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화
헨릭 왕자는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하운드 키즈가 되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볼드윈 왕가에 전해 내려오는 비기를 습득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자부심이 가득하던 기술이 눈앞에서 파훼당하고 있었다·
체스말을 연상케 하는 희고 검은 커다란 동상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 사이에 망토를 두른 인간형 언데드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동상들이 발사한 화살이나 창들은 모두 애꿎은 바닥이나 벽면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 브루트라는 자의 움직임은 마치 모든 공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기민했다·
마치 이전에 상대해 본 기술이라는 것처럼·
[그리 크게 바뀌진 않았나·]
두 눈에서 안광을 뿌리며 그렇게 말한 브루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헨릭 왕자는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으나, 바로 그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내가 눈빛만으로 주눅 들다니!’
술사의 정신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 소환 기술이기에, 다른 동상들도 무기를 든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브루트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헛짓거리 때문에 내 형제들이 죽고 있다·]
“!”
헨릭 왕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고고고고고고고!
드디어 메시아가 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극도로 복잡한 마법진들이 연달아 펼쳐지고 있었고, 계속해서 빛의 섬광이 쏟아져 브루트들을 삭제하고 있었다· 브루트가 분열, 증식하는 속도보다 파괴되는 속도가 더 빠를 지경이었다·
[물러가라· 너희들은 실패했다·]
‘····’
헨릭 왕자도 처음에는 이 임무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 때문에 납치당한 제나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메시아에 대한 분한 마음도 있었다·
결국 첫 교전에서 패배한 이유는 병력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했고, 메시아의 호위 병력이 줄어든 때를 노려 기습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저 메시아라 불리는 고블린은 처음부터 네크로맨서가 이길 수 없는 존재에 가까웠다· 기습이니, 병력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눈앞에 있는 저 브루트란 강자도 메시아를 상대하는 것보다 자신을 압박해 물러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데바 여신의 아들· 고블린의 몸에 갇힌 ‘성자’다·
그 말이 정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가 꺾였다·
헨릭 왕자는 품에서 통신 수정구를 꺼냈다·
“아이비, 크레이그· 이만하면 됐네· 물러나지·”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의 대답이 돌아왔다·
헨릭 왕자는 사용해 둔 능력을 해제하고, 브루트의 눈치를 한 차례 본 뒤 몸을 던져 사라졌다· 브루트는 뒤쫓지 않았다·
[····]
헨릭을 돌려보낸 브루트가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는데, 한 브루트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무도가 브루트! 거기 브루트 안다! 대군주 브루트다!]
무도가 브루트가 두 손을 입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난리 났다! 브루트들 다 죽는다! 일단 도망쳐야···!]
촤아아아아악!
그때 대군주 브루트가 무릎을 굽히고 돌진하더니, 무도가 브루트의 몸으로 빨려들어 갔다· 무도가 브루트가 응? 하는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제 몸을 툭툭 만져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군주 브루트가 흡수됐다! 내가 본체가 되길 응원하는 것이냐!]
무도가 브루트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럼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
촤아아아아아악!
메시아가 발사한 섬광 중 하나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메시아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결계를 뚫고 기습을 걸어온 세 명의 네크로맨서들을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떼로 등장한 브루트까지 모조리 찢어발겼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로하론의 대수도원장은 절망했다·
‘전보다 더 강해졌구나·’
그의 목구멍에 마른침이 꿀렁하고 넘어갔다·
스스로를 데바의 아들이자, 성자라고 주장하는 돌연변이 고블린· 그가 보이는 저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그런 주장의 근거였다·
‘정말로 인간이 저걸 이길 수는 있는가? 비록 외국인이라고는 하나, 내가 시몬 학생회장과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을 괜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아닌가·’
대수도원장이 갈등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온 메시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인퀴시티오의 투표 시간이 모두 끝났다·]
“!”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인퀴시티오는 종료한다· 개표하라· 대수도원장·]
퍼뜩 정신을 차린 대수도원장이 외쳤다·
“중간에 전투가 벌어지며 인퀴시티오가 지연됐소! 더 많은 신도들의 뜻을 모아야만이···!”
[율법에 의하면 인퀴시티오의 효력이 발휘되는 최소한의 표는 1,000표다· 그리고 저 모금함에 들어간 표는 1,180표다·]
메시아의 눈이 번뜩였다·
[다시 말하마· 개표하라, 대수도원장·]
대수도원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로 다 끝인가·’
그가 터덜터덜 걸어가 표가 들어간 함 앞에 섰다·
* * *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시몬은 전속력으로 로하론 마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다 뭔데?’
힘든 전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사이, 예상하기 힘든 사태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로하론 마을에 메시아가 들어와 ‘인퀴시티오’라는 의식을 거행한 것·
대수도원장은 메시아가 신성연방의 지휘부인 하늘섬의 눈치를 크게 보고 있으니, 로하론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브루트를 마을에 주둔시켜 두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행방이 묘연하던 하운드 키즈들이 마을에 들어온 메시아를 급습했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일반인들을 신경 쓰지 않는 공격을 퍼부었고, 메시아가 이를 격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최악이야·’
이제 메시아는 네크로맨서들을 막아낸 신성 몬스터라는 인식이 세워졌다· 다행히 브루트들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다소 분위기를 완화해 줬지만, 주민들이 어떻게 느끼고 표를 던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게 시몬은 힘겹게 마을 앞까지 도착해 신성 결계를 통과하여 로하론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을 증명하듯 마을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이내 마을의 광장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투표함과 함께 대수도원장과 엘렌이 서 있었다· 주민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시몬이 급히 외쳤다·
“인퀴시티오는? 투표는 어떻게 됐어요?”
