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인타렌달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이한은 마침 잘 왔다는 듯이 대답했다·
“잘 오셨습니다· 인타렌달스 님· 스승님한테 한 마디 해주십시오·”
“무무무무슨?”
불경한 제자의 불경한 발언은 안 그래도 기절할 뻔한 시종장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스승님께서 시험을 대비해 가르침을 주겠다고 하셔놓고 전혀 상관없는 강의만 하루 내내 하셨단 말입니다·”
“저는 이한 님이 방금 말한 문장의 모든 어절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타렌달스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찰나의 시간도 아껴서 제자에게 최대한 많은 걸 주입시켜야 하는데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혹시 내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나?’
어쩌면 주인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여유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왔군· 갖고 왔나?”
“예· 고나달테스 님· 그런데···”
질문하려던 인타렌달스는 주인이 보내는 눈빛을 받고 멈칫했다·
충성스러운 시종장답게 인타렌달스는 눈빛만 봐도 주인이 무슨 명령을 내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주인이 내린 명령은 침묵이었다·
“뭘 갖고 오신 겁니까?”
“제자는 가서 다른 마법사들을 가르치도록 해라· 남은 분량을 끝내도록·”
이한이 관심을 가지자 미친 분신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방금까지도 시험과 전혀 상관없는 강의를 친구들에게 주입하느라 고생했던 이한은 당연히 분노했다·
“아니 방금까지 스승님 때문에 다른 내용만 가르쳤는데 이러실 거면 그냥 처음부터 제가 하는 게 더 나았···!”
물론 제자가 분노하든 말든 별 영향은 없었다· 미친 분신은 제자를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제 이야기할 수 있겠군·”
“···주인님· 감히 직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인타렌달스· 자네 같은 시종장이 직언을 올리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왕족에게 직언을 올릴 수 있겠나· 마음껏 말하게·”
미친 분신은 평소 공석에서 보여주는 태도와 다른 소탈한 모습으로 말했다·
인타렌달스는 그런 주인의 태도에 감격하기보다는 더욱 강한 불안함을 느꼈다·
평소 언제나 빈틈없었던 주인이 보여주는 약한 모습이라니·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저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세계가 다시 주인님을 거부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맞네·”
“죄송합니다· 역시 아니었군요· 맞다면 그렇게··· 예??!”
인타렌달스는 뒤늦게 반응했다·
질문을 던져놓고도 정작 정말로 맞다고 대답이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천겁이나 겁화가 닥치셨습니까?! 아니면 차원의 균열이···”
“아직· 그러나 제자가 본 미래를 보면 거의 확실하지·”
미친 분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세계로부터 거부 받고 있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겸손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미리 예지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제자가 엿본 미래에서 미친 분신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저번에 있었던 반전(反轉) 현상이 다시 일어나고 제자가 왕족과 대립하는 걸 보면 조만간 일어날 걸세·”
“막을 방법을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산맥의 공방 근처에 설치된 마법들은 단순히 해골 교장과 하수인들의 시선을 피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준비된 게 아니었다·
세계로부터 거부 받는 자는 끊임없이 닥쳐오는 이상현상을 막아낼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일격에 역소환될 수 있었다·
곧 머지않아 다시 반전된다면 그에 맞춰서 막을 방법을 준비하면 됐다·
빠듯하겠지만 이 주변을 약탈하고 부족한 건 달카드 가문의 금고에서 가져오면···
“아니· 주기가 너무 짧군·”
그러나 미친 분신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겁화를 마법으로 피하는 것은 피하면 피할수록 그 세기가 심해졌다·
이렇게 빨리 두 번이나 광기가 찾아온 이상 세 번째는 더욱 빨리 더욱 강하게 찾아오리라·
“그 때마다 준비하시면 됩니다·”
“됐네· 그럴 바에는 역소환을 이용하는 게 현명하겠지·”
“하오나···”
인타렌달스는 머뭇거렸다·
역소환된 이후에도 언젠가 다시 강림할 수 있다지만 그건 대마법사의 능력으로도 예상이 불가능했다·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기대하느니 지금 어떻게든 막아내는 게 맞지 않은가·
왜 현명한 주인이 이런 선택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인타렌달스는 묻지 못했다· 충성심이 시종장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법 괜찮은 연금술사가 있더군· 비약을 받아놨네· 반전이 일어난다면 이걸 사용해서 역소환할 생각이지· 자네는···”
말이 비약이지 미친 분신을 역소환시킬 정도의 비약은 그냥 강력한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타렌달스는 주인의 말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예· 저는 역소환되기 전까지 남은 일들을 완수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남은 물건들과 책은 제자에게 전하고 버릴 건 버리고···”
“햄스터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쓰레기 말인가? 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하찮더라도 원래는 뛰어난 마법사입니다· 물려주시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한이 들었다면 ‘그런 거 주지 마십시오’하고 질색했겠지만 불행히도 이건 제자 몰래 하는 대화였다·
시종장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미친 분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작은 애완동물 하나 더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제자도 제법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고·”
“맞습니다· 이한 님께서는 직접 먹이도 주실 만큼 마음에 들어하셨죠·”
인타렌달스도 이 부분에는 동의했다·
확실히 왕족의 제자는 햄스터를 마음에 들어했다·
햄스터가 이전에 사악한 마법범죄자긴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고대 시절에도 저런 애완동물들은 종종 유행했었으니까·
-다항식이라고 다항식! 너 일부러 기억 못하는 거냐? 내가 저번에 못 놀게 했다고?
-아 아니야! 진짜 까먹은 거야 워다나즈!
-워다나즈· 참고로 저 자식 저번에 읽기로 한 마법책 안 읽었다·
-고맙다 모라디! 이 자식· 이러니까 까먹었지· 앞으로 나와!
