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7화
끝없이 펼쳐지는 대형 신성 마법진을 보며 헨릭 왕자는 경악했다·
저건 고블린 같은 게 아니다·
“크윽!”
고작 놈과 10분여 남짓 싸웠을 뿐인데 직감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죽어 죽어 죽어!”
아이비가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기관총 아티팩트 ‘엘라하’로 마나 탄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저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신성 고블린의 손짓 한 번에, 잘 날아가던 탄환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우웅!
이번에는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대형 신성 마법진이 연달아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새하얀 광선이 빼곡하게 쏟아졌다·
광선은 대지를 부수며 움직였고, 하운드 키즈는 다급히 몸을 날려 피해내야 했다·
“크윽!”
헨릭이 황급히 손바닥을 펼쳤다· 곳곳에서 아공간이 열리며 방패를 든 동상들이 뛰쳐나와 앞을 막았지만, 저 신성 섬광이 좌우로 몇 번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박살 나고 말았다·
터져 나오는 후폭풍에 지면을 구르며 헨릭이 앞을 바라보았다·
배가 툭 튀어나오고 머리가 비대하게 큰 태아와도 같은 순백의 고블린이 세상을 발아래에 둔 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으로 저 고블린이 신의 아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헨릭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크레이그! 언제까지 놈이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놔둘 거냐!”
“아까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요!”
저주술사인 크레이그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저주를 연달아 사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부하 신성 고블린들이 펼친 정화마법에 막혔고, 몇몇 저주는 직접 순백의 고블린에 닿았지만 처음부터 저주라는 게 통하지 않는 존재처럼 흘러내려 사라졌다·
[내 이름은 메시아·]
고블린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며 그들을 굽어보았다·
대륙어도 전과 달리 더 부드럽고 온화해졌다·
[너희에게 묻겠다· 나의 백성들이 신앙의 증명을 거듭하여 했거늘, 어찌하여 내 백성들을 베고 영토를 침범하였는가·]
“저 미친 고블린 새끼가!”
푸확!
무리하게 상대를 저주하느라 피를 한 차례 더 토한 크레이그가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그딴 증명 따위 우리 알 바냐! 신성연방의 광신도 새끼들! 이 동네는 몬스터들까지 미쳤군!”
메시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땅을 업신여기는 발언, 이해했다· 너희들은 반대편 땅에서 온 자들이구나· 이곳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신성 마법진이 연달아 나타났다·
[율법에 자유로운 자는 처음 본다· 이 또한 나와 백성들에게 위협이구나· 어머니의 세상은 얼마나 많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가 손끝을 강하게 내리긋자 마법진에서 백색 기둥이 다시 한번 쏟아지며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꺄아아아악!”
아이비가 폭발에 휘말려 쓰러졌다· 헨릭은 동상을 보내 아이비를 챙기도록 하는 동시에 제나르를 바라보았다·
“제나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고블린을 죽여라! 네 힘을 보여줘라!”
끄덕·
네 번째 하운드 키즈 제나르가 제 몸에 새겨진 영속 흑마법을 발동시키고는 두 팔을 강하게 떨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뿌드드드득!
뿌득!
그의 등이 솥 안의 기름처럼 들끓더니, 이내 새까만 뼈대로 이루어진 날개가 무수한 갈래로 쏟아져 나왔다·
공중에 떠 있는 메시아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제나르의 날개는 점점 더 확장되었고, 메시아 또한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빛의 띠를 공중으로 띄웠다· 마치 천사와 악마와 날개를 펼치고 대치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몇몇 고블린들은 바닥에 엎드려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펄럭!
제나르가 뼈의 날개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메시아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신성 마법진에서 하얀 섬광이 쏟아져 그의 몸을 연달아 두들겼지만, 제나르는 그 모든 걸 정면으로 받아내며 악을 지르며 돌진했다·
제나르의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가 오른팔을 옆으로 뻗자, 손바닥에도 뼈대가 일어나더니 칠흑이 그 뼈를 덮으며 검의 형태로 변했다·
기어이 메시아의 코앞까지 온 그가 메시아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쩌엉!
검은 메시아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역으로 두 동강 났다·
지켜보던 헨릭과 크레이그의 입이 벌어졌다·
[나는 데바의 아들·]
그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내 피부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건 거룩한 어머니뿐이다·]
하늘에서 쏘아진 빛의 기둥이 연달아 제나르의 몸을 관통했다· 그렇게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제나르의 목을 메시아가 덥석 붙잡았다·
“망할! 제나르!”
