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0화
시몬과 레테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관중들이 수군거렸고, 관계자들은 급박해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 있나?”
“그냥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 아냐?”
벌써 10분 넘게 등장이 지연되고 있었다· 사회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양측의 1번, 군단장과 성녀의 등장 없이 룬 리그 행사를 속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조, 조금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하하! 양측 진영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등장이니 조금만 더 관대하게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근처의 직원들에게도 찾아보라며 등을 떠민 사회자가 애써 웃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러면 양측 두 사람의 프로필을 일단 제가 먼저 읽어드리는 시간을····”
쿠르르르르르르!
동굴 내부에 정체불명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리던 관중들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웅!
이내 홀 중앙에 눈부신 둥근 빛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눈을 가리거나 몸을 움츠리며 지켜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새하얀 백룡이 튀어나왔다·
레테의 주력 신수·
백룡, 란·
그것이 하늘을 수놓으며 별빛을 흩뿌렸다· 신성연방 쪽은 물론 암흑연합 쪽까지 모든 관중이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백룡은 천천히 관중석을 활보하듯 돌아다녔다· 천장에 맺힌 별을 삼키거나 꼬리로 장난을 치기도 한 그것은 이내 무대 한쪽으로 빠져나갔다·
환했던 무대가 단번에 어두워졌다·
“저건 분명 레테 성녀님의 신수야!”
“···그렇다는 건!”
화아아아악!
마침내 천장에 있던 빛의 알이 깨지고, 강렬한 별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무대 한쪽을 비추었다·
어느새 관중석의 4층·
가장 높은 곳에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의 성녀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레테 성녀님이시다!”
주위가 온통 떠들썩하게 변했다· 연방 사람들은 기도하거나 환호했다·
레테는 태연히 주위로 손을 흔들며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목 뒤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간신히 안 늦었다·’
이내 백룡이 다가와 레테를 등에 태운 채 주위를 한껏 활보하다가 무대에 내려주었다· 사회자가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다시 소개드립니다! 신성연방 1번! ‘별의 성녀’ 레테 님이십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회자가 슬쩍 동공을 굴렸다·
“그, 그리고 다음 차례는 그분께서 등장하셔야 하는데····”
레테가 사회자를 보며 옆으로 손짓했다·
“물러나요·”
“?”
레테가 손짓했고 사회자가 한 걸음을 물러나는 순간·
화아아아아악!
그 자리의 공간이 절단되듯 일그러졌다·
어둡고 강렬한 기운이 터져 나오고 이내 그 안에서 더더욱 농밀한 어둠을 뿜어내며 정체불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형의 망토로 몸을 두른 채, 에이션트 언데드의 본 아머로 무장하고 투구를 눌러쓴 한 남자·
스릉!
검을 들어 어깨에 짊어진 이 남자의 본 아머가 벌어지며 착착 열리기 시작했다· 흉갑이 벌어지고, 투구는 위로 올라가며, 이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 무대에 발을 딛고 내려왔다·
오오오오오오오오!
그야말로 짧고 강렬한 등장에 암흑연합 주민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은 가볍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안 늦었다·’
먼저 온 레테가 시몬 쪽을 째릿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픽 하고 웃으며 다시 표정을 고쳤다·
사실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시몬과 레테는 재회하는 감격을 누리기도 전에 급히 ‘결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사이 문득 인기척을 느꼈고,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이 정체불명의 인물은 놀라운 속도로 도망쳤다·
시몬이 그를 잡아야 한다고 외쳤고, 난데없이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거의 동굴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도주자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지만, 갑자기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시몬의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놓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가 막다른 곳에서 사라진 방법이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결사의 ‘포탈’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기기도 전에·
-시몬 대표!
-레테 성녀님! 계십니까!
