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3화
언더링의 호수숲·
<3-A> 점령지 앞·
쿠쿠쿠쿵!
콰쾅!
3지역 점령 임무를 맡은 엘리사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평지와 개활지가 펼쳐진 4지역 쪽에서 나는 굉음이었다·
“요란하네· 선두끼리는 벌써 싸우우는 거야?”
깍지 낀 두 손을 쭈욱 내뻗으며 스트레칭을 한 그녀가 헷 하고 웃었다· 앞에 보이는 3지역의 점령지 앞에는 금속 기둥이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을 보호하듯 야생 언더링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전 대륙민이 보고 있는 무대야! 멋진 모습만 보여줘야지!’
자신만만한 표정의 엘리사가 오른팔을 풍차처럼 붕붕 휘두르다가 앞으로 쭉 뻗었다·
“쏴라!”
그녀가 지시하는 즉시 대기하던 바퀴 달린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발포음이 대기를 울리고, 쏘아져 나간 스피릿 포탄이 언더링들에게 연달아 부딪혀 폭발한다·
키젠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인 엘리사의 화력에 언더링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엘리사는 방해받지 않고 당당히 금속 기둥을 향해 걸었다·
“다 죽여! 죽여 버렷!”
곳곳에 폭연과 불꽃이 가득하다·
되도록 요란하게 싸우라는 시몬의 지시가 있었으니 그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엘리사였다·
그런데·
“어라?”
폭연 속에서 언더링들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변질된 나무 뿌리와 이끼 등을 뒤섞은 것처럼 보이는 이 몬스터들, 곳곳에 몸이 상했지만 스피릿 포탄을 맞고도 여전히 움직일 수 있었다·
‘새, 생각보다 단단하잖아!’
이내 폭연 속에서 언더링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나무줄기 같은 언더링의 팔이 확 길어지며 엘리사에게 쇄도했다·
쳇 하고 혀를 찬 그녀가 기민하게 몸을 젖혀 그것을 피해냈다· 옆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그녀가 허리춤에서 고전풍 머스킷을 뽑아 들었다·
가장 가까운 언더링의 머리를 향해 조준하고, 총구에 마법진을 펼치고, 손끝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스피릿을 잔뜩 머금은 탄환이 언더링 하나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 뒤로 또다른 언더링들의 줄기가 그녀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쓰려!’
줄기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그그극!
폭격을 이겨낸 언더링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사가 빠르게 한 손으로 저주 마법진을 펼친 뒤, 직접 손끝을 움직여 발동했다·
<페트리파이(Petrify)>
드드드득!
다가오던 언더링들이 연달아 돌처럼 굳어졌다· 엘리사가 양 갈래 머리를 현란하게 흔들며 외쳤다·
“지금이야! 다시 쏴!”
투콰아아아앙!
재차 포격음이 쏟아지고 언더링들이 산산조각 났다· 그녀가 아잣!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촤르르륵!
지면에서 튀어나온 나무줄기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더니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꺄아아아악!”
엘리사가 비명을 질렀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머스킷을 꺼내 정확한 사격으로 줄기를 쏴서 끊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녀가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잇끅!’ 하는 소리를 냈다·
“씨이이!”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는 그녀의 표정에 열받음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대포들에게 반격을 명령하려고 했지만·
쿠쿵!
쿠쿠쿵!
뒤에 있던 대포들이 갑자기 나무뿌리에 휘감기거나 바닥에 쓰러져 가고 있었다·
후방에서의 공격·
폭음을 듣고 근방의 다른 언더링들까지 몰려온 것이다· 이대로는 포위당할 판이었다·
“이게 다 뭔데!”
엘리사가 손을 뒤로 보내 마법진을 준비하며 말했다·
“단순한 ‘점령’을 이렇게 어렵게 해놓으면 어쩌란 거야!”
우우우우웅!
결국 그녀가 마법진을 펼치고 유령선 한 척을 전장으로 소환했다· 갑판 위로 뛰어오른 그녀가 하얀 해군 제독 모자를 머리에 고쳐 쓰고는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첫날 시작부터 주력기를 쓰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끝장내 버려!”
유령선의 포문이 일제히 열리며 폭음을 토해냈다·
* * *
“하하하하하!”
