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6화
웃차·
시몬이 묵직한 건초 더미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왔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온 엘렌이 옆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옮기면 돼요! 시몬!”
“응·”
시몬이 건초 더미를 내려놓는 사이, 엘렌은 외양간에 있는 젖소들에게 물을 주고 갈퀴를 꺼내 주위의 볏짚을 골고루 흩뿌렸다·
시몬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로하론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노동을 하고 있는 거야?”
“죄, 죄송해요! 일하는 중이었어서· 겸사겸사 도와주세요!”
예전에 봤었던 허당 같은 면모와는 다르게 엘렌은 꽤 생활력이 있는 편이었다· 건초를 모두 옮겨둔 시몬이 허리를 펴고 앞을 보았다·
넝쿨이 어지럽게 덮여 있는 오래된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엘렌, 수도원 소속이었구나·”
“맞아요·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랐어요·”
그녀가 외양간 바닥에 물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은 가끔씩 저희가 잘 있는지 보러 오시다가 어느샌가 아예 사라져 버렸구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수도원 문 쪽이 복작거린다 싶더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낯선 사람인 시몬을 경계하고 있었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그런지 무섭게 보인 모양·
엘렌이 웃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아! 옛날에 언니를 구해줬던 착한 사람이야!”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래!”
그 한마디에 경계심이 완전히 해제되고, 짜리몽땅한 키의 아이들이 두 팔을 벌리고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수도원 앞 공터가 놀이터가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시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콧물을 흘리며 헤헤 웃기도 했다· 시몬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생들이 많다고 했지? 이 아이들이구나·”
“네! 피가 섞인 아이들도 있고 아닌 아이들도 있지만 전부 제 소중한 동생들이에요!”
엘렌이 아이들에게 뭐라뭐라 이야기를 했다· 일을 거들어줄 생각인지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시몬이 불쑥 한마디 했다·
“에프넬 학생을 사칭하면서까지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가 있었네·”
“악! 아악! 애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말아 주세요!”
“엘렌 언니! 사칭이 뭐야?”
동생이 바로 묻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엘렌이 당황한 웃음을 흘리고는 등을 떠밀며 저기 가서 놀라고 했다·
아이들은 금방 흩어져서 공터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조심하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푸욱 쉬었다·
“크흡, 사실은 제가 이 수도원의 희망이었거든요· 여기 수도사님이 없는 살림에 뒷바라지해 주시고 에프넬 입학까지 도와주셨는데···!”
“너무 경쟁이 치열한 나머지 학교에서 나오게 됐고, 학생 신분을 사칭해서 돈을 벌게 된 거네·”
“사칭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시몬이 옅게 웃음 지었다·
그때 또 다른 아이가 다가와 엘렌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언니 언니· 이 오빠는 누구야? 언니 남자 친구야?”
“응?”
그녀가 흠칫했다· 그러곤 못 들었는지 아이들을 챙기고 있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훗 하고 귀밑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렇지 뭐· 대충 비슷한····”
쿠쿵!
그렇게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엘렌의 머릿속에 레테의 화가 난 얼굴이 확 하고 떠올랐다·
제 발 저린 그녀가 우왁! 하는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더니,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휙휙 살피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별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처, 천벌 받는 줄 알았네····”
“?”
어쨌거나 아이들이 놀러 가고, 시몬과 엘렌은 비로소 휴식을 취할 겸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때 마침 흰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라우스, 엘렌! 손님을 데려왔구나·”
“수도원장님! 라우스예요!”
이 사람이 이 수도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시몬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눈을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고, 대뜸 시몬의 탄탄한 팔뚝이나 다리부터 훑어본 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엘렌! 건장한 남편감이라도 데려왔느냐!”
“···저 같은 게 어찌 감히·”
땀을 삐질 흘린 엘렌이 어쩐지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수도원장은 잠시 기다려 보라며 나가더니, 치즈와 포도주를 조금 가져왔다·
“자네는 꽤 젊어 보이는데 술을 마실 수 있나?”
“아, 예· 조금이면 괜찮습니다·”
수도원장은 포도주를 잔에 따라주었고 시몬은 가볍게 그것을 맛보았다·
“···!”
입이 딱 벌어졌다·
농밀하고 찐득한 맛· 포도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묘사하자면 체리파이를 한껏 입에 집어넣는 것 같은 맛이다· 믿기지 않아서 한 번 더 마셨다· 시몬이 먹은 포도주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너무 맛있어요·”
“허허허! 다행이군! 내 집처럼 편히 있다 가게·”
수도원장이 떠나고 시몬은 믿기지 않는 듯 포도주잔을 바라보다가 엘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수도원이 왜 자금난에 시달리는 거야?”