“이미 다 끝났소· 메시아도 결과를 확인하고 물러갔지·”
대수도원장의 말에 시몬은 심장이 철렁했다· 이번엔 엘렌이 입을 열었다·
“1,092표 대 88표·”
그 말을 들은 시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운드 키즈를 포함해 안 좋은 사태들이 겹쳤으니 어쩔 수 없는····
“1,092명의 사람들이 메시아의 제안을 반대했어요, 시몬·”
“응?”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멍해진 시몬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엘렌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기가 서렸다·
“1,092명이 메시아가 아니라 시몬과 네크로맨서분들의 편을 들어준 거예요! 시몬이 해냈어요! 사람들이 여러분의 진심을 알아봐 준 거예요!”
“아···!”
그제야 커다란 안도감을 느낀 시몬이 휘청거리며 근처의 건물에 툭 등을 기댔다·
메시아는 틀림없이 신성으로 협박했을 것이다· 외세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느니, 네크로맨서들의 편을 들어주는 쪽은 이단이고 여신을 배반하는 것이라느니· 이는 너무나 강력한 명분이었고 흑백논리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게 로하론의 주민들이 고블린 편을 들어서 그들의 군락에 배치됐다면, 헥토르나 다른 동기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이 지방을 떠났을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런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 땅에 사는 주민들도 바보가 아니란 뜻이오·”
대수도원장이 말했다·
“고블린 메시아가 신성한 율법을 자기 입맛대로 휘두르고 있음을 우리라고 왜 모르겠소· 빛이라고 늘 빛이 아니고, 어둠이라고 늘 어둠이 아닌 것은-”
그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소·”
“···다행입니다·”
시몬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똑바로 섰다·
“메시아는요? 결과를 보고 순순히 물러났어요?”
“그렇지 않아도 격분해서 이 마을을 날려 버리려 했지만, 아마도 그대가 오는 걸 감지하고 물러난 것 같소· 여기서 사람들을 건드리면 더더욱 상황이 악화될 테고·”
시몬이 주위를 훑었다· 마을 곳곳의 창문에서 사람들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맞다· 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사상이나 국적을 넘어, 누가 자신들을 도우려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메시아의 보복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은 표를 던졌다·
그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오늘 오후부터 키젠은 다시 공세에 들어갈 겁니다·”
시몬이 옷깃을 고치며 말했다·
“여러분이 우릴 믿어준 만큼, 우리도 반드시 여러분에게 로하론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대수도원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엘렌은 발개진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다가 흠칫하며 별이 떨어지진 않는지 하늘을 살폈다·
* * *
메시아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가장 높은 품질의 포도밭이 있는 이곳은 고블린들 사이에서 성역으로 불렸다· 결계석으로 보호받는 다른 포도밭과는 달리 메시아의 힘으로 유지되는 절대적인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신성 고블린들 사이에서도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캬륵! 그롸툴라 미 키빌리스!!
-그롸툴라 키빌리스!
메시아가 하늘에 뜬 채로 나타나자 모든 하얀 옷을 입은 고블린들이 경배했다· 전원 신성 고블린 중에서도 백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들이었다·
가장 앞열에 있는 고블린들은 주름 하나 없이 젊은 고블린들이었고, 뒤로 갈수록 나이 든 고블린들이었다·
로하론 포도밭의 신성 고블린 중에서 강한 고블린은 어리고 젊은 고블린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의 아이들·
수명이 짧고 신성의 힘으로 극도로 더 빨리 성장하는 고블린들에게 몇 개월의 세월은 세대나 다름없었다·
메시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고, 또한 시간이 갈수록 메시아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고블린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지능도 뛰어났으며, 말도 사람처럼 하고, 신성력에 대한 적합력도 높았다·
완벽히 새로운 세대· 흙바닥에 굴러다니며 신성 포도를 억지로 삼키려고 하는 일반 고블린들과는 그 격이 다른 고귀한 존재들이었다·
처억·
메시아가 궁전으로 개조된 수도원 중앙의 십자가 위에 올라서 말했다·
[들어라· 나의 백성들아·]
메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고블린이 감격하듯 부복했다·
-나의 아버지! 캬륵!
-여신의 아들이시여!
-유일한 성자시여!
메시아가 두 팔을 벌렸다·
[인간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그들은 여신의 뜻을 어기고 어둠의 인간들에게 우리의 처단을 사주했다· 그들의 공격에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고블린들이 분노했다·
-배신자에게 죽음을! 캬륵!
-죽음을!
메시아가 손을 들자, 고블린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제히 싹 사라졌다·
[심판의 날 계획을 앞당기겠다· 로하론은 하늘로 떠오를 것이며, 우리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늘섬과 협상할 수 있는 동등한 자격을 얻을 것이다·]
-라우스!
모든 사제 고블린이 신성을 일으켜 ‘개등’을 시전해 보였다·
성역 내부에 무수한 신성의 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