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화
메시아 코코가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지자, 엘리시움을 비롯해 하늘에 떠오른 모든 포도밭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공중에서 그대로 쾅 하고 떨어지면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포도밭에 깃든 신성이 다해서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로하론 주민들과 수도사들이 모여서 합동 백마법을 사용했다·
<수페르페로(Supérfĕro)>
신성의 성질에는 ‘부유’와 ‘상승’이 있다· 주민들이 대지에 신성을 깃들게 하여 포도밭의 추락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있었다·
“위험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옆에 떨어집니다!”
쿠쿵!
쿵!
감속은 했다지만 포도밭이 지상에 떨어지는 충격으로 밭이 뭉개지고 흙이 터져 나오며 그 위의 포도나무들이 뿌리째 쓰러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내 밭!”
“아, 돌아왔구나!”
그저 순수하게 감사하며 돌아온 자신의 땅에 입을 맞추거나 기도하곤 했다·
“····”
저물어가는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상공에서 떨어지는 포도밭을 바라보며, 엘렌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잡아 넘겼다·
“엘렌!”
그녀가 신세를 지던 수도원장이 와하하! 웃으며 달려왔다·
“우리 밭이 무사히 내려왔어! 다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먹일 수 있게 됐구나!”
“아, 다행이네요·”
“오늘 밤에는 사람들을 불러 다 같이 여신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겠다!”
“저는 빼주세요·”
“으, 응?”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떨어지는 가장 큰 땅·
바다로 조금씩 추락하고 있는 엘리시움이 보였다·
“이번만큼은 여신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추락하는 엘리시움 위에는 바로 그 사람들이 아직 있었다·
시몬과 카미바레즈는 나란히 걸터앉아 해안선 위로 저무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낭만 있네·”
조금 뒤에 서 있던 에이젤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샤텔 마에르가 두 손을 짚은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 조금만 더 힘내줘, 샤텔·”
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에는 메시아의 몸뚱이를 확보한 뒤 즐거워 보이는 알라제가 샤텔의 몸에 생체관을 연결한 채 칠흑을 주입하고 있었다·
“우리가 해냈어요, 시몬!”
카미바레즈가 두 팔을 모으며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이제 룬 리그만 남았네요!”
“그러게·”
시몬이 등을 뒤로 조금 더 기울이며 수평선 너머 암흑연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어떻게 됐을까·’
* * *
암흑연합·
펜타모니엄 인근 망자의 영역 늪지대·
“크윽!”
은빛의 검과 방패를 든 소년이 질척이는 늪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기침에서는 피가 섞여 나왔고, 심지어 그 색은 녹색이었다·
신성연방 대표 8번, 페브릭 자베르·
‘함정이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임무는 처음부터 우리를 없애려는 암흑연합의 함정이었어!’
스스스스스스-
늪지대에 살덩이가 끌리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독연이 가득한 어두운 늪지대에, 그 크기를 다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뱀의 몸통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뱀의 몸통은 좌우사방 어딜 봐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크기로 늪지대 바닥에 끌리기도 했고, 나무에 걸려 있을 때는 작아졌다가, 바위 위를 지날 때는 다시 커졌다· 늪 안으로 푹 들어갔다가 한참을 먼 곳에서 다시 나오기도 했다·
스스스스-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끔찍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생물의 눈처럼 생긴 비늘 하나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페브릭은 지독한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아아-]
음침하고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소름 끼치는 혓바닥 소리가 들린다·
[신성연방의 아이를 맛보는 건 처음이구나·]
‘큭!’
