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6화
신성연방 대표 2번·
전 교황의 아들·
신의 손, 모제 델 베아투스·
전공은 축복학·
여러 정보를 떠올리며 에이젤은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했다·
옛날이다 못해 고대 복식인 목자 옷을 입은 눈앞의 상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
자신의 팔을 베고 태연자약하게 바위에 누워 있다· 지금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생각은 사실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털끝 한 올 한 올이 에이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이기지 못한다고·
끔찍한 괴물이라고·
승리와 재능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에이젤에게, 이것은 상당히 낯선 감각이었다·
‘나도 지쳐 있어· 여기선 도망가야 해·’
언젠가 싸워 이겨야 할 상대지만, 적어도 그때가 지금은 아니다·
에이젤은 은밀히 두 발밑에 바람을 일으켰다·
“도망치려고?”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에이젤은 목 언저리에 서늘함을 느꼈다·
반쯤 뜬 눈으로 모제가 가만히 에이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만둬·”
하지만 에이젤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폭포가 내려오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바람을 일으켜 전신을 휘감은 채 빠르게 저 괴물에게서 벗어났다·
휘오오오오오!
가속·
여기서 더 가속·
머리가 정신없이 흩날리고, 맞바람에 뺨이 흐물거릴 만큼의 속도로 모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방금 앞에 있었던 바위가 콩알처럼 보인다·
‘이대로 암흑연합 본진으로 돌아가자·’
에이젤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서 시몬이랑 대책을···!’
그 순간·
에이젤의 눈앞으로 신발 밑창이 나타났다·
쩌어어어어어엉!
가공할 만한 충격이 뇌를 뒤흔들었다·
에이젤은 자신이 비행하던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며 하늘을 보았다· 공중에 떠서 태연히 발차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제의 모습이 보였다·
‘···내 최고 속도를 따라잡았어?’
쿠쿠쿵!
에이젤의 몸이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며 추락했다· 그 와중에 기지를 발휘해 바람마법으로 쿠션을 만들어 버텼으나, 첫 추락 이후 몇 번이나 튕겨 나가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후두두둑-
돌 파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바닥에 엎어진 에이젤이 쿨럭쿨럭 피를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했잖아·”
타악·
모제가 에이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볍게 안착했다· 에이젤은 피 묻은 입가를 쓱 닦으며 낭패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녀석, 축복학 전공이잖아·’
축복학을 전공한 프리스트들· 흔히 ‘축복사제’들은 암흑연합의 제1순위 타깃이다·
후방에서 동료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며 아군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이들의 존재는 네크로맨서들의 입장에서 극히 까다롭다· 프리스트 교전서에는 축복사제를 제일 먼저 찾아내 참살하고, 그 뒤에 2순위로 치유사제를 참살하라고 적혀 있다·
에이젤이 처음에 모제를 만났을 때 잠깐이나마 망설였던 이유도 이에 기반한다·
그가 비전투원인 축복술사라면, 게다가 2번을 따낼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축복술사라면, 까다로운 적수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몸을 피한 건 순전히 본능의 영역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
모제가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말했다·
에이젤의 경계하는 눈빛이 나쁘지 않은 건지, 모제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주위를 한 바퀴 걸었다·
“이번 신성연방 대표팀은 공교롭게도 이상한 녀석들만 모아놨어· 누구 말대로 걸어다니는 정신병동이라고 할 만해·”
“···?”
모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료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지키는 데 특화된 수호사제, 신수를 다루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신수가 되는 신수사제,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고문하는 이단심문관·”
촤악·
그의 발끝이 지면에 닿으며 모래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령을 못 써서 정령에 광휘를 입혀 성령이라 속이는 성령사제까지· 아, 그중에 나는 뭐냐고?”
모제가 자신을 가리키며 삐딱하게 웃었다·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만 축복을 거는 축복사제·”
‘역시 그런가!’
에이젤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강화해 싸우는 타입의 전투형 축복사제· 암흑연합이야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이 많지만, 신성연방의 문화와 분위기 등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희귀했다·
방금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도, 헤이스트처럼 몸이 빨라지는 축복을 사용했으리라·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준다는 건, 나를 여기서 확실히 끝장내겠다는 생각이겠네·’
에이젤이 나직이 침을 삼켰다·
아까 바위에 드러누운 채 등장한 것도 그렇고, 이 녀석은 여흥을 즐기는 타입이다· 지금은 몸의 데미지를 가라앉혀야 한다· 낯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질색이지만,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억지로 말했다·
“···아, 알 것 같아· 타인에게 축복을 걸지 못하는 대신, 자기자신에게만 통하는 특수한 축복을 쓸 수 있는 거지?”
“무슨 헛소리야·”
모제가 손끝으로 제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남에게 축복을 못 건다고는 말 안 했는데·”
우웅!
일명 신의 손이라 일컬어지는 모제의 오른손에, 갑자기 뭔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뭉치는 듯한 광경이 일어났다· 에이젤이 반응하기도 전에, 모제가 팔을 뻗어서 에이젤에게 그 투명한 뭔가를 날렸다·
화아악!
뭔가가 에이젤의 몸에 깃들었다·
‘나한테 축복을 썼어!’
전신에 있는 칠흑의 거부반응이 일순 느껴지다가 나중에는 사라졌다·
잘 모르겠지만 몸이 한층 가벼워졌다· 모제가 자신을 강화한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어·’
휘오오오오!
어쨌거나 몸의 충격은 어느 정도 회복됐다·
에이젤의 주위로 바람이 일어났다·
“또 도망치려고?”
모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만둬·”
이번에는 다르다· 에이젤이 팔을 내리그었다·
<윈드 프레스>
푸확!
