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6화
언더링의 호수숲, 5구역·
새하얀 천사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큰 키의 여성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우뚝 솟은 점령지 기둥 주위에는 언더링들이 박살 난 채 널려 있었다·
이내 천사와도 같은 자태의 여성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평범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성체의 성녀, 리사라·
그녀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금속 기둥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찾아내는 데 오래 걸렸네·”
5지역의 점령지들은 전부 빼곡한 숲에 숨어 있어서 발견하기 까다로웠다· 그녀가 천천히 금속 기둥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우웅!
텅 빈 금속 기둥에 리사라의 신성이 흘러 들어가며 ‘점령’이 진행되기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고 신성을 소량씩 흘러 넣는 것으로, 최대한 느리고 효율 좋게 점령을 진행하고 있었다· 점령이 끝나면 바로 암흑연합 측을 공격할 예정이니 힘을 아껴야 했다·
‘지금쯤이면 선배님들은 점령을 다 끝냈겠지?’
아마 자신이 점령지를 가장 늦게 찾았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리사라는 천장에 보이는 호수를 올려다 보았다·
하늘 대신 호수,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물고기들의 모습· 신비로우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었다·
‘!’
그때 갑작스럽게 전신의 털이 솟구치는 감각과 함께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하늘에서 주황빛이 감도는 검은 화염구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점령지 근방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퍼어어어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화염구가 떨어지며 불기둥이 솟구쳤다· 굳이 방어하기보다는 점령을 잠시 그만둔 채 뒤로 물러나 피한 리사라가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암흑연합 측의 공격? 벌써?’
서쪽 하늘에 흑탄처럼 시커멓고 삐쭉삐쭉 갈기가 돋아난 드래곤이 떠 있었다·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네크로맨서에 대해서는 선배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암흑연합 2번 헥토르 무어!’
[네가 올해 성녀가 됐다는 프리스트인가·]
후욱·
후끈한 열기를 흩뿌리며 내려온 드래곤이 점령지에 착지하는 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변신을 해제하여 인간으로 돌아오는 속도가 기가 막힐 정도로 빨랐다· 육중한 체격, 근육질의 몸, 그리고 살벌한 인상의 남자의 눈에는 강렬한 적의가 감돌고 있었다·
“피차 마찬가지겠지·”
헥토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서워!’
성녀가 됐다고 해도 내면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리사라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 지었다·
“헥토르 무어· 당신도 올해 군단장이 됐다는 소문은 들었, 쓰믑니다! 그, 그것도 전임자를 죽인 사악한 방식으로요!”
“····”
“저, 저희 연방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성녀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끝없이 많았죠! 수많은 살의를 견디며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성녀로서 서 있습니다· 그런 입장이니-”
그녀의 눈이 일렁였다·
“저는 당신을 그리 좋게 보지 못할 것, 같쓰믑니다·”
크큭·
하·
어깨를 한 차례 들썩거리며 웃던 헥토르가 이내 고개를 들며 눈을 희번덕하게 떴다·
“피차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돌진하며 모습을 바꾸었다· 검은 악룡과, 하얀 천사가 중앙에서 부딪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 * *
5지역 B점령지 근방·
콰콰콰콰콰콰!
신성연방의 5번 디아나가 빛의 사슴에 올라탄 채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빛의 사슴이 지면에 발을 디딜 때마다 흙에서 꽃과 풀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빙판을 펼치고, 얼음 날이 달린 신발을 신은 채 따라잡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암흑연합의 5번, 메이린 빌렌느였다·
“첫날부터 이리 맹공을 퍼붓다니 예상외이옵니다·”
디아나가 중얼거리며 신수마법을 빛의 사슴에게 걸었다· 그러자 빛의 사슴의 뿔이 환하게 빛나더니, 그 안에서 일어난 빛의 섬광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촤아아아앙!
등 뒤에 마법진으로 바람을 일으켜 순간적으로 피해낸 메이린이 팔을 뒤로 뻗었다· 방금 섬광이 지나가며 부서진 얼음 파편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날카로운 끝을 돌려 디아나에게 날아갔다·
디아나는 직접 방어마법진을 펼치는 것으로 막아낸 뒤 말했다·
“이렇게 빠른 시점의 공격이라면 당신들도 점령을 포기하고 들어온 것이겠지요· 이런 무식한 기습이 통하리라 생각했사옵니까?”
“바로 그 무식한 기습으로 네 ‘점령’도 방해했지· 안 그래?”
