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화
갑작스럽게 신성연방 본진에서의 전투가 시작됐다·
<홀리 엘리먼트 인챈트>
신성연방의 7번 워턴이 채찍에 신성한 불꽃을 입힌 뒤 휘둘렀다·
쐐애액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채찍이, 에이젤이 펼친 방어마법에 간단히 막혔다·
“쳇!”
워턴이 물러나고, 이번엔 9번 아렌디아가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커다란 금속 대포를 어깨에 짊어졌다· 연달아 신성 미사일을 투하했지만 역시나 계속해서 펼쳐지는 방어 마법진에 막히고 말았다·
“진짜 해보자 이거지?”
뿌드득 이를 간 워턴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곳곳에 놓여 있는 고문을 위한 가시 의자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몸체가 쩍 벌어지고 가시를 앞으로 세운 채 날아갔다·
워턴이 자랑하는 고문 기구를 이용한 강공·
그러나 이번엔 샤텔이 손바닥으로 지면을 짚었다·
쿠구구구구구!
지면이 위로 솟아올라 모두의 몸을 감싸는 튼튼한 벽처럼 변했다· 바위벽에 부딪힌 고문 도구들이 허무하게 튕겨 나가 버렸다·
‘이상해·’
지켜보던 아렌디아의 눈매가 좁혀졌다·
‘기습도 성공시켰고 수적으로도 우세면서 왜 방어만 하는 거지?’
아렌디아는 최대한 눈을 가늘게 뜬 채 암흑연합 대표들이 뭘 하는지 살폈다·
클라우디아와 카미바레즈가 손바닥을 점령지의 금속 기둥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의 칠흑이 빠르게 기둥에 흘러들어 가며 순수한 흰색이었던 기둥의 끝부분이 점차 어둡게 변했다·
이를 지켜보는 아렌디아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지, 진심으로?’
저들은 신성연방의 본진을 점령할 속셈이었다·
저건 결코 ‘속임수’나 ‘하는 척’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아와 카미바레즈는 정말로 점령에 모든 칠흑을 쏟아붓고 있었다·
‘혹시 내가 룰을 잘못 이해하고 있나?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럴 이유가 없을 텐데?’
이 룬 리그의 룰은 120시간이 끝나는 시점에 점령지가 많은 쪽이 승리한다· 본진을 점령한 측이 점령지의 수와 관계없이 이기는 룰 또한 어디까지나 120시간이 지난 뒤에 계산된다·
네크로맨서들이 무리해서 첫날에 본진을 점령해 봐야, 5일 내내 지킬 수 있을 리 없다· 그냥 저들이 돌아간 뒤에 재점령하면 그만이다·
이득이 크지 않은 반면 저들이 짊어지는 리스크는 어마어마하다· 이동 중간에 들킬 위험도 크고, 스스로 적의 품에 들어오는 꼴이기에 역포위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임무를 완수해도 저들이 무사히 암흑연합 측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저들이 레테의 움직임을 알고 왔는지 그냥 온 건지는 모르지만, 만약 레테가 본진에 남아 있었다면 저들은 전멸이었다· 그만큼 리스크가 큰 행동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아렌디아!!”
워턴의 발악하는 듯한 외침에, 아렌디아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이를 빠득빠득 갈며, 얼굴이 시뻘게 진 워턴이 외치고 있었다·
“뭘 멍하니 있어! 저 사악한 이단 쓰레기들이 우리 본진을 점령하고 있잖아!”
워턴의 저 눈이 뒤집힐 것 같은 표정을 보는 순간, 아렌디아는 왠지 암흑연합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더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워턴의 일갈을 들은 아렌디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들은 지금 너무 깊이 들어와 있다· 6지역과 5지역의 점령지에 가 있는 아군이 본진인 7지역으로 돌아와 준다면 포위당하는 건 저쪽이다·
‘네크로맨서들이 우리 본진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해!’
아렌디아가 두 손을 펼치며 조명 마법을 준비했지만·
휘이이이잉!
마법진을 완성하는 것보다 빠르게 칠흑 섞인 바람이 휘몰아치며 구성 요소를 고장 내버렸다·
‘바, 바람?’
소문으로나 들은 적 있었다·
칠흑역학 네크로맨서의 정수· 멀리 떨어진 허공에 흑마법을 즉시 무영창으로 발현하는 비기인 ‘풀고르(Fulgor)’·
그리고 에이젤 브링어의 풀고르는 키젠 전체에서 최고 수준의 속도를 자랑했다· 아렌디아가 조명 마법진을 쓰는 족족 파훼당하고 있었다·
‘마법진을 펼치는 걸 방해하겠다면···!’