무거운 대기가 순간적으로 모제를 짓눌렀다· 모제의 몸이 잠시 내려간 사이, 에이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속박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져야 해!’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산처럼 우뚝 솟은 절벽이 보인다· 저 절벽을 넘어가서 숲에 숨는다면 아무리 모제가 자신보다 빠르더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전신에 바람을 휘감은 에이젤이 두 발로 치면을 박차며 그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
한참을 떨어져 있던 절벽이 갑자기 눈앞까지 훅 다가와 있었다·
‘잠깐! 너무 빠르···!’
쿠우우우우우우우웅!
그대로 절벽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에이젤이 커헉!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비탈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이대로는 위험하다· 다시 모제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에이젤이 힘겹게 지면을 짚고 몸을 일으켰으나·
‘?!’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그의 몸이 수미터 넘게 도약하여 솟구쳤다·
고작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에이젤은 다시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크으으!”
이번엔 조심스럽게 다리 힘만으로 걸으려고 했지만, 몸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계처럼 한참을 나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너무 빨라졌다·
속도를 주체할 수가 없다·
‘너무 빠르니 역으로 움직일 수가 없어!’
“그렇지?”
다시 옆으로 태연히 등장한 모제가, 엉망진창이 되어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에이젤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단지 축복을 갈고닦았을 뿐인데·”
우웅!
그의 오른손에 축복의 힘이 일렁거리며 펼쳐졌다·
“너무 뛰어난 축복은 저주였던 거야· 물론 범재 한정이지만·”
그가 오른손을 휘둘러 다음 축복을 에이젤에게 걸었다·
“더 잘 보이게 되는 축복·”
에이젤의 두 눈이 갑자기 망원경이 된 것처럼 멀리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호수숲 천장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그 호수에 헤엄치는 작은 송사리의 비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서 그 비늘에 사는 미생물·
그 미생물을 구성하는 세포·
그 세포의 더 작은 단위의 단백질까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계속 뭔가가 보인다·
“더 잘 들리게 되는 축복·”
에이젤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한참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공격 마법 소리, 더 떨어진 곳인 본진에서 시몬과 샤텔이 말하는 대화 소리, 더 위로 올라가 호수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소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하품 소리,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그만···!”
완벽히 농락당하고 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더 잘 보이게 됐지만 장님이나 다름없어졌고, 더 잘 들리게 됐지만 귀머거리나 다름없어졌다·
에이젤이 두 팔을 펼치더니 급기야 자기자신에게 저주를 연달아 미친 듯이 걸었다·
속도를 떨어뜨리는 슬로우·
시야를 가리는 블라인드·
소리를 차단하는 사운드리스·
차악책으로 자신에게 풀스택의 저주까지 건 뒤에야 비로소 에이젤은 미쳐 버리기 직전에 멈춰 설 수 있었다·
타인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의 저주가 축복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
선악의 역전·
흑백의 전환·
온통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제법인데·”
윙윙 모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젤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일단 하늘로 올라가자!’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상관없다·
일단 모제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자신에게 속도를 높이는 축복을 걸어준 건 그의 실수다·
에이젤은 두 발을 띄운 채 날아올랐다· 빠르게 공중으로 치솟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하늘로 올라간 뒤에는 정확히 3초를 센 뒤에 아래로 꺾는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짧았지만 이 속도라면 호수숲의 끝에서 끝까지는 갔으리라· 7지역에서 1지역으로· 그리고 1지역은 암흑연합의 본진이다·
자, 이제 머리를 감싸고 충격에 대비하면 된다·
‘성공이야!’
모제에게 벗어난 덕분인지 모제의 축복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청각이 회복되었다· 시각도 회복되는 것 같다· 에이젤은 머리를 감싼 채 슬며시 눈을 떴으나·
“!”
그는 여전히 모제의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쩌어어어엉!
모제의 발차기에 걷어차인 에이젤이 저만치 밀려나 나무를 연달아 부수고 지면에 부딪혔다·
쿠구구구구!
에이젤이 너덜너덜해진 채 피를 토했다·
‘어떻게 된···!’
“방금은 두뇌 회전을 강화하는 축복을 걸었어·”
모제가 저벅 저벅 걸어와 제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너무 빨리 생각해서 몸이 안 따라주게 되는 거야· 넌 날아서 도망쳤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몸은 움직이지도 않았지· 안 그래?”
“커흑!”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다·
‘너무 강해·’
모제 델 베아투스는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강적이었다·
모제를 상대하려면, 저주보다 더 저주 같은 그의 축복을 상대하려면, 저주술사가 있어야 한다·
저주술사가 없다면 최소한 이를 대비할 저주를 마련해야 했다·
‘시몬에게··· 알려야··· 하는····’
“슬슬 끝이네·”
모제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제는 힘이 다 빠진 채 쓰러진 에이젤 앞에 섰다·
“내 오른손·”
고오오오오오오오!
그의 오른손에 거대한 신성이 휘몰아치며 축복이 일렁였다·
“아까는 맛보기야· 기적의 축복을 일으키는 이 신의 손에 네크로맨서나 언데드가 직접 닿으면 어떻게 될지-”
모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궁금하지 않아?”
천천히·
흐릿한 시야로 신의 손이 죽음을 움켜쥐고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인다·
에이젤의 체력은 아웃되기 직전일 만큼 아슬아슬하게 남은 상태· 만약 이런 몸 상태에서 저 오른손에 닿는다면 아웃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는다·’
죽음의 손길이 결국 에이젤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처억·
그 손이 에이젤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슴까·”
에이젤의 흐릿한 시야가 움직인다· 어느샌가 나타난 하얀 머리카락의 여성이 모제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살상은 금지한다고· 이 새끼야·”
아직 시야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