룬 리그 관계자들이 두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딕이 먼저 뛰어 들어왔다· 딕은 레테를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시몬이 ‘결사 협동 대책’이라고 이야기하자 납득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룬 리그 행사 중이며 이제 곧 두 사람의 등장 차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둘은 일단 백룡 란을 먼저 보내 시간을 끌도록 하고, 이후 레테가 홀로 들어가 냅다 4층 좌석에 앉은 뒤, 원래부터 이런 연출이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연기한 것이다·
그 덕분에 조금 늦은 시몬도 뒤따라 등장할 수 있었다·
“두 대표, 악수해 주십시오·”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시몬과 레테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마력 촬영기의 섬광과 셔터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진다· 암흑연합의 군단장과, 신성연방의 성녀가 악수하는 광경·
이번 룬 리그가 성립될 수 있었을 만큼 엄청난 이슈였던 까마귀와 아크팔라딘의 악수만큼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처음 뵙겠슴다· 암흑연합의 군단장·”
외부에서 보기에는 초면이었기에 레테도 시몬을 초면인 것처럼 대했다·
“그쪽이 로하론에서 한 일은 잘 들었슴다· 메시아라는 짝퉁 성자를 처치해 준 건 고맙지만-”
그녀가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신의 영광과 신성연방의 명예를 위해, 룬 리그의 승부는 양보 못 합니다·”
신성연방 측에서 귀가 터질 것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몬도 지지 않고 웃었다·
“이쪽도 암흑연합의 주민들에게 새 땅을 돌려준 건 감사를 표하지· 하지만 가릴 건 가리겠어·”
시몬의 눈동자에 안광이 피어올랐다·
“승리는 우리 암흑연합의 것이다·”
더 큰 환호성이 암흑연합 주민들 측에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악수한 손을 흔들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향한 신뢰의 눈·
땀에 젖어 밀착된 손·
입가에 헐떡이는 숨결·
귓가에 윙윙거리는 관중들의 환호성까지·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나고도 악수가 끝나지 않자, 관중들이 의아한 눈으로 무슨 일이 있나 눈을 깜빡였다·
“저, 저기·”
악수를 시킨 직원이 말을 걸자, 그제야 화들짝 놀란 시몬과 레테가 손을 빼냈다·
그 모습을 본 사회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하하! 룬 리그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신경전까지! 정말로 치열하군요!”
사회자는 뭔가 착각한 듯했지만 어떻게 넘어간 것 같았다· 시몬과 레테는 눈인사한 뒤 서로의 진영으로 물러났다·
* * *
20명에 달하는 룬 리그의 대표 학생들의 등장 인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이후에는 두 세력의 원로나 주교가 나와 길고 긴 연설이 이어졌다· 대표들의 등장이 워낙 화려했기에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관중들은 끔뻑 잠에 빠지기도 했다·
등장 의식을 마친 암흑연합 대표들과 신성연방 대표들은 높은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풀기도 했고 가볍게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아까는 무슨 일 있었어요? 시몬·”
카미바레즈의 물음에 시몬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긴장했더니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그, 그랬군요!”
메이린이 흐음- 소리를 내며 뭐라 입을 열려는데, 마침 지루한 장로들이 떠난 뒤 다시 사회자가 앞으로 나왔다·
“자, 연합 연방 관중 여러분! 지금부터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룬 리그의 ‘전장’ 정보에 대해 공개하겠습니다!”
전장이라는 말에 관중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반짝였다·
“올해 룬 리그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실 룬 리그 협회장, 벤트레스 님을 모시겠습니다!”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안경을 쓴 말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인사하며 걸어 나왔다· 연합과 연방 대표들도 박수를 치며 맞이했다·
“룬 리그의 보안은 엄중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확성 수정구를 든 그의 첫마디였다·
“참관한 여러분 모두에게 통보드렸듯, 정보를 제공한 뒤로는 룬 리그가 끝나기 전까지 이 동굴을 빠져나가실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셨거나 불편하신 분은 지금 당장에라도·”
그가 담백하게 손바닥을 펼쳐 밖을 가리켰다·
당연히 관중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만대의 경쟁률을 뚫고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까·
벤트레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바로 보시죠·”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며 흥미를 이끌려고 노력하던 사회자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담백한 말투였다· 이내 마나 스크린이 작동하며 화면이 드러났다·
일주일 전에 제인과 이스라필이 전장을 선택한 장면이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이스라필이 자신의 두루마리를 불에 떨어뜨렸고, 제인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는 바로·
“이번 룬 리그의 전장은 ‘언더링의 호수숲’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암흑연합과 신성연방 어느 한쪽에서 특히 좋아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네, 룬 리그 12회, 14회, 15회를 진행한 장소입니다· 12회에 룬 리그 무대로 선정된 이후 가장 많은 경기를 한 장소입니다· 가장 최근에 작성된 곳인 만큼 완성도가 높고 진영 밸런스도 우수합니다·”
그가 손에 든 장치를 작동시키자 화면이 넘어갔다·
오오오!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호수 내부에 ‘숲’이 있었다· 풀이 자라나 있고, 나무가 빼곡하게 가득했다·
시몬도 두 손을 깍지 끼며 긴장한 숨을 한 차례 내뱉었다·
‘여기가 우리가 경기를 할 장소!’