페브릭은 방패를 앞세우며 주위를 경계했다· 소름이 끼치다 못해 온몸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레테가 이끄는 신성연방의 대표 10명은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임무를 수행했다· 펜타모니엄을 둘러싸고 있는 망자의 영역과 늪지대를 정신없이 정화해 나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들은 ‘늪의 왕’을 깨우고 말았다·
천 년 이상이나 이곳에 군림하며 늪을 확장해 나가던 영역의 주인·
에이션트 언데드, ‘몰굴라’를·
[죽음의 마녀도 알 만하구나·]
끈적거리는 뱀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나를 그렇게 없애고 싶어 하더니 이번엔 프리스트들을 보냈나· 확실히 참신한 방법이었다·]
몰굴라는 천 년 이상 인간을 적대하고 잡아먹으면서 여전히 토벌되지 않은 에이션트 언데드였다·
몸 전체가 진득한 독기에 가깝기에 맹독과 혈류, 저주가 통하지 않았으며, 몸이 기체나 액체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어서 물리력으로 없애기도 어렵다· 사실상 네크로맨서는 잡기 힘든 존재였다·
거기에 늪에 사는 모든 망자들이 그의 지시를 따랐고, 늪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가 가진 힘의 근간이 되었다·
무엇보다 지능과 경계심이 뛰어나서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늪으로 도망쳤다· 한 달을 꼬박 걸어도 돌아보지 못하는 방대한 망자의 늪을 전부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긴 몸길이만큼 무려 아홉 개의 코어를 체내에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군단화’가 완전히 불가능한 에이션트 언데드로 꼽혔다· 인간에게 어떤 도움이나 쓰임새도 없이 그저 황금 같은 영토를 장악해 오염시키고, 인명 피해만 가하는 ‘악’이었기에 많은 토벌 시도가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늘 늪 바닥 깊은 곳에 숨어서 목격하기 힘든 몰굴라였지만, 이번만큼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프리스트들이 펜타모니엄 인근 망자의 영역 전체를 정화하기 시작했으니까·
‘처음부터 정화 임무 같은 건 핑계였어!’
페브릭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우리를 저 괴물과 만나게 해서 전멸하게 만들려는 게 본래 암흑연합의 의도였겠지!’
<홀리 인챈트>
소년이 검에 신성을 실어 휘둘렀다·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는 뱀의 몸통에 부딪혔지만, 몸은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며 형체 일부가 사라지더니 신성의 참격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내 다시 그 연기가 모여들며 몸체를 이루었다·
‘통신마법으로 레테 성녀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아이야·]
갑자기 허벅지 아래에 찐득거리는 뭔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식겁한 그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검을 휘둘렀지만 뱀의 혀는 약 올리듯 늪 속으로 사라졌다·
[몸에 흐르는 신성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뽑아낸 뒤 뼈째로 맛있게 씹어 먹어주마·]
“크윽!”
완전히 패닉에 빠진 페브릭이 겁에 질려 주위를 경계하는 그때·
스스스!
등 뒤에서 뱀의 몸통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감지한 페브릭이 검에 신성을 힘껏 불어넣었고·
<홀리 블레이드>
촤아아아아아악!
강박적으로 등 뒤를 돌아보며 신성의 참격을 날렸다·
이 공격은 적중했다· 뱀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진 모습을 본 그가 속으로 환호하는 순간·
첨벙!
늪 바닥 아래에서 거대한 뱀의 머리가 일어나 독 연기를 뿜어냈다· 그가 ‘큭!’ 소리를 내며 다급히 숨을 참았지만 이미 한 움큼 들이마신 뒤였다· 몸에 곧바로 독에 의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꽈드득!
다시 사각에서 뱀의 꼬리가 나타나 그의 등을 채찍처럼 가격했다· 그가 늪 바닥을 뒹굴며 굴러다니다가 나무에 부딪히며 멈췄다·
‘독이···!’
이미 다른 독이나 저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이 공격은 결정타였다· 몸이 돌처럼 굳어갔다·
이제 신성이 다 떨어져 늪에 떠 있을 수도 있었다· 그의 몸이 늪 안으로 푹푹 빨려들어 갔다·
‘성녀님께··· 암흑연합의 계략이니 도망치라고 말씀드려야···!’
숨이 막히고 몸의 감각이 무뎌져 간다·
이것이 죽음이었다· 절망으로 그의 시야가 어두워지는 순간·
촤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오며 소년의 몸을 감쌌다· 소년이 퍼뜩 눈에 힘을 주며 다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괜찮으심까·”
시니컬한 말투지만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레, 레테 성녀님···!”
“자·”
하얀 머리카락의 성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끝을 움직였다· 소형화된 별똥별 같은 게 휙휙 날아와 소년의 몸에 흡수되었다·
공격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 그가 이내 입을 벌렸다·
‘회복?’