메이린이 빙판을 빠르게 밀고 나가면서 팔을 휘둘렀다· 빛의 사슴에 탄 디아나도 지지 않고 두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칠흑빙결계 마법과, 신성 범위 마법이 연달아 허공에서 부딪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디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5지역의 다른 점령지도 암흑연합의 공격을 받고 있는지 폭음이 연달아 들리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단일로는 프리스트를 이길 수 없어· 굳이 공격할 거라면 두 명 이상이 팀으로 움직여 다대일 구도를 만드는 게 기본·’
하지만 암흑연합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흩어져서 점령지 다수를 동시에 공격하고 있다· 공격자들 모두 화력 담당이고, 요란하고 시끄러운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다·
‘마치 시선을 끌려는 것처럼·’
거기에 동료들의 합류가 이상할 만큼 느린 것도 신경 쓰였다·
후방인 6지역과 7지역에 있는 아군이 빨리 5지역으로 와줘야 하는데, 좀처럼 오질 않고 있다·
암흑연합 측이 흩어져서 공격하는 것도, 마치 이쪽의 증원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마·’
그녀의 시선이 가장 후방이자 본진인 7지역 쪽으로 향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 * *
<암흑연합이 7A 점령지를 점령했습니다·>
워턴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에게····’
본진을 내줬다·
찰나의 순간, 워턴의 머릿속에 수많은 광경들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프리스트가 된 일, 신앙에 심취하여 미친 듯이 공부하던 일, 동네의 이단들을 추적한 뒤 이단심문관에게 제보하여 그들을 체포하는 데 도움이 된 일, 그 일로 이단 심문관 훈련소에 들어간 일·
그리고 그 유명한 심문청장, 레이트를 만난 일까지·
-너는 내 뒤를 이을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잘 봐둬라·
침대에 묶인 이단을 손수 고문하며, 레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워턴이 픽 웃었다·
-청장님 뒤를 잇는 건 아들분이겠죠· 스웨이라고 하는 이름이던가?
-그놈은 내 목을 따는 것밖에 관심 없다·
레이트가 낄낄거리며 칼로 이단의 살을 찢었다·
그런 레이트의 모습을 보며 워턴은 가슴이 뛰었다·
훈련소 수석이니 단순히 격려 차원에서 해준 말이라도 기분이 좋았다· 레이트는 그녀의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전부 망했어·’
신성연방 전체가, 그리고 레이트가 지켜보고 있을 큰 무대에서 너무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직접 본진을 지키고 있었으나 저들에게 더럽혀지고 말았다·
워턴이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있는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
빛이 내려왔다·
이건 치유마법이었다· 상처가 치유되고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워턴이 고개를 돌리니, 빛을 휘감은 여성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르바임 자매님!’
몸에 힘이 붙고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자 필요했단 마지막 한 명, 치유 담당인 4번 르바임이 이곳에 도착했다·
워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워턴 심문관님! 잠깐만-!”
9번 아렌디아가 뭐라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워턴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굳건히, 이미 암흑연합 측에 빼앗겨 더렵혀진 점령지 기둥을 향해 달렸다·
이제는 저들의 점령을 저지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전부 이 자리에서 죽인다·’
그것만이 본진을 빼앗긴 대역죄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녀의 몸에 신성이 폭발할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비장의 기술을 쓴다·
물론 워낙 리스크가 크기에, 별의 성녀 레테는 이 기술에 제한을 걸었다·
-위급하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 것·
-확실히 맞힐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 것·
-3번 테르곤과 4번 르바임이 모두 있을 경우에만 사용할 것·
지금이 바로 그 위급하고 불가피한 때가 아니겠는가·
<오버 헤이스트>
워턴은 스스로의 체력을 깎는 대신 짧은 시간 전신을 극도로 활성화시키는 위험한 자가 축복을 사용했다· 잔상을 그리며 빨라진 그녀의 몸이 빈틈을 노리고 암흑연합의 내부로 파고든다·
에이젤은 테르곤이 상대하고 있고, 클라우디아는 아렌디아가 상대하고 있다· 샤텔은 힘을 모두 소진했으며, 카미바레즈는 점령에 너무 많은 칠흑을 쏟아 기둥에 손을 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가히 완벽한 빈틈·
촤아아아아아악!
워턴의 너무 빠른 돌파에 암흑연합 측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금속 기둥 옆으로 들어온 워턴이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영속 신성마법을 발동한 채 두 팔을 펼쳐 들었다·
<발라 모르티페르(Vala Mórtĭfer)>
촤아아아아아아!