호수 안에 넓은 분지 지형이 있었는데, 위가 온통 호수 물로 가득 차 있고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분지 내부로는 물이 흘러들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과 마나의 신비에 감탄성을 터뜨렸다·
“잠깐 설명드리자면, 언더링의 호수숲이 있는 저 자리에는 한때 오래된 던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험가들에게 던전이 공략되어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벤트레스가 팔을 펼쳤다·
“새로운 성지니, 아직 던전이 정복되지 않은 것이니 말이 많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마나홀 현상이 원인임을 규명했습니다· 분지 내부에 강력한 마나의 흐름이 형성되어 물을 밀어내는 것이죠·”
벤트레스는 조금 더 이 현상을 설명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관중들이 졸기 시작한 걸 알았는지 시선을 돌렸다·
“이에 따라 분지 내부는 독자적인 생태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이 장소의 가장 중요한 생물은 바로 이것·”
팟·
화면이 바뀌며 이끼와 나뭇가지가 뒤섞인 듯한 몸체를 가진 몬스터가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식물형 몬스터 같아 보이지만, 생체 기관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더링의 호수숲이라는 명칭을 붙게 한 ‘언더링’이란 몬스터입니다· 본래는 던전의 몬스터였으나, 던전 밖으로 빠져나온 뒤 대륙의 생태계에 완벽히 적응한 몬스터지요· 이들은 마찬가지로 던전에서 파생된 긴 나무뿌리에서 번식합니다·”
화면이 바뀌며, 호수숲의 지면 아래에는 깊고 깊은 나무뿌리들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 주위에 언더링들이 득시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더링의 큰 특징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염입니다·”
다시 화면이 바뀌며, 일반 녹색의 언더링과 새까만 언더링, 새하얀 언더링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들은 몸에 흐르는 기운에 의해 손쉽게 변화합니다· 만약 신성을 주입하면 신성 언더링이, 칠흑을 주입하면 칠흑 언더링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복종입니다·”
언더링은 던전의 몬스터로서, 새로운 던전주를 찾아 복종하려는 성질이 있다·
만약 호수숲에 인간이 들어와 신성이나 칠흑으로 언더링을 ‘오염’시킨다면, 그 언더링은 해당 힘을 사용하는 자들을 따르는 성질이 있었다·
언더링이라는 몬스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언더링의 호수숲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가 됐고, 하필이면 중립지대에 이곳이 있었다· 이곳을 빼앗기 위해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은 숱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중립지대의 중재하에 중립지대가 이곳을 관리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서로 물러났다·
그 뒤, 시간이 흘러·
“이런 특별한 지형적 속성을 높게 평가하여 룬 리그의 전장으로 뽑히게 된 겁니다·”
대표들이 눈을 빛내며 해당 내용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호수숲에 대해 예습해 왔지만 이런 배경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스읍·
코를 한 차례 들이마신 벤트레스가 다시 한번 손에 든 기기를 작동시켰다·
“관중 여러분이 기다리던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고, 덤덤히 보고 있던 관중들이 요란한 함성을 터뜨렸다·
이번에 열릴 룬 리그, 전장의 모습이 한눈에 드러나고 있었다·
“올해 룬 리그는, 점령전·”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언더링을 활용한 단체 팀전 승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