-모··· 모라디! 우린 같은 탑이잖아! 왜 이러는데!
이한이 다른 마법사들을 쥐잡듯 잡고 있는 모습에 인타렌달스는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주인님· 오늘 불충한 직언을 올린 김에 한 마디 더 올리는 것을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제 짧은 소견으로서는 이한 님에게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다른 모든 건 양보하더라도 지금 제자를 저렇게 방만하게 내버려두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종장의 말에 미친 분신은 잠깐 침묵했다·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군· 하지만 왕족에게는 계획이 있네·”
“!”
인타렌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현명한 주인에게는 완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시종장·”
완곡한 거절에 인타렌달스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무례함은 그치고 다시 충성심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이 마법방정식 하나 못 풀면 대체 작년에 뭘 한 거냐? 너도 앞으로 나와!
-워다나즈· 이 자식도 틀렸는데 방금 답 바꿨어!
-너도 앞으로 나와 이 자식아!
“····”
인타렌달스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계획이 있을 것이다·
시종장 본인은 짐작도 가지 않는 대단하고 비범한 계획이···
* * *
툭툭-
“으응···?”
주말이 끝나가는 밤·
침대에 누워 잠들려던 요네르는 개인실 창문을 두드리는 종이 새의 소리에 눈을 떴다·
“···만약 가이난도면 혀 마비의 독약을 식사에 타버리겠어···”
다행히 사촌이 보낸 건 아니었다·
밤 산책 예정· 참가 희망자들은 휴게실로·
-이한
‘훔쳐올 게 또 있었나?’
친구의 종이 새를 받은 요네르는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고 장비를 챙겼다·
1학년 때와 달리 장비가 꽤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적의를 가진 상대를 감지하는 작은 청동 방울 새로 바뀐 지팡이 물약 재료를 발견했을 때 빠르게 확인하기 위한 천칭 저울과 숟가락 원하는 물약을 기화시켜서 안개구름처럼 만들어내는 물약 벨트···
점검을 마친 뒤 요네르는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면서 계속 이번 외출의 목적을 생각해봤지만 짐작가는 게 없었다·
물자도 아직 넉넉했고 시약도 딱히 부족한 게 없었던 것이다·
‘시험 때문인가?’
시험에 관련된 정보를 알아낸 거라면 말이 됐다·
원래 이한이 그런 부분에서 능하지 않았던가·
“아· 요네르·”
“무슨 일이야?”
“우레걸음 교수님이 좀 수상하셔서 확인해보려고·”
이한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요즘 미친 분신이 묘하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가 우레걸음 교수와의 대화였던 것이다·
미친 분신은 에인로가드 학생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무언가 수상하다 싶으면 한밤중에 공방 뒤지러 잠입하는 게 바로 에인로가드 정신이었다·
“이한!”
마침 가이난도도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머리에는 잠옷 모자를 아직 쓰고 있었다·
“가이난도· 잠옷 모자 쓰고 있는데·”
“어? 이거 아티팩트야· 이번에 써보려고·”
“····”
“····”
친구가 칠칠맞게 잠옷 모자를 그대로 쓰고 왔다고 생각한 둘은 깊게 반성했다·
이한은 가이난도에게 물었다·
“이번에 왜 나가는지 알아?”
‘간식 때문이겠지·’
요네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레걸음 교수님이 너 몰래 꾸미는 거 같아서 조사해보려는 거 아니야? 그거 계속 신경 썼었잖아·”
“···?!!!”
사촌의 대답에 요네르는 경악했다·
아니?!
“너··· 너···!”
“??”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간식 때문에 나온 줄 알았는데·”
“간식은 아까 받았어·”
“쉿· 닥쳐·”
이한은 가이난도의 발등을 꾹 밟았다·
하도 징징대서 몰래 하나 줬더니 그걸 바로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 모였으면 가자·”
“다른 애들은?”
“많이 안 필요해서 둘만 불렀어· 우레걸음 교수님 공방에 들어가야 해서 요네르를 불렀고 가이난도는··· 음··· 믿음직스러워서 불렀지·”
‘무조건 올 거 같아서 불렀구나·’
요네르는 친구의 속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셋은 빠르게 탑을 나섰다· 1학년 때부터 워낙 외출에 능했던 만큼 이제 눈 감고도 주변을 다닐 수 있었다·
“잠깐· 죽음의 기사 올 시간이다·”
“소리로 쫓아낼까 불빛으로 쫓아낼까?”
“저번에는 소리로 쫓아냈으니까 불빛으로 쫓아내자고·”
멀리서 불빛이 피어나자 걸어오던 데스 나이트가 다른 쪽을 확인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한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이한·”
“왜?”
“우레걸음 교수님의 공방에는 어떻게 침입할 생각이야?”
가이난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에인로가드 교수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당연히 자신의 탑에 마법적 방비를 충실하게 갖춰놓았다·
지금 보니 몰래 들어가려는 것 같은데 그러면 평소에 쓰던 박살내는 방식도 무리일 거고···
슥-
이한과 요네르는 동시에 열쇠를 하나씩 들어올렸다·
우레걸음 교수의 공방이자 탑인 각수관(角宿館) 열쇠였다·
“···훔 훔친 거야!?”
“아냐· 교수님이 주신 거야· 와서 시약 관리하고 온실 약초 돌보라고·”
“왜 모르툼 교수님은 나한테 저런 열쇠를 안 주셨지?”
가이난도가 투덜거리자 이한은 슬며시 나머지 열쇠 꾸러미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꾸러미에는 흑마법 학파의 공방인 흑암관 열쇠도 검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모르툼 교수님은 의심이 많고 인색하시잖냐·”
“하긴 그것도 그래· 디레트 선배한테도 안 주셨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