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화
합숙 훈련은 대부분 해안가 앞에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프리스트를 공략하기 위한 신기술을 준비하는 건 물론 각자의 주특기도 이곳에서 갈고닦았다·
시몬도 교관의 코칭을 받고 있었다·
“자이언트 스켈레톤을 떨어뜨려 본 스피어를 한번에 날리는 발상은 좋았습니다만·”
손에 든 자료를 훑어본 교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오버로드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직관적이었습니다· 조금 더 관절을 이용해서 유연하게 움직여 보죠·”
“알겠습니다·”
시몬이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다른 학생들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몬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작한다·’
시몬이 결심을 마치기 무섭게 사념으로 지시를 받은 스컬윙들이 하늘에서 ‘자이언트 스켈레톤’ 하나를 떨어뜨렸다·
쿠웅!
자이언트 스켈레톤은 착지와 동시에 몸이 분해되었고 내부에 마법진이 펼쳐졌다· 스켈레톤의 몸을 이루던 뼈들이 그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산탄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공중에 떠 있는 몇몇 풍선 타겟을 정확히 맞혔다·
‘여기에 연속 동작으로!’
시몬이 앞으로 걸어 나가며 오버로드를 일으켰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촉수칼날이 모래를 띄워 올리며 나타나 허공을 몇 차례 베어냈다· 이내 시몬이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가 칼날 끝에 손을 닿게 했다·
<카오스 인챈트>
우웅!
교차한 오버로드의 칼날이 자줏빛으로 물들었고 시몬이 뒤로 물러나며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하다가 손을 놓자 극한까지 구부러진 오버로드의 칼날이 쏘아지며 날카롭게 벼려진 혼돈을 검기처럼 쏘아 보냈다·
쏘아 보낸 검기가 해안 끝까지 날아가 타겟을 연달아 명중시키고 사라졌다·
시몬이 자리에 내려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지켜보던 학생들도 ‘나이스!’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훌륭합니다! 학생회장님·”
교관이 짝짝짝 박수를 치며 물병을 건넸다·
“모든 동작에서 2·5초 이상 빨라졌습니다· 수분을 보충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시몬은 물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훈련 방식도 도움이 되네·’
이번 합숙 훈련과 키젠에서 받던 수업은 차이점이 있었다·
키젠 학생들은 방대한 지식과 노하우를 가진 교수들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흑마법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그만큼 교수의 능력과 재량에 대한 중요성이 컸다·
하지만 이번 합숙에서 메도우는 선언했다·
-여러분은 이미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뭔가를 더 가르칠 게 없습니다·
메도우와 그의 교관들은 ‘코칭’에 집중했다·
그들은 학생들의 기술이나 전투 장면을 메모리얼 수정구로 기록하고 계속해서 돌려보면서 아쉬운 동작을 교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거나 칠흑의 기억하는 습성이 꼬여 있으면 효율적으로 다시 바꾸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거기에 오후에는 체계적인 체력 단련을 하고 저녁에는 재생 마사지까지·
이런 코칭 방식은 처음이지만 시몬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쭉 정리해 보고 이제는 쓸 이유가 없는 기술들은 봉인하고 과감하게 효용과 실전성 위주로 재배치했다·
시몬뿐만이 아니라 다들 열심히 해안가에서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고 있었다·
“오늘 코칭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켜보던 수정의 네크로맨서 메도우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남은 시간은 이곳 로하론에서 임무를 수행하시며 실전 경험을 쌓으시고 훈련이 부족하신 분은 부족한 점을 보충하시길 바랍니다· 대신 마을이나 수도원 신성연방의 주민들에게는 최대한 접근하지 마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불필요한 갈등은 피해야 하니까요·”
신성 몬스터들과 싸울 기회가 흔치 않았기에 키젠 학생들은 바로바로 포도밭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 와중에도 헨릭 왕자가 이끄는 하운드 키즈는 메도우에게 몇 가지 물어보더니 자기들끼리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지들 멋대로예요·”
떠나는 하운드 키즈들을 보며 메이린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카미바레즈가 피가 든 포션병을 여러 개 챙기며 말했다·
“시몬도 포도밭으로 갈 거죠?”
시몬이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미안 오늘 나는 혼자 움직일게· 임무 조사 차원에서 로하론 내부의 상황을 확인해 보려고·”
그 말에 메이린이 휙 끼어들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메도우 경이 한 말 안 잊었지? 프리스트나 연방 주민들과 함부로 접촉하지 마! 위험해!”