“아까 시몬도 보셨다시피 먹는 입은 많지만, 우리가 가진 포도밭이 그리 넓진 않아요· 가난한 수도원이거든요·”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제 팔을 주물렀다·
“무엇보다 요즘은 그 포도밭도 끝장날 위기에 처해서····”
“로하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이지? 자세히 말해줘·”
드디어 사건의 전말을 엘렌으로부터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본래 로하론은 대륙 전체의 포도주 수요를 감당하는 천혜의 경작지였다·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밭에 신성을 주입하는 농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기도 했고, 병충해를 예방하고 몬스터가 포도를 훔쳐 먹는 것을 막기 위해 포도에 신성을 직접 부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신성 농업이 최고조로 발달하여 로하론의 전성기가 열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신성이 실린 포도들을 먹을 수 있는, 신성 친화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흔히 말하는 자연선택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엄한 하늘섬의 법률에 의하면, 신성을 가진 동물은 모두 ‘신수’로 취급된다· 수도사들은 신성이 실린 포도를 뺏어 먹는 이 신성 몬스터들을 해치거나 쫓아낼 수 없었고, ‘여신의 자비’라며 그들이 포도를 먹어치우는 것에서 생기는 손해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기로 했다·
“신수가 맛본 포도에는 여신의 은총이 서린다고 했어요! 실제로 신수들이 따 먹고 남은 포도를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엘렌의 설명을 들은 시몬이 바로 정정했다·
“그건 그냥 신수가 당분이 강한 포도만 골라서 따 먹었으니 그랬겠지· 병충해가 든 과실이 맛있는 거랑 같은 이치야·”
“···시몬, 못 본 사이 감성이 메말라졌네요·”
그런데 그 조그만 피해도 견디지 못한 몇몇 대형 포도밭을 소유한 수도원들은 포도에 더더욱 강한 신성을 부여해 신성 몬스터들이 먹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그 바람에 ‘여신의 자비’를 인정하며, 평소처럼 작은 양의 신성 농법을 고수하던 수도원들만 피해를 입었다· 신성이 약한 포도밭 쪽으로 신성 몬스터들이 몰리게 된 것이다·
결국은 너도나도 포도에 신성량을 늘리는 농법이 유행했고, 덩달아 신성 몬스터들도 더더욱 신성 적응력이 뛰어난 생물만 자연선택 되어 진화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블린이 나타났어요·”
갑자기?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고블린 정도야 수만 많지 약골 몬스터잖아·”
“네, 수도사님들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본래 로하론 지방에는 고블린이 살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블린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 모두 로하론의 포도밭 생태계에 적응하여 신성 적응력이 있는 개체들이었다·
이 신성 고블린들이 등장하자 기존에 영역을 가진 신성 몬스터들과 영역 다툼이 일어났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싸우며 몬스터들의 개체 수가 줄어드니 수도사들 중에서는 고블린의 등장을 반기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생태계가 완전히 역전되고, 포도밭의 신성 고블린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악몽은 그때부터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그녀가 양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파르르 떨었다·
“고블린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기도하는 고블린·
그것은 데바교를 믿는 신성연방 주민들에게 거대한 쇼크로 다가왔다· 법률상 ‘신수’일 뿐,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에 신성 고블린은 미천한 미물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으며 데바 여신을 찬미하는 행동을 했다· 포도를 따 먹을 때도 기도를 드린 뒤에 먹었다·
고블린에게 ‘종교’가 생긴 것이다·
급기야 신성의 방출과 제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룬어를 학습하고 마법진을 펼쳐서 백마법을 사용했다· 고블린에게 언어와 마법 체계까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백마법을 손에 넣은 신성 고블린들은 그 개체 수가 백배 천배로 늘어났다·
애초에 고블린이란 몬스터는 생물로서의 모든 여력을 ‘번식’에만 쏟아부은 존재들이다· 고블린 암컷은 배가 부풀면 열 쌍둥이까지는 가볍게 낳고, 막 태어난 고블린이 성체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6개월 정도다·
물론 고블린의 평균 수명은 5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성체가 되기 전에 천적의 공격이나 병에 걸려 단명하지만, 로하론의 신성 고블린들은 천적도 물리쳤고 백마법도 갖고 있었다·
병도 낫고 상처도 회복할 수 있으니 생존력이 더해진 고블린들은 그 개체 수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이제는 인간을 능가하여 로하론 지방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물론 우리도 그냥 두고만 본 건 아니에요·”
엘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앙에 절실히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서 원정 군대가 로하론에 세 차례나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군대들 모두 공격을 중단하고 돌아갔어요· 팔라딘들이나 병사들 모두 백마법을 쓰고 여신의 의례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고블린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설명하고 있는 그녀의 미간이 떨렸다·
