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7화
제인과 이스라필은 시작의 동굴 중앙으로 걸어왔다·
흐르는 샘물에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돌로 만들어진 성배 앞에 섰다· 성배에는 깨끗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곳에 네 가지 룬 리그 전장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중립지대의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고령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용의 회랑, 침묵의 사원, 칼바위 무덤, 언더링의 호수숲까지·”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두 분께서 양측 세력을 대표하여 하나씩 고르시지요·”
두 여인이 망설임 없이 성배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제인은 눈을 감았다·
‘칠흑과 신성의 상성 차이는 명백하지만, 네크로맨서가 프리스트를 이기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개인전보다는 팀전, 좁은 장소보다는 넓은 장소가 유리해·’
제인은 이미 과거 룬 리그의 기록들을 훑고 또 훑어본 뒤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소가 하나 있었다·
‘침묵의 사원을 고르는 게 최선이겠네·’
한편 반대쪽의 이스라필도 성배에 손을 넣고 있었다· 돌바닥에 만져지는 두루마리들을 이리저리 가볍게 쓸어보고 있었다·
‘팀워크를 책임지던 8번 페브릭의 이탈은 솔직히 뼈아팠어요·’
통신 수정구를 사용할 수 없는 룬 리그에서, 페브릭은 팀의 소통과 관련된 축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에 더해, 모두에게 친절하고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지내던 팀의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페브릭이 없다면 팀전보다는 개인전이 낫겠죠· 그리고 변수를 줄인 채 신성이라는 상성을 최대한 활용해 힘 대 힘으로 붙었으면 하니, 이번 룬 리그의 전장은 좁은 용의 회랑이 제격이에요·’
생각을 마친 두 여인이 마침내 성배 안에 놓인 두루마리를 하나씩 골라 물속에서 꺼냈다·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들뜬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르르르륵!
그 순간 물이 든 성배에 불길이 휘몰아치며 남아 있는 두루마리가 불태워졌다· 관중석 곳곳에서 ‘헉’ 하고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잔뼈가 굵은 제인과 이스라필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 그럼 두 분이 하나씩 뽑은 두루마리 중에서 어느 쪽을 고를지 상의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필이 손에 힘을 풀어 자신의 두루마리를 불 속에 버렸다· 그러고는 생긋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제인에게 내밀었다·
제인은 삐딱하게 웃은 뒤, 자신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노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확성 수정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동굴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이번 룬 리그의 전장은 ‘언더링의 호수숲’입니다!”
곳곳에서 떠들썩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스라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패배해도 변명도 못 하시겠네요?”
“그건 이쪽이 할 소립니다만·”
제인이 두루마리를 노인에게 건넨 뒤 등을 돌렸다·
“피차 전장에 대한 변명은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서 좋군요·”
* * *
이차원의 어딘가·
장소명 ‘?????’·
“····”
지극히 오래된 홀과 같은 장소에 후드를 둘러쓴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천장으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이곳에서, 남자는 태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륵· 화륵· 화륵 화륵· 화륵·
텅 빈 좌석 곳곳에 촛불이 밝혀지며 불이 들어왔다· 남자는 주위를 한번 훑어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모인 건 모두 일곱인가·”
그가 천천히 암석으로 이루어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쌓여 있던 먼지가 연기처럼 흩어지며 주위를 잠시 어둡게 만들었다·
“감지덕지겠지·”
촛불이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촛불은 거세게 활활 타올랐고, 어떤 촛불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 ‘카이 로 벤젠 우쟈트’가 다시 한번 구원자들에게 어르신의 지시 사항을 전한다·”
그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륙에서 행해지고 있는 룬 리그라는 것이 끝나기 전까지· 모든 구원자는 공세를 중지하고 대기하라·”
여러 촛불들이 조용히 불타고 있는 가운데, 가장 끝에 위치한 촛불에서 갑자기 화륵! 하고 반발하듯 불길이 움직였다·
[어째서지? 카이·]
급기야 촛불 위로, 소름 끼치는 눈동자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구원자는 줄고 있고 유령궁에서는 라우라를 잃었다· 룬 리그라는 곳에 우리의 대적자들이 득실거린다면,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에 다가가는 길이다·]
카이라고 불린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 촛불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정적이 홀을 타고 내려앉았다·
“룬 리그는 함정이다·”
마침내 카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정보가 부족하다·”
[우리에겐 포탈이 있다! 시점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지!]
마치 분노를 억누르듯, 촛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들끓고 있었다·
[룬 리그가 열리는 장소 또한 많아도 여섯 곳이니 전부 조사하면 된다! 함정이라고 해도 나라면 룬 리그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때 촛불 하나가 화르륵 타오르더니 여성의 눈처럼 옆으로 휘어진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났다·
[라우라가 죽어서 많이 화났나 보네· 히에로미르·]
[다물어라!]
히에로미르라고 불린 목소리에 점점 더 들끓는 듯한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곳에 놈들이 있다· 너희가 침묵하겠다면 나라도 가서 모든 걸 끝내겠다!]
화륵!
그 말과 함께 촛불이 꺼져 버리고 눈동자의 모습도 사라졌다·
마치 홧김에 물러간 듯한 느낌이었다·
카이는 눈을 감았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화륵· 화륵· 화륵·
촛불이 하나둘 꺼져가는 가운데 카이가 문득 말했다·
“시엘·”
꺼진 촛불이 다시 푸르게 타오르며, 아까 그 여성의 눈이 떠올랐다·
[왜?]
“네가 가서 히에로미르를 막아라·”
지시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여성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느 차원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결국은 룬 리그가 열리는 대륙에 나타날 거다·”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네·]
화륵·
촛불이 흔들리며 서서히 한쪽 눈이 감겨갔다·
[만약 막기도 전에 히에로미르가 날뛰면?]