“물론이야 메이린·”
그렇게 모두가 서로 흩어져 움직였다·
시몬은 말한 대로 홀로 움직였다· 어제 포도밭을 둘러보고 왔지만 찜찜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몬은 일행들이 향한 반대편 포도밭으로 이동했다·
‘음·’
이쪽 포도밭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신성 몬스터에게 먹혔는지 포도의 중간이 텅 비어 있거나 알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무가 상하거나 포도들이 바닥에 엉망으로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바닥에는 몬스터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왜 이렇게 방치하는 거지?’
딱 봐도 상품성이 아주 좋아 보이는 튼실한 포도들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이 포도밭을 지키지 않았다·
인근 신성 몬스터들이 문제라면 철조망을 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몬스터가 먹으면 위독한 약 같은 걸 포도에 뿌려두기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방치하는 모습·
시몬이 추측하기에는 아무래도 ‘신수’에게는 어떤 종류의 상처도 내면 안 되기에 이렇게 내버려둔 것 같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파헤쳐진 포도밭을 걸어 다니던 시몬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저게 이 밭의 수도원 건물이구나·’
신성연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수도원이 포도주를 만드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수도원마다 포도주의 맛이 모두 달라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도원 투어를 하는 주당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곳 로하론은 대륙에서 가장 포도주 농사에 특화된 지역· 거대한 밭이 구획마다 있었고 그 밭의 중앙에 이 포도주를 관리하는 크고 으리으리한 수도원 건물들이 하나씩 솟아 있었다·
시몬이 지금 지나는 밭에도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그런데·
‘인기척이 하나도 없어·’
시몬은 성큼성큼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꽤 튼튼해 보이는 수도원의 정문이 박살 나 있고 카펫이 깔려 있는 실내에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시몬은 한쪽 무릎을 꿇고 흔적을 살폈다·
‘발자국 폭이 좁아· 인간보다 몸집이 작은 두 발로 걷는 이족보행형 몬스터가 쳐들어왔네· 그리고·’
흔적을 꼼꼼히 살피던 시몬의 눈이 찌푸려졌다·
‘맞서 싸우지 않았어·’
전투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이다· 그냥 몬스터들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다 박살을 내놓은 느낌· 수도원에 살던 사람들은 몬스터의 공격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몬은 몇 군데 더 포도밭을 돌아다니면서 수도원을 뒤졌으나 방문한 모든 수도원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던 중 세 번째로 방문한 수도원에서 이 지역의 지도를 구했다· 바다로 이어지는 긴 강을 따라 무수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포도밭마다 각 수도원의 위치가 전부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지도를 쭉 훑어 내려가던 시몬은 사람이 있을 만한 지점을 발견했다·
세 줄기의 강이 만나는 지점· 이 로하론 지역에도 중심 마을이 있었다·
‘좋아 여기로 가보자·’
* * *
시몬은 부지런히 걸어서 로하론 마을 앞까지 도달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는 신성 몬스터들이 침범하지 않는지 마을 인근의 포도는 상당히 상태가 좋았다· 알이 탱글탱글한 포도들이 나무에 가득 열려 있었고 어딜 돌아다녀도 포도 특유의 과즙 냄새가 난다· 막 작업한 건지 수레나 농기구가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친김에 시몬은 바로 마을 안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마을 주변이 신성결계로 보호받고 있었다·
물론 시몬에겐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잠시 프리스트로 변해 결계를 통과하고 이후 최대한 힘을 억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겉보기에는 그냥 일반인처럼 보일 것이다·
‘포도밭에 없었던 로하론의 사람들이 여기 다 있었구나·’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벽돌집들이 가득 펼쳐진 마치 인류의 살아 있는 박물관 같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보이니 이제야 조금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다만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얼굴에 시름이 가득하다·
주위를 쭉 둘러보고 있는데 외부인을 의식하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누구지?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해안에 정박했다는 암흑연합의 네크로맨서는 아니겠지?”
“설마! 결계를 어떻게 통과했겠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몬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우리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보네·’
조금 더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정보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어떤 여행지든 공통으로 들러야 할 공간·
‘주점이겠지·’
시몬은 떠들썩한 소리에 집중했고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여러 주점들이 밀집된 거리를 찾아냈다· 아직 해가지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응?’
그런데 주점 근처에 익숙한 종업원이 한 명 보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깜빡인 시몬이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며 방금 주점 안으로 들어갔던 그 여성 종업원이 양손 가득 커다란 접시를 들어 올린 채 달려가고 있었다·
“한 분이신··· 어?”
쨍!
