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화
-그 그건···
-···버두스 교수도 같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기사들 중 재치가 넘치는 기사가 한 명 있었다·
다른 죽음의 기사들은 감탄 섞인 눈빛으로 동료를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지를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지혜였다·
물론 버두스 교수는 자의적으로 참가한 게 아니라 납치당해서 참가하긴 했지만 원래 에인로가드 교수라면 납치당한 것도 죄였다·
그리고 그게 버두스 교수일 경우 가중처벌이었다·
비블레 이 놈··· 됐다· 그래도 망가지진 않았으니 다행이군· 분신 놈이 비블레를 처벌했다는 건 무슨 소리냐? 혹시 죽었나?
해골 교장은 살짝 걱정을 담아 물었다·
선량하고 너그러운 본인과 달리 명예욕의 분신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은 정말로 악의 없이 깝죽대다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
영지의 마법이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지만 마법에는 샛길이 있고 대마법사는 그런 샛길에 가장 능숙한 족속들 아니던가·
-아닙니다· 교수님이 죽진 않았습니다·
한두번 정도는 죽어도 좋았을 텐데·
해골 교장의 중얼거림에 기사들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버두스 교수님은 그저 호된 꼴을 당했을 뿐입니다· 작품들이 조금 부서지고···
그럴 줄 알았다·
보고를 들은 교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버두스 교수를 죽이지 않는다면 체벌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버두스 교수의 작품을 박살내는 일이었다·
저 비버 수인 마법사는 팔다리를 자르는 것보다 작품을 부수는 게 훨씬 더 강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해골 교장이라고 그 방법을 모르진 않았다· 사실 예전에 몇 번 쓴 적도 있었다·
의미 없는 일이다·
의미 없다고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작품을 부숴봤자 충격은 고작해야 며칠 갈 텐데 그 때마다 작품을 부수면 에인로가드가 먼저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버두스 교수가 만드는 작품들은 대부분 계약이 걸려 있거나 의뢰를 받은 작품들이었다· 워낙 빚진 게 많은 마법사인 만큼 순수 개인 작품은 숫자가 적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습니까?’
죽음의 기사 중 한 명이 속으로 생각했다·
학생들과 기사들의 생각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버두스 교수에 한해서는 ‘저 자식 한 대만 걷어차고 싶다’라는 생각이 꽤 자주 일치하곤 했다·
그래도 다들 기분은 좋았겠군· 나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
색인·
-여기 있습니다·
죽음의 기사는 공손하게 목록을 바쳤다· 버두스 교수가 작업하고 있는 아티팩트 목록과 이번에 파손된 목록이었다·
그걸 본 해골 교장은 매우 심란해졌다·
···많이도 부쉈군·
-뒷장에도 있습니다·
눈치 없는 기사 한 명이 추가로 징벌방에 떨어졌다·
해골 교장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나머지는 적어서 보고하도록· 다 하나하나 들었다가는 학기가 끝나버리겠다·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블레 교수만 징벌방에 보내고 나머지는 내버려둬라·
굳이 따지자면 가르시아 교수나 볼라디 교수에게는 보고를 누락하고 유물을 훔친 죄가 있었고 버두스 교수에게는 납치당하고 아티팩트를 지키지 못한 죄가 있었다·
하지만 전자는 무죄였다·
둘은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버두스 교수는 징벌방에서도 일할 수 있었으니까·
기사들이 전부 나간 뒤 해골 교장은 텅 빈 편지지를 쳐다보았다·
불타는 지옥 차원의 대악마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이 흰색 종이는 황제부터 시작해서 제국 재무관과 여러 귀족 가문들에게 보내야 할 편지들이었다·
해골 교장은 다시 밖에 있는 죽음의 기사를 불렀다·
···박쥐나즈 일어나면 불러와라· 제국을 지탱할 재목이 부탁하면 놈들도 좀 누그러지겠지·
-주인님께서 하신 일 때문에 협조 안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해골 교장은 충성스러운 기사를 징벌방에 보내버린 다음 옆의 기사를 불렀다·
불러오도록·
-예!