카이는 태연히 답했다·
“죽여라·”
* *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크리스탈호는 신성연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간단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제는 레귤러 멤버로서 룬 리그 참가를 확정 지은 학생들의 열정은 200%였기에, 무슨 일이든 쭉쭉 해냈다· 특히 내내 얼굴이 상기된 쥴과 클라우디아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이 와중에 신기술도 개발해 내는 등 컨디션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예비 멤버로 굳어진 제이미, 그리고 이탈자가 된 말콤과 피츠제럴드도 열심히 다른 학생들을 보조했다·
특히 피츠제럴드는 아예 전술로써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정도 확정된 신성연방의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레귤러 멤버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공략법을 이야기했다·
“신성연방의 확실한 레귤러 멤버는 이렇게 여섯 명이다·”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레귤러 멤버들은 피츠제럴드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전공과 포지션이 정해져 있기에 어느 정도 추측 가능하지만, 의외의 인선은 이 녀석이다·”
툭·
피츠제럴드가 손끝을 움직였다·
흐릿한 사진에 에프넬 교복의 여학생이 보였다·
“아렌디아 오르발로· 9번 혹은 10번으로 추정되는데, 신성이 깃든 금속을 다뤄서 요새나 성벽, 탑 등 구조물을 세우는 데 특화된 프리스트다·”
“음, 확실히 이상하네·”
메이린이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치유학이나 축복학 전공자를 한 명 더 팀에 넣는 게 나아 보여· 아렌디아 같은 축성의 달인은 전장에 따라 활약하지 못할 리스크도 있을 텐데· 왜 데려온 거지?”
이야기를 듣던 카미바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메이린! 룬 리그의 전장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예요?”
그 물음에 메이린이 검지를 펼치며 설명했다·
“룬 리그가 임박했을 때 각 세력 대표들이 선정해· 10군데 정도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게 분명····”
“용의 회랑, 침묵의 사원, 칼바위 무덤, 언더링의 호수숲·”
피츠제럴드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전장에 따라 우리가 세울 전략도 달라진다· 신성연방은 힘 대 힘으로 싸우고 싶어 하겠지만,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분석하고 약점을 공략하는 식으로 싸우는 게 유리하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설명을 듣던 엘리사가 눈썹을 모았다·
“흥, 쟤들 방어력이 좋은 건 아는데, 우리도 힘 대 힘으로는 그렇게 밀리지 않을걸?”
시몬이 웃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물론 그렇지만 전략을 짜둬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프리스트의 공략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믿음’이야·”
믿음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시몬에게로 모였다·
시몬은 여러 가지 예시를 들어주었다·
수호학 전공자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막강한 방어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동료가 한 명이라도 다치면 여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 견고한 방어력에 크게 구멍이 나게 된다는 것·
이 예시는 하늘섬에 올라갔을 때 신성연방 측 교수에게 직접 들은 것이기에 생생했다· 모두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들었다·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러니까····”
“아!”
그때 카미바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샤텔!”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임무에 제외된 채 늘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샤텔 마에르가 갑판 위로 올라와 있었다·
모두가 우르르 샤텔에게 몰려갔다· 피츠제럴드도 희미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샤텔이 그렇게 말하며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시몬이 말했다·
“몸은 어때?”
“처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회복됐다·”
샤텔이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룬 리그가 시작하기 전까지· 준비하겠다· 이제 싸울 수 있다·”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손을 맞잡으며 웃었고, 에이젤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쥴은 손등으로 샤텔을 가볍게 툭 치고 지나갔다·
“지랄 지랄 지랄·”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선베드에 앉은 채 대낮부터 술에 취한 크레이그가 중지를 내민 채 낄낄대고 있었다·
“룬 리그는 개뿔! 어차피 키젠이랑 에프넬끼리 치고 짜는 판! 이렇게 된 거 다 망해 버리라지! 하하하!”
학생들은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합숙 초창기만 해도 크레이그의 견제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했으나, 사람이 저 정도로 무너져 버리니 그냥 한심할 뿐이었다·
그래도 메이린은 신경 쓰이는지 시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시몬, 쟤 좀 버리고 가면 안 돼?”
시몬이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암흑연합 대표로 와 있는 거니까 그럴 수는 없지·”
“자! 여러분!”
그때 메도우가 갑판 위로 올라왔다·
“몇 시간 뒤면 룬 리그가 개최될 ‘시작의 동굴’에 도착할 겁니다!”
모두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전에 간단한 준비를 하죠!”
“?”
학생들이 메도우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와아!”
모두가 암흑연합 유니폼 겸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블랙 슈트를 연상케 하는 팀 전투복은 깊고 진한 검은색에, 강렬한 금색 라인과 장식끈이 새겨져 있었으며 흉부에는 암흑연합을 상징하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겉보기엔 제복이지만 전투복인 만큼 키젠 교복보다 움직이기 편하고 활동성이 있었다· 카미바레즈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가왔다·
“시몬! 전투복이 멋있어요!”
“카미도 예뻐·”
“에헤헤·”
지금 이 순간부터는 키젠을 넘어 암흑연합 전체를 대표해서 출전한다·
처음 신체 사이즈를 쟀던 것도 바로 이 전투복을 갖춰 입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전투복 차림을 본 크레이그는 더 속이 쓰린지 객실로 내려가 버렸다·
나머지는 들뜬 얼굴로 거울을 보거나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 저기·”
클라우디아가 앞을 가리켰다·
“신성연방 대표 측 배도 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수평선 앞으로, 신성연방의 깃발이 달린 함선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