크레이그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헨릭 왕자도 절망하며 몸을 떨고 있는 그때, 이들을 가볍게 굽어보던 메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내리겠다· 이자의 목숨이 아깝다면, 다시는 신의 영토에 침범하지 말지어다·]
제나르를 인질로 잡은 메시아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우우웅!
우웅!
고블린 사제들이 지팡이를 치켜들며 빛을 일으켰다· 언덕 위가 무수한 빛으로 가득 차며, 메시아는 기절한 제나르를 데리고 물러섰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메시아가 떠나고 있다·
털썩·
다리에 힘이 빠진 헨릭이 한쪽 무릎을 꿇고 긴 숨을 토해냈다·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온몸에서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식은땀이 계속 흘러서 등 뒤를 흥건히 적신다·
“왕··· 자님!”
정신을 차린 건지, 아이비가 제 어깨를 붙잡은 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제나르를··· 구하러 가야 해요! 하아! 하아!”
헨릭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충격에 빠져 혼잣말을 중얼중얼 쏟아내고 있었다·
“신성연방에서는 저런 걸 우리에게 퇴치하라고 한 것인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지시했군·”
그는 정신을 반쯤 놓은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함정이었구나· 함정에 빠졌어· 그래! 룬 리그는 빌미였을 뿐, 신성연방은 처음부터 우리를 없앨 작정으로 이런 짓을 꾸민 거였어! 저런 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눈이 번뜩이더니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았다·
로하론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주민들도 저 고블린 놈들과 협력해 우릴 죽이려 한 거겠지· 이 지역의 모두가 한통속인가·”
“잠깐만요 왕자님! 제나르를 구해낼 생각을 하셔야지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을···!”
“저런 것을 상대하게 하다니!”
헨릭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대가를 치르게 하겠네·”
마을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는 왕자와, 그를 바라보는 아이비의 눈매가 좁혀지고 있었다·
* * *
한편 마을에서 상황을 알게 된 시몬과 엘렌은 의기투합해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엘렌은 제일 먼저 이 로하론 지방에서 사실상 가장 높은 인물인 ‘대수도원장’에게 직접 찾아갔다·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엘렌이 탕! 하고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지금 해안가에 암흑연합의 룬 리그 대표들이 와 있어요! 그들이라면 연방의 규율에 구애받지 않고 신수들을 몰아낼 수 있잖아요!”
“····”
로하론의 포도밭의 총관리자, 대수도원장은 굳은 얼굴로 반질반질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엘렌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그들은 하늘섬의 임무로 와 있는 거니까 상부의 허가도 떨어진 거나 다름없어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데요? 네?”
“···엘렌, 우리는 신앙에 몸담고 있는 자들이네· 어찌 그들에게 고개 숙여 부탁할 수 있겠나?”
대수도원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답답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네· 그래도 정말로 암흑연합의 대표들이 하늘섬의 임무로 이곳에 왔다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나·”
“아니, 말씀드렸잖아요! 하늘섬도 그 망할 체면 때문에 ‘로하론 지방의 토착 몬스터 제거’ 정도로 뭉뚱그려서 임무를 설정했대요! 반드시 고블린 놈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고블린 놈들이 아니라 신수라네·”
“네! 네! 그 우두머리 신수를 제거해야 끝나는 거잖아요! 이대로라면 암흑연합도 그냥 신수 몇 마리 제거하다가 돌아갈지 모른다구요! 우리가 가서 빌어야 해요!”
“엘렌!”
대수도원장이 호통을 쳤다·
“잠깐 에프넬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리 건방을 떠는 게냐! 이번 일들은 우리 수도원장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이럴 시간에 돌아가서 동생들이나 돌보거라!”
“알아서 안 하시니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거 아니에요!”
대수도원장이 아픈 곳을 건드리자 엘렌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블린들이 포도밭에서 이만큼 번식하기 전까지 몇 번이나 기회는 있었어요! 저들도 신수라면서 눈감아주고! 외곽의 밭들이 쑥대밭이 되어도 차일피일 공격을 미루다가, 가장 비싼 밭이 저들 손에 넘어가니까 마지못해 군대를 요청하시고!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구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엘렌! 너는 내게 신앙을 저버리라는 말을 간단히···!”
