샤텔이 비틀거리며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내 아버지는· 비정상적으로 큰 나를 지키려다· 사람들로부터 살해당했다·”
“····”
“그래서 결심· 했다· 룬 리그에서· 인식을 바꾸겠다고· 거인은· 몬스터 같은 게 아니라고·”
샤텔의 눈빛이 일렁였다·
“나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모든 거인을 위해서·”
“듣자듣자 하니 피가 거꾸로 솟네요·”
르바임의 눈에 바짝 독기가 서렸다·
“내게 거인에 대한 좋은 기억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거인을 생각하면 아프고 짜증 날 뿐이에요·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됐다는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죠· 그 동정의 시선조차 이제는 짜증 나요·”
그녀가 어꺠를 으쓱했다·
“까놓고 말해, 지금 이렇게 작아진 것도 내 노력의 결실일 수 있죠? 거인의 세상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세상에서 잘살게 됐으니 적응의 결과물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건· 노력의 결실· 아니다·”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학대의 흉터다·”
“감히!!”
아픈 곳을 찔려 격분한 그녀가 힐링을 걸어 오른팔을 비대하게 만든 뒤 내질렀다·
샤텔도 지지 않고 지면을 짚었다· 지면이 먹색으로 물들고, 수묵화처럼 변했다·
<영역 장악 – 조정>
지면이 뭉쳐 주먹의 형태로 빚어진 뒤 그대로 르바임의 오른팔과 격돌했으나, 순혈 거인이 내지르는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쾅 소리와 함께 단번에 주먹이 깨져 나갔다·
“힘의 차이는 절감했을 텐데요!”
샤텔의 암벽 주먹을 완전히 박살 낸 르바임의 주먹이 샤텔에게 다가왔으나·
터어엉!
이번에는 샤텔에게 닿지 않았다· 지면 아래에서 새로운 주먹이 일어나 그녀의 주먹을 쳐낸 것이다·
“···!”
샤텔이 다시 강하게 지면을 짚었다· 발을 딛고 있는 그녀의 지면이 모래 구덩이처럼 움푹 파였고, 주위의 모래는 올라오며 거대한 모래 경기장과도 같은 광경으로 변했다·
<영역 장악 – 포위>
쿠와와와와와와!
모래로 이루어진 두꺼운 경기장이 생성되고 경기장 벽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으나, 상반신 전체에 힐링을 걸어 두 팔을 거인화한 르바임이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는 것으로 경기장을 일격에 통째로 부숴 버렸다·
“무슨 마법을 쓰든 내 힘 앞에선 소용없어요·”
“진정으로 그 작은 모습이· 노력의 결실이라면· 정말로 너의 명예라면·”
샤텔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왜 변신할 때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거지?”
다시 한번 한 차례 흠칫한 그녀가, 이내 그 흠칫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듯 비명을 지르며 제 몸 전체에 치유마법을 걸었다·
<그레이트 힐>
화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몸이 극도로 커지며 이제는 샤텔을 눈아래로 훤히 내려다보는 진짜 거인이 되었다· 그녀의 동공이 살벌하게 빛났다·
샤텔도 지지 않고 손끝을 움직였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 대에서 없애야 한다·”
<샤텔 오리지널 – 영역장악>
주위의 지반 전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르바임은 뒤늦게 눈치챘다·
샤텔은 전투 내내 영역장악으로 주위의 대부분의 지형을 자신의 칠흑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이내 주위의 지형 전체가 일어나 샤텔을 집어삼키더니 탑처럼 거대해졌다·
<샤텔 오리지널 – 기간테스>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
거대화된 르바임보다 더 거대해진 땅의 거인이 솟구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모든 거인을 위해· 아인종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 그게 내 의지다·]
“그 얄팍한 선의에 기댄 허술한 동기 따위·”
콧김을 뿜은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 ‘힘’으로 눌러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