* * *
마법사의 꿈이란 것은 일반인의 꿈과는 달랐다·
당장 예지 마법 학파에서 꿈은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그 모호한 영역에서는 온갖 리바운드를 피해 미래를 점칠 수 있는 것이다·
예지 마법 학파까지 가지 않더라도 마법사는 살다 보면 강렬한 꿈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았다·
계약을 잘못한 마법사는 꿈속에서 이차원의 존재에게 쫓길 수 있었으며(이 때 실수하면 본체에도 피해가 갔다) 지나치게 복잡한 마법을 시도한 마법사는 그 후유증 때문에 환각버섯을 먹은 것마냥 기묘한 광경을 꿈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한이 쓰러진 동안 강렬한 꿈을 꾸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꿈속에서는 젊고 멀쩡한 인간 시절의 해골 교장이 나왔고 명예에 얽매인 해골 교장이 나왔으며 현재의 사악한 해골 교장도 나왔다·
객성 아르나와 소세계 고유세계와 야차왕 온갖 대마법들과 초월자들이 나와서 뒤죽박죽 섞이자 꿈의 내용은 더더욱 난해해졌다·
-···세상을 부탁하마·
-흥· 박쥐나즈 네가 나한테 나한테 욕설을 퍼부은 첫 제자도 아니고 마지막 제자도 아닐 거다·
-가르침을 받는 도중에 마법사 카드를 하던 그 자를 말하는 것이냐?
-그건 가이난도···
-···세상을 부탁하마·
-소세계를 잊지 마라· 계속해서 정진해라·
-타인을 위한 고귀함·
-너 요 햄스터 새끼· 옆에서 충동질을 해?
-···세상을 부탁하마·
최근 급하게 익혔던 마법들이 얼음 녹듯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세 명의 해골 교장들이 마치 호르마시 선배의 케르베로스처럼 빙글빙글 회전할 때 이한은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
일어났을 때 느껴진 것은 두들겨 맞은 듯한 온몸의 피로와 술에 취한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 머리· 그리고 팔에 칭칭 매달린 새끼 바실리스크였다·
‘···나중에 우겨야겠군·’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가 일어나면 저번에 집어던진 건 자기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사악한 술의 수작 때문이었다고 우길 생각이었다·
서리거인들의 술은 역시 그 종족만큼이나 사악하고 비열한 부작용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
개인실에서 내려가려던 이한은 새삼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허탈하고 허무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사라진 마법사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한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제국에 투서 써야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한은 제국에 투서 한 장 정도는 보낼 생각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은 조금도 듣지 않는 사악한 폭군이 마법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워다나즈!”
이한이 내려오자 공용 휴게실에 앉아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 몸이 좀 무겁긴 한데· 옆에 저건 뭐지?”
못 보던 내기판이 벽에 걸려 있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가능/불가능으로 나눠져 있는 내기판이었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자기 이름을 원하는 쪽에 적어놓았다·
가능이 더 많은 걸 보니···
“알았다· 내가 언제 일어나는지 내기한 거군·”
“아니· 네가 기말고사 시험에 참석 안 해도 수석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로 내기한 건데·”
“···다들 고맙다· 내가 얼마나 잤지?”
“일주일 넘게·”
“!??!”
이한은 경악했다·
오래 잤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였다고??
“시험은 아직 며칠 남았어· 워다나즈·”
“네가 없다고 놀지도 않았고·”
친구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 2학년 학생들이 방탕하게 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우정의 힘이었다·
양심이 있는 이상 친구가 쓰러졌다고 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시험 때문에 놀란 게 아닌데·”
“뭐?!”