쿵!
“실례합니다·”
갑자기 방문을 걷어차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그는 저벅저벅 방으로 걸어왔다· 엘렌은 ‘킁’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고, 갑작스레 등장한 낯선 사내에 대수원장은 흠칫하며 헛기침을 했다·
“누구시오?”
“방금 엘렌이 설명한 키젠의 학생회장·”
시몬이 후드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시몬 폴렌티아라고 합니다·”
“!!”
대수도원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너무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다가 의자에 부딪혀 우당탕 넘어진 그가 손바닥을 펼치며 신성을 일으키려 했다·
“어, 어떻게 마을의 신성 결계를 뚫고···!”
“싸우러 온 게 아니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몬은 눈을 감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의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정말로 경계심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든 대수도원장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럴 시간조차 아깝습니다· 저와 함께 가서 암흑연합의 대표들에게 정식으로 임무를 의뢰하시지요·”
“그대도 내가 그대들 네크로맨서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종용하는 것이오?”
대수도원장이 제 가슴에 텁! 하고 손을 올렸다·
“나는 여신을 섬기는 한 사람의 신도요! 결코 신앙을 저버릴 수는····”
“여신의 신도께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로하론의 책임자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시몬은 목소리는 고저 없이 부드러웠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뼈가 저리는 듯한 차가움이 있었다·
“직위의 무게를 이해하십시오· 지금 대수도원장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면, 로하론에 사는 신도와 주민들이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게 될 겁니다·”
“····”
“저는 여러분을 도울 생각이 있지만, 다른 대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로하론 지방을 구하십시오·”
크윽!
대수도원장의 뒷목에 땀방울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가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래, 나도 물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고 있소! 그것들이··· 곧 로하론을 정복할 테고 이대로는···! 알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때 엘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해해요! 평생 신실한 신앙인으로 사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신앙도 수치심도 없는 몸이니까 제가 신성연방과 암흑연합의 교두보가 될게요!”
* * *
쏴아아아!
한 시간 뒤, 하운드 키즈를 제외한 키젠 학생들이 크리스탈호 근처의 캠프에 집결했다·
“괜찮아요? 반장·”
카미바레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이미의 팔에 붕대를 둘러주고 있었다· 제이미가 애써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고마워 카미·”
“아파! 아파! 이게 다 뭔데?”
엘리사가 우는소리를 냈다·
키젠 학생들 모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특히 위험했던 건 엘리사 팀이었다· 신성 고블린들에게 포위를 당했지만, 엘리사, 제이미, 쥴은 기어이 포위를 뚫고 빠져나왔다·
흩어져 있던 다른 학생들도 신성 몬스터를 사냥하다가 다들 그 ‘백마법을 사용하는 고블린’들을 만나고 놀라서 돌아온 상태였다·
“룬 리그 전에 딱 좋은 상대였다·”
헥토르는 만족스러운 듯 팔을 빙빙 돌리며 이를 드러냈다·
“백마법을 쓰는 몬스터라· 이만한 몸풀기 상대도 없지·”
“이 미친 놈아!”
쓰러진 쥴의 몸에 포션을 붓던 엘리사가 꽥 소리 질렀다·
“너는 군단장이니 괜찮을지 몰라도 우린 다 죽을 뻔했어!”
“확실히 뭔가 이상해· 백마법을 쓰는 고블린이라니····”
메이린이 턱을 짚고 중얼거렸다·
“꺼림칙해· 인적이 드문 것도 그렇고, 포도밭이 방치된 것도 그렇고· 그 고블린들이 다가 아니라 뭔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다른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하늘섬에서 우리 룬 리그 대표들에게 맡긴 임무는 ‘로하론 지방의 토착 몬스터 제거’야· 이 정도면 개체수는 줄였을 테니 여기서 떠나 다른 임무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메도우 경께는 내가 말할게·”
헥토르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헥토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겁먹었나· 메이린 빌렌느·”
“룬 리그를 앞두고 무리하다 다치는 것보다 물러나는 게 나아·”
메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이 이번 룬 리그에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고 있긴 해? 괜히 부상당했다가····”
“어, 저기!”
그때 엘리사가 옆을 가리켰다·
“시몬이 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