신성연방 측도 한창 점령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성연방 3번, 철벽의 광자 테르곤이 내지르는 주먹에 언더링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주먹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대기가 떨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얼마든지 덤벼라!”
촤르르르르륵!
테르곤이 양 떼 속의 늑대처럼 적진을 유린하며 돌파하는 그때, 주위 언더링들의 나무줄기가 테르곤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까짓 것!”
테르곤이 자신의 몸을 휘감은 줄기를 붙잡고 뜯어내려 했다· 그런데·
“호오!”
의외로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단단한데다가 탄력까지 있었다· 식물이 아니라 마치 탄성이 있는 단단한 고무줄 같은 감촉· 그가 손톱으로 겉 부분을 조금 뜯어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 전신이 점점 더 많은 언더링들의 줄기에 휘감겼다· 수십 마리의 언더링이 테르곤의 숨통을 압박해 갔다·
“도와드릴까요?”
뒤에서 태연히 지켜보고 있던 4번 르바임 메델이 물었다· 테르곤은 호탕하게 웃으며 ‘사양하겠네!’ 하고 외쳤다·
“힘으로 풀 수 없다면!”
그가 무릎을 굽히더니 지면을 텅! 소리가 나게 내려앉히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테르곤을 휘감았던 20마리 가까이 되는 언더링들도 강제로 공중에 떠올랐다·
“이런 건 어떤가!”
그가 신성을 몸에 휘감고 강하게 지면에 충돌했다· 그 거대한 충격으로 언더링들의 뿌리에 힘이 풀렸고, 그 틈에 빠져나온 테르곤이 육탄전으로 언더링들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경박하면서도 경쾌한 움직임에 주위로 온통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르바임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으며 한마디 했다·
“역시 브로데릭 교수님의 제자는 다르네요· 그래도 이런 걸로 힘 빼지 마세요· 느긋하게 점령해도 괜찮으니까요·”
“나도 알고 있네!”
테르곤의 전투를 지켜보며, 르바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 점령지를 지키고 있는 언더링들은 전부 강한 개체들이야· 일부러 룬 리그 측에서 점령을 어렵게 만들었나 보네·’
그렇다고 첫날부터 힘을 뺄 수는 없는 노릇·
언제 어디서 격전이 일어날지 모르니 언더링은 최대한 피해 없이 느긋하게 잡는 게 현명하고, 점령 또한 신성을 많이 쓰지 않고 시간을 들여 점령해야 한다·
그렇게 양측 서로가 본진을 제외한 다섯 개의 점령지를 모두 안전하게 차지한 뒤에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보아하니 암흑연합의 쪽 숲에서도 연기 같은 게 올라오고 있었다· 저쪽도 저쪽대로 점령에 정신없는 모양·
“아무래도 룬 리그 첫날은 피차 무난하게 흘러갈 거 같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르바임이 흠칫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가더니 발밑으로 향했다· 그저 흙바닥에 개미 몇 마리 기어다니고 있을 뿐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못이 박힌 듯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르바임 자매!”
테르곤이 달려와 치유사제인 르바임을 노리던 언더링의 뿌리를 팔꿈치로 쳐내며 말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진동을 느꼈어요·”
“내가 일으킨 진동을 착각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지면 아래 잠들어 있는 언더링의 움직임을 느낀 거겠지·”
르바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백마법을 사용했다·
키이이이이잉!
허공에 수십 개의 백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무수한 신성의 창이 쏟아지며 몰려드는 언더링들을 찢어발겼다·
테르곤이 허 하고 웃었다·
“내겐 힘 빼지 말라 하더니·”
“테르곤 형제님· 여긴 제게 맡기시고 지금 바로 본진이 있는 7지역으로 가주세요·”
“어렵진 않네만,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 * *
신성연방 본진, <7-A>·
본진에는 두 명의 프리스트가 남아 점검을 하고 있었다·
“으음!”
