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화
마음 같아선 시몬은 네프티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동기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특히 결사가 사람들의 마이너스 감정을 수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이에 대응하기 위해 네프티스가 룬 리그를 열어 대륙민들의 관심을 하나로 집중시키려 한다는 것· 이로 인해 결사가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하지만 이건 중대 기밀이었다· 네프티스가 ‘감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정보 자체가 결사의 귀에 흘러 들어가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니 적당히 사실을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이번 룬 리그는 대륙 전역이 주목하는 대형 행사로 만들 거라고 네프티스 님이 말씀하셨어·”
결사의 본거지를 치기 전에 신성연방과의 불필요한 전투를 방지하는 외교적인 이유는 물론 결사의 공세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의 관심을 한데 모으고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새로운 화제와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 룬 리그의 또 하나의 목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결사가 습격할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 주의하라는 메시지까지 자연스럽게 이었다·
물 흐르듯 깔끔한 설명에 모두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행사는 키젠에서 겪었던 다른 행사들과는 성격이 달라·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는 건 당연하고 대륙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해· 우리로서는 처음 해보는 엔터테인먼트가 될지도 몰라·”
시몬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자· 기자들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이야기해야 해· 이건 네프티스 님의 지시이기도 해·”
“그러니까 감정 노동? 어쩐지 비싸고 예쁜 옷 입히더니·”
전체 10위 클라우디아가 긴 머리를 쓱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가만히 기다리던 쥴도 한마디 했다·
“경기장에서 프리스트만 상대하면 되는 줄 알았소만 준비 과정이 왜 생각보다 길구려·”
“당연하지·”
80년 만에 개최되는 룬 리그고 전 대륙민의 축제다· 무슨 학교 결투평가처럼 쾅 붙고 끝날 리가 없다· 거쳐야 할 절차도 많고 합숙훈련과 연방에서의 비밀 임무까지· 이 모든 과정이 룬 리그의 일환이었다·
“아 싫은 사람들은 빠져! 이 또한 정치의 일환이거든?”
촤르륵!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호화로운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엘리사가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관심 하나하나가 내 힘이고 권력이야! 이렇게 큰 판을 깔아줬으니 맛있게 먹어줘야겠지? 신난다!”
메이린이 ‘으음’ 하고 입술에 검지를 댔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세르네를 넘어서 나만의 인지도를 쌓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네·”
“저도 열심히 할게요! 시몬!”
카미바레즈가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모아 불끈 쥐었다·
“저희 모습에 대륙민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각자의 역할과 사정에 따라 열의를 냈다·
헥토르는 길게 하품을 하며 인상을 썼다·
“명령이니 하겠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에프넬을 상대로 한 승리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시몬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헥토르는 아직 섭정과 6군단 문제에 관해서 대륙민의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
이대로는 키젠을 졸업하는 순간 전 네크로맨서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헥토르에게 있어서도 이번 룬 리그 일정은 6군단장의 자리를 더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그럼 출발해 볼··· 아! 한 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
시몬의 말에 다른 학생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저 멀리 바닥에 놓인 옷 수거통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 보였다· 뻗친 윗머리가 빼꼼 올라와 있어서 잘 보였다·
“에이젤 선배님·”
시몬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해요·”
“나 나나나 난 자신 없어! 그런 이야기 사전에 들은 적 없어! 그냥 싸우면 되는 줄 알고 왔단 말야!”
에이젤이 벌벌 떨며 고개를 내밀었다·
중증의 대인기피증이 재발한 모습이다·
“대 대륙민들이 다 본다고? 이런 내 모습을? 아 안경! 안경은 어디 있지? 키높이 신발이랑···!”
시몬과 메이린이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이내 메이린이 클라우디아를 데리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선배님~ 나오셔야죠!”
“모범을 보여주세요!”
메이린과 클라우디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에이젤의 양팔을 붙잡은 채 진압해서 끌고 나왔다·
여후배들에게 붙잡히니 얼굴이 벌게진 채로 꼼짝도 못 하고 끌려오는 에이젤이었다· 마침 본부 직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준비 다 끝나셨습니까?”
“네!”
“가시죠·”
* * *
배가 목적지가 도착했다·
학생들은 불어오는 해풍에 세팅한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부여잡으며 갑판 위로 올라왔다·
“와아!”
다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본부 직원이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룬 리그 합숙의 개회식장 ‘그랜드 쿼츠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메이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게 현실 맞지?”
“너무 신기해요!”
놀랍게도 바다 한복판에 거대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3층짜리 연회장이 둥둥 떠 있었다·
연회장 내부에서부터 쏟아지는 조명이 수정벽에 반사되어 퍼져 나가며 아름다운 빛의 쇼를 만들어냈다· 하늘과 바다가 온통 무지갯빛으로 알록달록했다·
거기에 귀가 울릴 만큼 풍성하고 화려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상에! 그랜드 쿼츠홀이라니!”
엘리사가 제자리에서 마구 뛰면서 감탄했다·
“암흑연합에서 가장 명망 높고 대단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야! 나도 어릴 때 아버지랑 한번 같이 가본 것 외엔 처음이야!”
바다 위에 떠 있는 이 수정 연회장은 사시사철 축제와 파티가 열리는 곳이었고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연합 럭셔리의 최고봉이었다· 시몬을 눈을 비비적거렸다·
‘너무 강한 빛을 주위에 뿌리고 있는데 괜찮으려나?’
