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7화
산맥의 뒤쪽으로 세계를 소환했던 마법사가 사라지자 여명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듯이 세계도 흩어졌다·
마법사의 제자를 도왔던 별의 빛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강대한 힘들이 연달아 사라지자 주변은 고요해졌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건 해골 교장이었다·
···뭐··· 해결되긴 했군·
해골 교장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떨떠름함이 담겨 있었다·
분신이 역소환되거나 영원히 유폐되는 것보다는 저렇게 승천하는 게 훨씬 더 좋은 결말이긴 했다·
분신들에게 일말의 안타까운 감정을 갖고 있는 해골 교장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남의 영지에서 제자를 납치하느니 학교를 파괴하겠다느니 난리란 난리는 다 친 놈이 멋대로 납득하고 승천해버린 떫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설득으로 승천할 수 있는 놈이었다면···
···해골 교장이 천문학적인 금화를 사용해서 대마법을 준비하기 전에 승천해도 되지 않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골 교장은 일단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생각해봤자 어쩌겠는가·
박쥐나즈 너도 고생 많았다· 그렇게 고집을 부린 것치고는 그래도 운이 따라줬군·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
박쥐나즈?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자가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해골 교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박쥐나즈 네가 화낼 때냐? 화를 내도 내가 내야지! 그리고 저 정도면 선화(仙化)다· 왜 그러는 거냐?
차라리 영원히 봉인한 거면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런 거면 해골 교장도 ‘네 마음대로 난리를 쳐라 난 내 길 갈 테니까’했을 테니까·
못난 제자들의 옹졸한 투정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의 이유는 해골 교장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교장 선생님께서만 방해 안 하셨어도 최소한 훨씬 더 안정적인 상황에서 승천하셨을 겁니다· 유언도 좀 더 길게 남기시고 말입니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한 마디씩 남길 수 있으셨는데···”
···승천이 농지거리냐!?
이제까지 제자들이 보였던 투정의 이유와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적인 이유에 해골 교장은 더더욱 황당해했다·
다른 제자들은 마법을 안 가르쳐준다 임무를 맡겨주지 않는다 자신을 마법사로서 과소평가한다 등등의 이유로 기어올랐는데 이 녀석은 고작 유언 남길 시간 안 줬다고 이러고 있다니?
천시(天時) 지시(地時) 인시(人時)가 결합된 천운이다· 오히려 내가 감사를 받아야지! 내가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네가 아르나의 힘을 꺼낼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놈은 승천도 못하고 유폐되었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침묵으로 항의했다·
해골 교장은 한 대 후려칠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안 그래도 제자의 상태가 무리해서 그런지 좋지 않았는데 아르나의 힘까지 끌어서 쓴 탓에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왔나· 박쥐 교수·
방금 다른 차원으로 일순간 쫓겨났던 볼라디 교수가 돌아오자 해골 교장은 빈정거렸다·
물론 볼라디 교수는 저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저런 말에 흔들릴 사람은 발드로가드 학생 정도일 것이다·
해골 교장은 빈정거리는 걸 포기하고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나마 볼라디 교수의 낯빛에 놀라움이 들불처럼 크게 번지는 모습이 소소한 위로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하게 나서실 이유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닥치게·
* * *
제국에서 가장 불행한 해골 교장은 에인로가드에서 가장 옹졸한 제자를 붙잡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바로 꿈의 장막을 치워버리고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을 귀환시켰다· 지금도 1초마다 거인들의 무게에 맞먹는 황금이 소모되고 있었다·
-잘 풀렸으니 귀환해도 좋네·
-예? 하지만 고나달테스 공 이 마법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금화를 투자하셨잖습니까?
-···잘 풀렸다고 했잖나· 다들 귀환하게·
-하지만··· 저희가 이 마법이 너무나도 비용이 천문학적이고 준비 과정도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이걸 쓰지 않고 잘 풀리셨다니요?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꺼-져-!
-으아악!
제국 각지에서 거액의 몸값을 받고 초빙된 마법사들은 화끈한 에인로가드식 배웅에 기겁해서 귀환했다·
이번 마법에 투자한 금화의 액수가 아른거리는 걸 치워버리고 해골 교장은 다시 현실에 집중했다·
너희 기사들· 충성과 명예를 숭상하며 주인에게 검을 바친 너희 기사들· 네놈들이 내게 많은 보고를 누락한 것 같은데·
-····
-····
해골 교장이 없는 동안 이한 관련된 일들을 적절하게 누락시킨 죽음의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홱 돌아섰다·
어디 가나?
-징벌방에 갑니다·
····
해골 교장은 육신의 부재에 감사했다·
만약 육신이 있었다면 분명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
원래 죽음의 기사들은 제자라 하더라도 저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박쥐나즈 녀석은 묘하게 사람 꼬드기는 솜씨가 있었는지 어느새 저 기사들을 자기 하수인처럼 부리고 있었다·
가기 전에 누락한 거 보고하고 가도록·
-···그냥 징벌방에 더 오래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
그 말에 해골 교장은 전율했다·
···혹시 파악하지 못한 게 더 있단 말인가?
···다 스켈레톤으로 강등시켜버리기 전에 제대로 보고해라·
악룡 앞에서도 검을 꼬나쥐고 덤벼들었던 죽음의 기사들은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조우린 전하께서··· 그···
다행히 그건 안다· 폐하께서도 아시는 일이고· 너희 잘못은 아니지·
해골 교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우린의 천재적인 지략은 미친 분신의 영원한 유폐 방법을 고민하던 해골 교장과 황제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없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다행입니다! 그러면 조우린 전하께서 제자 님에게 용석을 꺼내주신 일도 외출 금지 당하신 일도 몰래 빠져나가서 제자 님을 등에 태우고 같이 분신을 토벌한 일도 알고 계시겠군요?