“심지어 죽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여신의 이름을 외치며 ‘순교’를 시도하는 고블린들도 있었대요· 결국 다들 고블린들을 없애는 걸 포기했죠· 팔라딘 중에서는 심각한 신성 슬럼프에 시달리는 자들도 생겼어요·”
‘그래서····’
시몬이 이마를 꾸욱 짚었다·
‘신성연방에서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긴 거구나·’
하늘섬이 맡긴 임무 자체는, 로하론 지방의 신성 몬스터 퇴치·
그러나 예상한 대로 그 속내는 신성연방에서 해결하기 힘든 로하론의 신성 고블린들을 네크로맨서의 손을 빌려 제거하는 것이었다·
연방에서는 대놓고 신수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으니, ‘신성 고블린의 완전 멸절’이라는 목표를 대놓고 제시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된다·
“군대가 물러간 지금은 신성 고블린들의 행동이 더더욱 위협적이고 담대하게 변했어요· 포도밭을 다수 장악하고, 다른 지방의 프리스트들을 납치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죠· 심지어 하늘섬에 자신들을 정식 ‘신도’로 받아달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돼·”
“도와주세요 시몬·”
엘렌이 벌떡 일어나 간곡하게 말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드넓은 로하론을 고블린들이 가득 채우는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어요! 이대로 방치하면 이 지역이 쑥대밭이 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리고·”
시몬이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가 말했다·
“틀림없이 그 고블린들을 움직이는 자가 있을 거야· 그자를 찾아내야 해·”
엘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자라면 짐작 가는 자가 있어요·”
* * *
“허억! 헉!”
“끝이 없어!”
헨릭 왕자, 크레이그, 아이비, 그리고 제나르· 하운드 키즈 네 사람이 포도밭 깊은 곳까지 들어가며 신성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 신성 고블린들, 뭔가 이상해·”
서겅!
아이비가 직접 허리춤의 검을 휘둘러 고블린의 목을 베고는 말했다·
“어느 샌가부터 공격하질 않아·”
처음에는 신성 고블린들도 반격을 했지만, 하운드 키즈가 강력하단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맞서 싸우지 않고 뭔가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어눌한 언어로 ‘라우스’ 하고 중얼거리거나,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공격을 포기한 채 온갖 동작을 취했지만 하운드 키즈는 멈추지 않았다·
“지랄한다· 미친 새끼들!”
빠악!
크레이그가 발로 걷어차 고블린의 두개골을 부수며 외쳤다·
“이 고블린들! 기도하는 척하면서 우리들 눈치를 슬슬 보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크레이그·”
“우리가 신성연방 사람인 줄 아는 거야! 그쪽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도하는 동작을 취하면 공격을 멈추니까 그걸 노리는 거라고!”
어떤 고블린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왜 공격을 계속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식에 괴리감이 생긴 듯한 모습·
헨릭 왕자가 턱을 짚었다·
“학습된 행동이란 거군·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처억!
척!
그때 신성 고블린들이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좌우로 멀어지더니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케르륵!
키릭!
하운드 키즈들도 걸음을 멈췄다· 이내 고블린들이 물러난 공간 사이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
태양이 언덕 위로 올라왔다고 생각할 만큼 눈부신 광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운드 키즈들 모두가 전신에 전율을 느끼며 칠흑을 일으켜 대처했다· 칠흑 사용자로서 온몸에서 거부감과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스스스스·
하늘에 발이 조금 떠 있는 새하얀 순백의 몸뚱이가 보인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뿌연 잔상이 나오고 있다·
그것의 뾰족한 귀를 보면 고블린 같기도 했으나, 다른 고블린들과는 외형이 완전히 달랐다· 녹색이 아닌 새하얀 몸, 배는 배불뚝이처럼 부풀어 있고 몸뚱이와 비견될 만큼 머리가 커다랬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걸 보니 마치 인간의 태아와도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몸에는 하얀 베일을 둘렀으며 무엇보다·
키이이이이이잉!
새하얀 신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형태의 마법진 같은 것을 등 뒤에 두고 있었다·
카륵·
그것이 고블린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모든 고블린들이 엎드렸다·
이내 그것이 하운드 키즈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군가·]
고블린이 대륙어로 말하자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리더인 헨릭 볼드윈이 앞으로 나왔다·
“정체를 묻기 전에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 아닌가·”
[나는 데바 여신의 아들·]
그의 입이 열리며 신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블린의 몸에 갇힌 ‘성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