이번엔 아공간에서 조명탄을 꺼내 하늘로 날렸다· 그러나 그 조명탄 또한 중간에 궤도가 틀어지더니 거꾸로 날아가 애꿎은 나무에 부딪혀 폭발했다·
하는 수 없이 신성폭약이라도 터뜨려 소음을 낼 생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어느새 이 주위의 대기가 결계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음성 차단 결계?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야·’
소리가 다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매질이 필요하다· 매질은 공기를 비롯한 기체의 분자들이고, 이들이 진동하면서 소리가 발생한다·
그리고 에이젤 브링어는 바람을 포함한 기체를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주위에 바람의 흐름을 적절하게 움직여 밖으로 나가야 할 소리를 분산시키고 있었다·
‘완벽하게 당했어·’
아렌디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러면 바깥에 상황을 알릴 수 없다·
그나마 방법이 있다면 여기 둘 중 하나가 직접 뛰쳐나가는 것이겠지만, 그러면 하나 남은 프리스트를 네크로맨서 네 명이 협공할 테니 위험하다·
그렇다고 둘 다 뛰쳐나가면 방해를 받지 않는 네크로맨서들이 모두 칠흑을 기둥에 주입해서 순식간에 본진을 점령해 버릴 것이다·
이건 외통수였다·
“뭘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거야? 아렌디아 자매! 저 새끼들! 저 새끼들이 우리 본진을···! 뭐라도 해보라고 좀!”
워턴도 처음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격렬히 채찍을 휘두르던 워턴이 이를 악물며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
<인비저블 핸드>
그녀가 펼친 마법진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손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세 개의 마법진으로 복사되고, 워턴이 그 손에 채찍을 들렸다·
촤아악!
촤악!
4개의 신성 채찍이 미친 듯이 휘둘러지며 샤텔의 바위벽을 두들겼다· 쾅!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빠르게 깎여 나갔지만 샤텔은 묵묵히 다음 벽을 세워서 대처했다·
아아아악!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채찍을 휘두르는 워턴을 본 아렌디아가 재빨리 말했다·
“침착해요, 워턴 심문관! 저들이 신성연방의 본진을 점령한다고 해서 우리가 크게 손해 보는 건 없어요! 다시 점령하면 그만인···!”
“뭐?”
워턴의 눈깔이 돌아갔다·
그녀가 손에 든 채찍을 홧김에 내팽개치더니, 공격은 인비저블 핸드에게 맡기고 저벅저벅 걸어와 아렌디아의 멱살을 거칠게 붙잡았다·
“우·리·가! 여길 지키고 있었어! 이대로 신성한 연방의 성역이 네크로맨서 따위에게 넘어가면 레테 성녀님이나 다른 대표들이 우릴 가만히 둘 것 같아?”
“이,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루 종일 공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세상 물정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아렌디아는 워턴의 눈을 보았다·
분노 이면에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이건 ‘룬 리그’야!”
그 말을 들은 아렌디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교황 성하! 대주교들! 성녀님들! 우리 상관이나 선배들! 그리고 신성연방의 전 백성이 보고 있어! 신성연방은 완전무결한 승리를 원해! 첫날부터 본진이 빼앗기면 우리는 룬 리그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역적이 된다고! 앞으로 연방에서 발 뻗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인간·
지나친 공포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워턴이 아렌디아를 내팽개친 뒤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이 룬 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이야! 죽기 살기로 해야 해!”
화아아아아악!
워턴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신성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마법진을 제 가슴 위에 그려 넣은 그녀가 두 팔을 쫙 펼쳤다·
덜컹! 덜컹!
저 멀리 신성 충전 중이던 고문 기구들이 일제히 날아와 그녀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가시나 칼날이 옆으로 밀려나고, 매끈한 부분이 그녀의 몸을 뒤덮는다· 동시에 커다란 십자가가 그녀의 등 뒤로 들어선다· 하늘에서 신성의 실이 일어나 십자가에 연결되고, 그 십자가가 그녀의 몸에 연결된다· 마치 하늘이 조종하는 듯한 꼭두각시 인형 같은 광경·
꾸드드득·
온갖 고문 기구를 마치 장갑처럼 입은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워턴 오리지널 – 처형기계>
“고문은 이제 아무래도 좋아· 썰어주마!”
웨에에에엥!
팔에 장착된 톱 모양의 절단 기구가 맹렬히 돌아갔다· 거친 쇳소리를 내며 워턴이 돌진했다·
<블러드 버스트>
<맹독 다발>
바위 너머로 원거리 공격이 연달아 쏟아졌으나, 수호학 전공인 아렌디아가 즉시 워턴의 앞으로 방어 마법진을 펼쳐 막아냈다· 그 틈에 워턴은 빠르게 접근하여 손에 연결된 절단톱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어떤 공격으로도 쉽사리 뚫리지 않던 바위벽이 두부 갈라지듯 썰려 버렸다· 워턴이 와하학 웃었다·
“너희는 절대로 신성을 더럽힐 수 없어!”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와 톱을 휘두르려는데, 갑자기 한쪽 발이 덜컹거리며 움직임이 멈췄다·
클라우디아가 처형기계의 다리 사이로 슬라이딩하듯 지나가며 끈끈이 액체를 발밑에 깔아버린 것이다·
이 틈에 샤텔이 아공간에서 ‘골렘의 핵’을 꺼내 던졌다·
<서먼 어스 골렘>
주위의 흙이 일어나 골렘의 핵을 뒤덮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골렘이 형성되었다·
골렘은 탄생과 동시에 두꺼운 바위 주먹을 휘둘렀고·
꽈드드득!