이번에는 친구들이 경악했다·
당연히 이한이 일어나자마자 시험 이야기부터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뒤에 어떻게 됐지? 교장 선생님 분신이 사라졌잖나·”
“아· 그거···”
“다들 슬퍼하고 아쉬워했지· 가이난도는 징벌방도 갔어·”
“?!”
이한은 놀랐다·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이난도가 징벌방에 가다니?
“대체 왜? 교장 선생님한테 덤비기라도 했나??”
“어··· 비슷한데 좀 달라·”
분신이 사라지고 해골 교장이 돌아오자 그 변화는 에인로가드 학생들도 금방 알아차렸다·
-엇· 교장 선생님 분신 어디 가셨어?
-그러게? 교장 선생님은 보이는데 왜···? 교장 선생님· 분신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놈은 죽었다·
-···살인자! 살인자!!
겁 없는 고학년들은 해골 교장한테 오물을 투척하다가 역으로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선배들은 그냥 쫓겨났는데 왜 가이난도는 징벌방에 갔지?”
“혼자 달걀을 던졌거든·”
돌멩이나 오물은 용서해주더라도 달걀을 던지는 건 용서받을 수 없었다·
가이난도는 즉시 사치낭비죄로 징벌방에 끌려갔다·
“···어쨌든 다들 스승님을 기억해줬다니 기쁘군·”
“워다나즈· 괜찮나?”
“괜찮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한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해골 교장의 말대로 미친 분신 본인에게는 이게 더 나은 결말일수도 있었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세계에 얽매인 사념체가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래도 투서는 쓴다·’
지금 생각해보니 두 장 정도는 써도 될 것 같았다·
이한은 가명을 사용해 두 장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여 마법 학파 선배들이 산맥 공방에 추모비를 세웠는데 보러 갈래?”
“···뭐? 어느 학파?!”
회복을 위해 벽난로 위의 주전자에 놓인 커피를 양철잔에 따라 마시려던 이한은 순간 놓칠 뻔했다·
에인로가드에 많고 많은 학파 중에 가장 추모와 어울리지 않는 학파 아닌가·
“나도 놀랐는데 선배들이 세웠다던데?”
“후· 그렇군· 부여 마법 학파 선배들도 감명을 받은 건가···”
‘그냥 버두스 교수님 두들겨 패서 그런 것 같은데·’
친구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한이 기뻐하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대전투로 인해 공방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지만 거인들은 아직 근처에 남아서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버두스 교수님을 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돌아와서 교장의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같은 편지를 추모비 옆에 남기고 돌아섰다·
거인들은 훌쩍이며 그런 학생들을 꽉 껴안았다·
으드득!
학생들이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사이 이한이 나타났다· 거인들은 이한을 보고 우르르 몰려왔다·
-워다나즈· 이거 마신다· 슬픔 사라진다·
“거인술 아닙니까?”
-마법사들이 슬픔을 오래 간직하는 건 이게 없어서다· 우리들은 이게 있어서 슬픔을 빨리 떠나보낸다·
“전 괜찮습니다·”
활활 불타는 거인술은 슬픔을 빨리 떠나보내는 수준을 넘어 마법사의 정신도 떠나보낼 수 있었다· 이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맞다· 워다나즈· 야차 늙은이가 워다나즈를 기다렸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이한이 놀라워하는 사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오는구나·
낯익은 늙은 야차가 거인들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야차는 품속에 꾸러미를 하나 든 채 말했다·
-너 때문에 멍청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무슨 일이십니까?”
-시종장이 네게 물건을 남겼다· 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
“···왜 어르신에게??”
이한이 알기로 시종장이 딱히 야차 늙은이와 관계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야 주변에는 거인들하고 이 어르신뿐이었고 둘 중에는 그나마 더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이지·
야차 늙은이의 말에 거인들은 심술이 나서 야유를 퍼부었다·
-마법사가 종족만 보고 잘못된 선택을 한 거다·
-우리도 잘 전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