그녀의 발빝을 중심으로 방대한 영역의 신성 마법진이 펼쳐졌다· 동시에 자신의 신성 아공간에서 아껴뒀던 고문 기구 네 개를 꺼냈다·
현재 ‘구속 모드’인 고문 기구들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떠올라 ‘처형 집행’ 모드로 바뀐다· 칼날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가시가 솟아오른다·
‘이겼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고문 기구들이 워턴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 테르곤이 다급히 그녀에게 백마법 하나를 걸어주는 모습이 보인다· 르바임도 치유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시야가 다가오는 고문 기구로 가려지고, 칼날과 가시의 서늘한 감각에 살결이 떨린다·
이어지는 고통을 기대하며 그녀가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내가! 네크로맨서 4명을···!’
그 순간·
터어어어어어어엉!
워턴을 찌르기 위해 다가오던 고문 기구들의 몸체가 모조리 박살 나며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고문 기구들이 물러나고 어둡던 시야가 밝아진다· 그녀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어?’
“잘 봤어·”
휘오오오오오오!
에이젤이 팔을 뻗은 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바로 계속 기다리고 있던 ‘비장의 한 수’구나?”
“···!!”
일명 너무 빠른 흑마법·
풀고르의 초고속 중첩기·
에이젤의 방금 이 기술은 자칫 적인 워턴을 지킨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문 기구들이 날아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며 에이젤이 말했다·
“그 기술의 정체는 아마도, 영역 내에 들어온 대상과 시전자의 상처를 강제 공유하는 효과겠지?”
그 말을 들은 워턴의 입이 벌어졌다·
‘어떻게!’
워턴은 고통의 심문관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지만, 그 실상은 특이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고문하는 것으로 타인을 고문하는 능력을 가졌다·
신성의 세계에서는 그녀의 뒤틀린 성향과 심성이 낳은 너무나 생소하고 희귀한 백마법이었지만·
“암흑연합 쪽 저주에는 그런 게 꽤 많거든·”
크윽!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가 다급히 등 뒤에서 단검을 뽑아 제 목에 겨누었다· 이렇게 됐으니 이판사판이었다·
촤악!
그러나 클라우디아가 쏘아 보낸 끈끈이 점액이 단검의 칼날에 묻었다· 워턴이 단검을 제 목에 꽂았지만 물컹하는 감각만 느껴졌다·
죽는 것조차 이리 어렵다니! 워턴이 피눈물을 쏟아내며 외쳤다·
“나를 죽여!”
쿠궁!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르곤이 나타났다· 그가 워턴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고·
쿠구구구구구구구!
샤텔이 바닥을 짚어서 워턴의 등 뒤로 지면의 벽을 솟구치게 했다· 테르곤의 주먹이 지면의 벽을 부수느라 약해진 상태에서 워턴의 뒤통수에 빗맞듯 부딪혔다·
고작 그것만으로 에이젤은 물론 영역에 들어와 있던 에이젤, 샤텔, 카미바레즈, 클라우디아가 크게 휘청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한 충격이었다·
‘이런 거구나!’
네 사람 모두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빗맞았지만 저 기술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몰랐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영역 범위에서 벗어나!”
에이젤이 뒤통수의 충격을 버티며 소리쳤다· 그 지시를 들은 샤텔이 재차 바닥을 강하게 짚었고·
터어어어어어어엉!
네 사람의 몸을 중심으로 지면이 솟구치며 그들을 밀어냈다· 동시에 에이젤이 바람을 일으켜 그들의 몸을 영역 밖의 공중으로 띄워 버렸다·
“저들이 도망가요!”
아렌디아가 외치면서 신성 마법을 쏟아 보냈지만, ‘모르티페르’를 봐버린 네크로맨서들은 빠르게 전장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무기가 없으니 이마를 바닥에 찧어대는 워턴의 입꼬리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쭉 올라가 있었다· 강박과 쾌락에 미쳐 버린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제 눈을 향해 가져가려는 순간·
“그만하게·”
덥석·
테르곤이 막았다·
그의 뒤통수에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미 네크로맨서들이 모르티페르의 영역 밖으로 도망쳤네·”
“아·”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아· 아· 아아아····”
“모르티페르를 보인 이상 자네는 이제 별로 쓸모가 없지만, 몸을 추스르게· 그리고·”
테르곤이 분노 섞인 시선으로 워턴을 돌아보며 말했다·
“레테 성녀님께 드릴 말씀을 떠올려 두는 게 좋을 걸세·”
테르곤이 네크로맨서들을 추적하기 위해 지면을 박차고 하늘을 날았다·
워턴이 고개를 푹 숙였고, 아렌디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신성연방 진영이 에이션트 언더링을 처치했습니다·>
<암흑연합 진영이 에이션트 언더링을 처치했습니다·>
룬 리그 첫째 날부터 놀라운 소식들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