온갖 회복에 축복에 맹독 정화는 물론 정신 각성 백마법까지·
눈이 번쩍 뜨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성녀님! 이 모든 게 암흑연합의 함정이었습니다! 저건 전설적인 에이션트 언데드입니다! 놈들은 처음부터 우리가 이 임무를 완수하게 할 생각이 없었어요! 도망치셔야 합니다!”
“뭐라는 검까·”
레테가 픽 웃음을 흘리며 가느다란 검지를 뻗어 허공을 가리켰다·
“딱 좋은 상대구만· 당신은 끼어 들지 마요·”
“네?”
촤아아아아아아아!
전면에서 늪의 파도가 솟구쳐 오르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뱀의 머리가 튀어나와 레테에게 부딪혔다· 그 상태로 뱀은 레테를 이끌고 계속 앞으로 뻗어 나갔다·
쿠쿵!
쿠쿠쿠쿠쿠쿵!
하얀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휘날렸다· 레테는 방금 뻗은 손끝으로 뱀의 머리를 누른 채 밀려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 펼친 신성 방어마법에 닿은 나무들이 모조리 박살 났다·
밀려나고 있으면서도 레테는 태연히 웃었다·
“아- 당신이 이 늪의 왕임까· 언제 기어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슴다·”
너무 맑게 웃어서 지금 상황과 부조화가 일어날 정도였다· 몰굴라가 이를 악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내 자식과 부하들을 수몰시킨 증오스러운 성녀로군!]
“처음 보는 척하지 마십쇼, 에이션트 언데드· 늪 바닥에서 눈치 슬슬 보던 거 모를 줄 아심까?”
레테가 반대쪽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쫄아서 잔뜩 웅크려 있다가 급하니 이제 와서 튀어나온 뱀 대가리가 무슨·”
[때를 기다린 것이다·]
뱀의 눈매가 길어졌다·
[힘을 많이 소진했을 텐데?]
“아· 시험해 보시겠슴까?”
그녀가 뻗은 손으로 하늘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뒤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이에 응답하듯 하늘에 별빛이 연달아 반짝이고, 무수한 혜성들이 내려왔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빛의 혜성들이 빗줄기처럼 늪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건재함을 증명하듯 가히 가공할만한 화력이었지만 이를 상대하는 몰굴라도 만만치 않았다· 길쭉한 몸을 기상천외하게 휘며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했었다·
레테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손끝을 세웠다· 늪 바닥에 떨어지던 별 하나가 그녀의 손짓에 멈추더니, 급격히 방향을 틀어서 다가왔다·
그것이 몰굴라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퍼어어어억!
몰굴라의 몸이 액체 반, 연기 반으로 흩어지며 박살 났지만 금방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화된 부위의 칠흑과 독기가 빠져서 그런지 그 부분의 몸 굵기만 반절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떤 공격도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시끄럽네요·”
웅웅!
레테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 한번 묻혀보지 않은 것 같은 희고 가느다란 손에 힘줄이 꽈득! 하고 생기더니 주먹을 중심으로 거대한 신성이 별빛 모양으로 일어났다·
“이 꽉 무십쇼·”
그녀가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별 모양 폭발이 퍼져 나가며 어두운 밤을 일순 대낮으로 만들었다· 자욱한 신성 폭발 속에서 흐음- 소리를 내며 손목을 턴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쫄기는·”
[···!]
어느새 소스라치게 놀라 레테를 밀어붙이는 걸 멈추고 저 멀리 물러난 뱀의 머리가 보인다· 상당히 놀랐는지 관절이 다소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인 모양임다·”
씩 웃는 그녀가 가슴에 브로치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내가 힘을 조금 소진한 건 사실이지만-”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신성 아공간인 브로치 안에서 신수 중의 신수, 새하얗고 커다란 백룡 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란은 레테를 태우고는 하늘 높이 올라가 몰굴라를 내려다보았다·
몰굴라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누가 이길지-”
그녀가 손짓하자 별빛이 내려와 란을 축복했다· 란의 덩치가 점점 더 커지며 빛도 더 강해졌다· 란이 이제는 몸집으로도 몰굴라를 압도하며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뤄보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늪의 왕이다!]
성녀의 신수와 에이션트 언데드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입을 벌리며 돌진했고·
쿠콰아아아아아아앙!
전면에서 부딪히는 것으로 파생된 거대한 충격파가 늪 전체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