찌뿌둥한 어깨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쭈욱 켠 그녀는 신성연방 대표팀의 유일한 이단심문관 훈련소 소속, 7번 워턴 슈프랭거였다·
그녀는 바닥에 쭉 나열된 고문 기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속구를 애정 있게 쓰다듬거나, 가시가 제대로 뾰족한지, 칼날이 날이 섰는지 확인하고 기름을 칠하기도 했다·
보수를 마무리한 그녀가 고문 기구에 신성을 충전시킨 뒤 걸어갔다·
“이렇게 둘이 남아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 아렌디아 자매·”
본진에 남은 또 다른 한 명은 신성연방 9번, ‘성벽 위 현자’라는 이명을 가진 아렌디아 오르발로였다·
다소 작은 키에 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귀엽고 통통한 외견, 그리고 고집불통인 표정이 얼굴에 배어 있는 그녀는 금속 벤치 같은 것으로 새하얀 기기 장치를 조립해 나가고 있었다·
아렌디아가 말이 없자, 워턴이 다시 말했다·
“뭘 하는 거야?”
“결계 장치를 조립하고 있습니다·”
작업용 테이블 위에 부품을 끼워 맞추고 신성을 흘려보내 작동이 되는 걸 확인한 아렌디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음 작업품으로 옮겨갔다·
“본진을 지킬 결계 장치부터 만들고, 그 뒤에 점령지를 지킬 결계도 만들 겁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워턴이 훗 하고 웃었다·
“아렌디아 자매는 참 특이하다니까· 기계를 조립하는 프리스트라니·”
“아무리 특이해도 워턴 심문관님만 할까요·”
“한마디도 안 지네·”
그래도 맞장구를 쳐주긴 하니 혼자 시간을 때우는 것보단 재미가 있었다· 워턴이 아렌디아의 작업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기계를 좋아한다면 내 고문 기구에는 관심 없어?”
“고전풍 기구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특히 고문 기구는요·”
“그러지 말고 그 몸으로 한번 체험해 보는 건 어때?”
그녀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여기 묶여서 비명을 지르고 아파하다 보면 어느 순간 좋아질걸?”
“····”
결계 장치 하나를 조립해 선반에 올려놓은 아렌디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둘만 있을 땐 그렇게 애쓸 필요 없습니다·”
“뭐?”
“본인이 직접 들어가서 즐기시든가요·”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워턴이 이내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짓궂기는·”
아렌디아는 이제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작업에 집중했다· 워턴도 더 방해하지 않고 고문 기구들의 신성이 완전히 충전되길 기다렸다·
6지역과 5지역의 점령지 점령이 끝나는 대로 신성연방 대표팀은 암흑연합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전투원인 워턴이 본진에서 체력과 신성을 아끼고 있는 것도, 그 공격의 선두에 워턴이 설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첫날이라 그런가, 이런 한가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네·”
워턴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아렌디아는 그 말을 무시하며 계속 작업을 해나갔다·
삑! 삑! 삑!
그런데 바닥에 꽂혀 있던 신성 안테나가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결계 장치를 조립하던 아렌디아가 눈을 부릅뜨며 작업하던 기구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 돼!”
“뭐야, 무슨 일인데?”
아렌디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뛰어와 안테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고장 난 건 아니었다· 뒤따라온 워턴이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니까?”
“칠흑 반응···!”
아렌디아가 팔을 덜덜 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여기에, 네크로맨서들이 와 있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거대한 굉음과 함께 그들이 있는 점령지 근처에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렌디아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워턴은 다급히 신성을 일으키며 등 뒤에 차고 있던 채찍을 꺼내 들었다·
고고고고고!
피어오른 흙먼지·
그리고·
“도착이다·”
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까지· 프리스트들이 바짝 긴장하며 내부를 살폈다·
물결치는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뿐한 걸음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압도적인 체격의 남자가 흙이 잔뜩 묻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을 알아본 아렌디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켰다·
‘암흑연합의 3번 에이젤 브링어! 4번 샤텔 마에르!’
그게 다가 아니었다·
흙먼지 너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파닥거리는 박쥐 날개와, 뱀처럼 움직이는 머리카락의 소녀들· 아렌디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10번 카미바레즈 우르슬라! 9번 클라우디아 멘지스까지!’
룬 리그 경기 첫날·
경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막 지날 무렵에, 무려 네 명의 암흑연합 대표들이 신성연방의 본진에 입성했다·
“너희들···!”
진땀을 줄줄 흘리며, 워턴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제정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