바위 주먹에 제대로 얻어맞은 처형기계가 삐그덕 소리와 함께 휘청였다· 부품이나 나사 따위가 우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고작 그 정도냐!”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워턴이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골렘쯤은 일격에 베어버릴 힘이 있었다· 그녀가 반대쪽 팔을 골렘의 핵을 노리고 휘두르려 했지만·
절걱!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처형기계의 작동이 멈췄다·
이미 기계 내부는 녹을 슬게 만드는 온갖 맹독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아가 열심히 손을 놀렸다는 듯 두 손을 털고 있었다·
“마무리 부탁해, 카미·”
“네!”
화아아아악!
선혈과도 같은 피의 마법진이 전면에 피어오른다· 카미바레즈가 마법진을 활시위처럼 잡아당긴 뒤 손을 놓았다·
강력한 혈류학 사출기·
<블러드 체이서(Blood Chaser)>
뒤따라온 아렌디아가 이를 악물고 워턴의 전면에 신성 마법진을 펼쳤으나, 피의 마법은 그것을 한번에 박살 내며 나아가 처형기계의 중심부에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
“커흡!”
기계에 타고 있던 워턴의 중심이 아래로 쏠렸고·
쩌어어어어엉!
어스 골렘이 주먹을 내지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처형기계에서 벗어난 워턴이 코피를 터뜨리며 한참을 날아가 근처의 흙바닥에 쓰러졌다·
“워턴 심문관님!”
아렌디아가 다급히 외치며 달려갔다·
잠깐 여유가 생긴 사이, 카미바레즈 대신 금속 기둥에 손을 대고 점령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에이젤이 물었다·
“샤텔! 방금 그 공격으로 잡은 거야?”
샤텔이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 수호마법으로 막았다· 고작 이 정도로·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겠지· 아쉽네·”
부스스스스!
흙먼지 속에서 워턴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에게 치유 마법을 걸며 일어난 그녀가 입매를 비틀었다·
“다 죽여 버리겠어·”
아직 비장의 한 수는 남아 있다는 듯, 워턴이 겉에 입은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에이젤이 동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다들 잘 들어줘· 시몬은 본진 점령이 목표라고 했지만, 만약 한 번 더 무모하게 들어오면 워턴을 여기서 아웃시키자·”
나머지 세 사람도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적진으로 걸어가려는 워턴을 아렌디아가 다급히 달려와 붙잡았다·
“심문관님! 모르티페르는 절대 안 됩니다!”
그녀가 숨죽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놔!”
“당신이 왜 대표직에 뽑힌 건지 잊었어요? 당신의 그 기술을 여기서 보이면 신성연방의 승리 플랜이 흔들린다구요! 르바임 자매님과 테르곤 형제님이 올 때까지는···!”
“필요 없어!”
쿵! 쿵! 쿵!
샤텔이 보낸 어스 골렘이 워턴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워턴이 무릎을 굽히고 돌진 자세를 취하는 그때·
“멈추시게·”
갑자기 울려 퍼진 목소리에 두 사람의 동작이 멈췄다·
태양광이 한 차례 번뜩이며, 거구의 남자가 하늘에서 나타났다· 그가 어스 골렘의 주먹에 맞상대하듯 주먹을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어엉!
두 주먹이 부딪히고, 역으로 골렘의 팔 한쪽이 통째로 박살 나며 우수수 떨어졌다·
“테르곤 형제님!”
3번, 철벽의 광자 테르곤이 앞으로 쇄도하며 손바닥으로 골렘을 짚었다· 백마법진이 골렘의 몸체에 그려지고, 그 마법진의 중심으로 테르곤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악!
골렘이 거의 모래 알갱이로 분해되며 그 안에 있던 골렘의 핵도 산산조각 났다·
압도적인 위력에 지켜보던 네크로맨서들도 긴장했다·
처억·
“나 정도는 합류해야 재미있는 승부가 아니겠나! 네크로맨서들이여!”
테르곤이 바닥에 착지한 뒤 씩 웃었다·
그는 단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본진을 점령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내겠다! 에이젤 브링어!”
에이젤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슥슥 제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은 나한테 안 된다니까·”
유약한 최강의 눈동자는 여전히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그에게 승리란 당연한 것·
그때 에이젤이 뒷짐을 진 손에 검지를 세우더니 슬쩍 동료들 쪽으로 밀었다· 얕은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며 동료들의 귓가에 음성을 울리게 했다·
<당신이 왜 대표직에 뽑힌 건지 잊었어요? 당신의 그 기술을 여기서 보이면 신성연방의 승리 플랜이 흔들린다구요! 르바임 자매님과 테르곤 형제님이 올 때까지는···!>
“다들 들어줘·”
에이젤이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신성연방의 승리 플랜 중 하나를 지금 여기서 벗겨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