이내 배가 그 앞에 정박하고 그랜드 쿼츠홀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뛰어나와 카펫을 배에 이어지도록 깐 뒤 양옆으로 도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린 시몬이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레드 카펫을 밟는 가운데 이 와중에도 울먹이며 동료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한 명이 있었다·
“합숙훈련이라며! 합숙훈련이라며어!”
에이젤이었다·
그에게는 이 화려한 ‘사교의 장소’가 어떤 도살장이나 지옥보다 더 끔찍하게 보였으리라·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멈출 수는 없다· 긴 카펫을 따라 쿼츠홀 내부로 들어가자 커다란 문이 나왔다· 잘 차려입은 집사 같은 사람이 개회식장 입구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시몬 일행을 힐긋 보더니 준비하라는 신호를 손짓으로 보내고는 개회식장 안으로 들어가 외쳤다·
<여러분 룬 리그에서 신성연방의 프리스트 대표팀과 자웅을 겨룰 키젠의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외 9인입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악이 경쾌하게 바뀌고 내부에서 우아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시몬이 제일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고 그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어서 오세요! 잘 오셨습니다!”
“허허허! 시몬 학생회장!”
“얼굴이 훤하구만!”
바닥 벽면 천장까지 전부 수정으로 이루어진 실내에서 휘황찬란한 조명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상당히 신분이 높거나 고위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웃는 얼굴로 다가와 인사했다·
물론 단순한 환영회를 즐기러 온 게 아닌 만큼 기자들도 와 있는지 곳곳에 마력 촬영기의 작동음이 정신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일행들도 모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말을 걸었고 그러다 보니 다들 흩어져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주인공이긴 한가 보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이 각 학생들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거나 격려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뒤에는 기자들이 와서 그 모습을 담아가고 질문을 했다·
“룬 리그의 승률이 그리 높지 않는 걸로 아는데 대표의 리더로서 이번 룬 리그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몬은 웃었다· 이 정도 질문쯤이야· 사실 비명의 정글 개회식과 학교 행사에서 받아본 질문들로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과거의 승률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8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네크로맨서들도 프리스트들을 충분히 따라왔다고 생각합니다· 키젠인 만큼 말보다는 실력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곳곳에서 만족스러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키젠 학생회장으로서 받았던 제왕학 수업의 경험은 물론 제인이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높은 사람들을 상대하게 한 경험이 다 도움이 되었다· 말이 저절로 척척 나왔다·
물론 가끔은 함정도 있다·
“에프넬에서도 성녀를 비롯한 꽤 중요한 인물들이 나올 텐데요· 연합의 기회가 된다면 제거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시몬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룬 리그는 죽고 죽이는 전장이 아닙니다· 실력과 역량을 발휘할 기회의 장일 뿐이죠· 앞으로 적절하지 않은 질문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넘긴 뒤 시몬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빠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일행들도 하나같이 잘 대처하고 있었다·
염려하던 헥토르 쪽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을 하며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는 모습· 그래도 고위귀족 출신이니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시몬이 출구를 찾아서 걷고 있는데·
“어?”
조금 구석진 곳에서 의자에 앉은 채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들은···!”
“오랜만이야·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녹색 넥타이 적색 넥타이 청색 넥타이를 두르고 정장을 차려입은 세 남자들·
딱 봐도 시몬과 같은 나이 또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너희들이····”
“그래 우리도 룬 리그 대표로 왔다·”
합숙 총 정원은 20명·
그중에 3대 네크로맨서학교에서 차출된 세 명이 바로 이들이었다·
알란드의 학생회장 녹색 넥타이에 둥글둥글한 안경을 썼다·
시에라의 학생회장 빨간 넥타이에 코에 피어싱을 했고 머리카락이 파인애플처럼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모이란의 학생회장 청색 넥타이에 체격이 탄탄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물놀이용 튜브 같은 걸 한쪽 팔에 끼고 있다·
확실한 포인트를 머릿속에 입력해 둔 시몬이 친절하게 웃었다·
“다들 반가워· 우리 초면이었던가?”
“우린 널 알지만 너는 우릴 모르겠지·”
알란드의 학생회장이 말했다·
“이번 편입평가전도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같이 잘해보자·”
시몬이 말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시에라의 학생회장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한마디 했다·
“잘해봐야지· 물론 뭐 우리가 레귤러 멤버에 들어갈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제 보니 이곳의 사람들이나 기자들은 이들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기들끼리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네크로맨서 간의 경쟁에는 어떤 변수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시몬이 손바닥을 펼쳤다·
“서로 최선을 다해 경쟁해 보자·”
악수를 권하려고 손바닥을 내민 건데 3대 학생회장들은 딱히 손을 잡지 않았다·
시몬이 조금 머쓱하게 있는 그때·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여기 있으셨군요! 후작님께서 꼭 보고 싶으시다고···!”
“아 네· 가겠습니다·”
바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시몬을 3대 학교의 학생회장들은 조금 굳은 얼굴로 지켜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 * *
그랜드 쿼츠홀에서 연회가 벌어지는 같은 시각·
쏴아아아아아아!
연회장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빛에 끌리듯 한 괴생명체의 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