···뭐?
황제한테 ‘예상했던 것보다 잘 해결됐고 대륙의 문제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상환 기간 좀 제발 연장해주십시오’라고 편지 쓰려던 해골 교장은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무슨 석에 무슨 토벌? 등에 태워? 선택받았다는 소리인가?
-····
-···사실 그 자리에는 배그렉 교수도 킴 교수도 있었습니다·
죽음의 기사들은 두 번째 죽음이 찾아올 것 같다는 위기에 필사적으로 책임을 나누었다·
해골 교장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뱀파이어 교수의 낯짝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힘을 원한다고 했을 때 쫓아냈어야 했는데···’
그래도 옛날에는 저렇게 비열하지 않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비열한 마법사가 됐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해골 교장은 충격에서 벗어났다· 초월한 마법사인 만큼 회복도 빨랐다·
그래· 알겠다· 사실 용의 등에 올라탄 거면 박쥐나즈 놈 손해지· 내 알 바 아니다·
용들에게 선택받은 계약자는 그 지지의 힘을 빌리는 대신 그만큼의 책임감이 필요했다·
용이 사고치면 그 계약자도 다른 용족들에게 같이 처벌받는 태고로부터 내려온 불합리한 계약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당사자였던 만큼 해골 교장은 그 계약이 얼마나 성가신지 잘 알고 있었다· 못된 제자에게 어울리는 벌이었다·
-다 다행입니다!
죽음의 기사들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럼 용석을 꺼내주신 일이나 분신을 토벌한 것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겠냐?
해골 교장은 정색했다·
황제는 상관하지 않겠지만 제국 관료들이 알면 게거품을 물며 발작을 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이번 분신 유폐 준비 때문에 여럿한테 미움을 샀는데···
-역시 설득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쉿 자네도 그 때는 협박이 더 빠르다고 찬성해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나·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재무관을 거꾸로 매달아놓은 건 좀···
-사과했잖나· 사과했으면 된 걸세· 상대도 사과를 받아줬고·
다들 닥쳐라· 그래· 일단··· 일단 이건 넘어가도록 하지· 전하께서 어디 가서 떠들 분도 아니시고·
조우린은 사교가가 아니었다· 제국 관료들이라 하더라도 이 일은 알기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해골 교장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분신 놈이 무슨 짓을 했는데 토벌까지? 그 사이 납치라도 또 했었나?
-상태가 반전되셨는지 대륙을 토벌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제자 님께서 구산팔해의 야차왕을 불러오셔서 해결을···
가르시아!!! 볼라디!!!
해골 교장은 결국 폭발했다·
교수란 놈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다 덮어??
당장 제자한테 별 문제가 없더라도 그렇지 근시안적인 것도 정도가 있었다·
가끔은 제자가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 같으면 호되게 호통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저 분신 하나 때문에 징징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까지 이러다니 정말 믿을 마법사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저··· 주인님·
뭐냐?
-주인님께서 폐하와 같이 마법을 준비하시면서 쓸데없는 보고는 하지 말라고 하셨···
만용을 부린 죽음의 기사는 즉시 심층 징벌방으로 이동됐다·
쓸데없는 보고가 뭔지 구분도 못 하느냐? 아무래도 그 야차놈이 수상하다· 뻔뻔하게 수작을 부렸을 수 있어·
해골 교장은 교수들이 보고를 누락시킨 데에는 야차왕의 술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했다·
천기와 앞날을 읽는 재주가 뛰어난 이 야차는 예전부터 교묘한 술수로 사람을 곤궁에 빠뜨리곤 했다·
두 교수들이 야차왕에게 설득당해 보고를 미뤘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분신의 상태는 아주 괜찮다 제자도 잘 가르치고 있다 괜히 해골 교장에게 보고해서 충돌을 만드는 것보다 제자를 위해 지켜보는 게 어떻겠냐’하며 음흉하게 속삭였으리라·
어쩐지 너무 친하게 지낸다 했다· 교수란 놈들이 말리진 못할 망정··· 다음!
-그 악신숭배자와 그랑덴 시에서 맞붙었던 건···
그건 들었다·
-그러면 모르툼 교수께서 갖고 온 그 죽음과 어둠의 맹수 본체와 계약하신 일도?
···그건 몰랐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군·
해골 교장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구산팔해에 방문해서 야차왕하고도 친목질을 한 모양인데 이제 저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애초에 페르쿤트라하고도 친해졌는데···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박쥐나즈는 정말로 강력한 초월자들을 꼬드기는 재주가 뛰어났다· 아마 그 비열한 간교함 때문이리라·
모르툼이 데리고 온 그 녀석의 본체를 만났다면 상처가 나았나보군·
-예· 그런 모양입니다·
죽음의 기사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스테달 나고라는 신진 마법사가 치고 다닌 사고까지는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해골 교장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것도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긴 했지만 이미 수도에서 놀랐던 것이다·
그랑덴 시 이야기는 그런데 왜 꺼낸 거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라도 거기에 있느냐?
-아닙니다· 그저 확인 차··· 참· 배그렉 교수께서 유물을 사용하신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성 이악투스의 돌을 말하는 거겠지·
해골 교장은 심드렁한 태도로 대답했다·
학기 초 미친 분신에게 납치당한 제자를 구하기 위해 볼라디 교수는 유물을 빌려갔었다·
당연히 해골 교장이 그런 유물을 허술하게 보관했을 리 없었다· 의도적으로 계산해놓고 배치한 것이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놀랐습니다· 성 이악투스의 돌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나바달다의 물방울까지 빌려주실 줄은···
···아나바달다의 물방울도 가져가서 썼느냐?
-····
-····
죽음의 기사들은 아차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