시몬의 얼굴을 본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추더니 입을 벌렸다· 들고 있던 접시를 와장창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뒤에서 가게 주인의 것으로 들리는 불호령과 잔소리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이질 못했다·
“설마··· 설마··· 맞죠?”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
시몬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끝을 입술 앞에 세운 뒤 빙긋 웃어 보였다·
“역시 맞았네· 오랜만이야 엘렌·”
* * *
엘렌 자일·
2년 전 키젠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시몬이 고향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프리스트였다·
그때는 에르제베트가 동료가 되기 전이었다· 엘렌은 에프넬 학생을 사칭하며 현상금 사냥꾼 일을 했었고 동생들을 먹여 살린답시고 큰돈을 벌기 위해 위험천만한 암흑연합까지 넘어와서 일을 했었다·
그 후에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레테와 함께 가던 신성열차에서도 에프넬 학생을 사칭하며 돌아다니던 엘렌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곳 로하론 지방에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한 가지 먼저 묻겠는데·”
시몬이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아직도 에프넬 교복이야?”
전보다 더 조잡해지고 꿰매 붙인 곳도 있지만 틀림없이 백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에프넬 여학생 교복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엘렌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그게····”
“?”
“마을 사람들 모두 진짜 에프넬 교복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요··· 이거 입고 서빙하면 매출이 잘 나온다나 뭐라나· 높으신 에프넬 학생을 부려먹는 기분이라 손님들이 만족한다나 뭐라나····”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그보다 레테한테 그렇게 혼났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엘렌 네가 왜 여기 있어?”
“당연히 로하론이 제 고향이니까요!”
그녀가 두 팔을 펼쳤다·
“암흑연합에서 헤어졌을 때 말했잖아요! 잊었어요?”
-어디로 간다고 했더라?
-신성연방의 로하론이라는 영지예요·
-그래 무사히 신성연방으로 돌아가길 바랄게·
엘렌이 그때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시몬은 이미 까먹은 상태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2년 전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그나마 처음 만난 프리스트라는 특수성 덕분에 엘렌의 얼굴 정도는 확실히 기억했다·
“여기가 엘렌의 고향이었구나·”
시몬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엘렌이 반짝이는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시몬이야말로 로하론에는 어떻게 온 거예요? 키젠의 군단장이자 학생회장이 된 거 아니었어요? 이번에 룬 리그에서 레테 님이랑 싸우신다고···!”
이렇게 외진 지역에 사는 엘렌도 룬 리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만큼 연방에서도 엄청난 화제인 것 같았다· 시몬이 태연히 말했다·
“바로 그 룬 리그에 참가하기 전에 임무와 훈련을 하려고 온 거야·”
“아 그래서 그렇게 소리가 컸던 거군요!”
“응· 그보다 여기서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엘렌· 나도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시몬이 고개를 쭉 들이밀었다·
“로하론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같은 시각·
엘리사 제이미 그리고 쥴은 한 팀으로 다니면서 포도밭을 헤집고 가고 있었다·
“아! 힘들어! 더워!”
유령함대의 엘리사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주로 몬스터를 약화시킨 뒤 쥴에게 뒤처리를 맡긴 반장 제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얘들아· 여긴 신성연방인데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 다시 해안가로 돌아가자·”
“그래야 할 것 같소·”
스릉!
쥴이 마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오· 이곳은 포도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소·”
“벌써 마을 사람들이 수확한 거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소만····”
키륵!
그때 울음소리를 들은 세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성 몬스터인 줄 알고 경계심을 끌어올리던 세 사람의 얼굴에 이내 희미한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뭐야 고블린?”
키륵 키륵!
몸집이 작은 고블린 몇 마리가 작은 무기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사가 흐암 하고 하품을 했다·
“지긋지긋한 저 얼굴을 여기서도 보다니! 신성연방에도 고블린은 있구나· 내가 처리할게·”
“멈추시오! 엘리사·”
쥴이 손을 펼쳤다·
“뭔가 이상하오!”
고블린들이 일제히 좌우로 물러나더니 또 다른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하얀색 옷을 입고 있고 커다란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었다·
“뒤에도 있어! 포위당했어!”
제이미가 다급히 외쳤다· 그때 지팡이를 든 고블린이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지팡이 위로 하얀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엑소시즘>
쿠르르르르르릉!
새하얀 벼락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세 사람은 경악한 얼굴로 몸을 던져 피했다·
“뭐 뭐야아아아! 방금 뭔데에!”
엘리사가 질 나쁜 공포연극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어떻게 고블린이 백마법을 쓰는 건데!”
여러 흰 옷을 입은 고블린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무수한 하얀 벼락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