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화
‘괜히 걱정했다·’
지젤은 앞으로 워다나즈가 ‘미친 정령하고 엮여서 피곤하다’ ‘미친 악마하고 엮여서 괴롭다’ ‘미친 거인하고 엮여서 짜증난다’같은 말을 하더라도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할 때가 있는 법·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시험을 앞두고 격구 경기 제안을 받으면 ‘이런 난 정말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네 이번만이다’같은 소리를 하면서 일어나지 않던가·
아마 워다나즈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보아하니 이 강의는 배움의 학문을 다루고 있군·”
“?”
미친 분신 앞에 앉은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미친 분신이 읽고 있는 건 <마법대수학과 비전기하학> 관련 책들이었다·
“마법대수학하고 비전기하학···”
“왕족의 시대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다루는 내용에도 꽤나 많은 진전이 있었군·”
“!”
이한은 반색했다·
만약 미친 분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강의에 한해서는 미친 분신이 조금 관대할 수도 있었다·
옛날에는 부르는 명칭도 달랐고 세분화도 되지 않았으며 이후에 발견된 여러 편리한 공식들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이 진도가 나간 상황일 터·
“과연· 그러면 이 강의는 그냥 넘어갈까요?”
“하지만 지나치게 안일한 부분들이 보인다· 배우는 자라면 자신이 다루는 공식을 무작정 외우지 말고 증명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엇·’
이한은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그것은 숙련된 학생으로서 단련된 본능 같은 것이었다·
설마?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라· 왕족의 강론을 시작하겠다·”
“···예···”
친구들을 부르러 가면서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대수학과 비전기하학> 강의가 2학년 강의라서 다행이군·’
같은 고통도 친구들과 나눠서 부담한다면 한결 견딜 만하리라·
···물론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마법사· 막대와 컴퍼스만을 가지고 이 정육면체 성궤를 두 배 크기의 정육면체 성궤로 작도해봐라·”
“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장 선생님 아니 미친 분신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아 있던 가이난도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했다·
“못··· 못 해요!”
“그렇겠지·”
미친 분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제자의 동료들답게 기초적인 부분은 확실히 탄탄한 편이었다·
방금 미친 분신이 물어본 건 애초에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건 비전이나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작도할 수 없는 문제다· 고대 시절부터 유명했던 문제기도 하지· 스물 세 명의 마법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죽기도 했고···”
“와· 너 어떻게 바로 대답했냐?”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살짝 감탄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면 배운 적 있는 문제인 만큼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지만 가이난도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설마 워다나즈의 교육이 드디어 그 빛을 발하는 것일까?
“난 그냥 몰라서 못 한다고 대답한 건데·”
“····”
친구들은 경멸의 시선을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가이난도는 왠지 억울했다·
그냥 모르는 걸 모른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단순히 외우는 것과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마법사라면 당연히 후자가 되어야 할 터· 너희 마법사들은 마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미친 분신의 설명을 경청하던 학생들은 문득 의문이 생겨서 이한에게 물었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왜 부르지?”
“이번 기말고사 주제가 이거야?”
이번 학기 <마법대수학과 비전기하학>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교수가 자리를 비운 탓에 유크벨티레 선배가 대신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유크벨티레 선배의 강의는 예상했던 것보다(정확히는 버 모 교수의 강의보다) 훨씬 멀쩡했다· 교수님이 사라져서 당황했던 학생들도 지금은 다들 적응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미친 분신이 가르치는 내용은 유크벨티레 선배가 최근 다루던 내용과 달랐다·
뭐지?
“어· 아닐걸· 애초에 스승님이 기말고사 주제를 아실 리도 없고·”
“···그런데 이걸 왜 가르치시는 거지?”
“흠· 일리 있는 질문이군·”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한은 손을 들고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이냐·”
“저희 기말고사는 정령다항식 아닌가요? 분명히 진도가 맞다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니·
“안 중요하다는 게 뭐지?”
“시험을 취소한단 거 아닐까?”
“그게 가능해?”
“일단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니까 권한이 있을지도···”
학생들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미친 분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너희 마법사들이 배우는 학문의 근원을 찾아 되새기는 일이다·”
“····”
“····”
“다시 시작하겠다· 비전기하학의 가장 순수하고 예술적인 요소는 직선과 원이다· 뛰어난 마법사들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수많은 천변만화를 그려낼 수 있었지· 그 이후로 많은 도구와 마법 법칙이 발견되었어도 안에 담긴 지혜는 사라지지···”
“워다나즈· 우리 어떡하냐·”
“이거 큰일 난 거 아니야?”
“시끄럽군· 일어나라·”
“!”
수군대던 학생 몇몇이 미친 분신의 지목을 받고 강제로 일어나게 됐다· 그 중에는 가이난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금 말한 작도 문제의 불가능성을 설명해봐라·”
“엇· 그게···”
“마 마법이나 정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게··· 힘든데··· 왜 힘드냐면···”
“방금 말씀하신 걸 해내기 위해서는 무리수를 직선과 원만으로 작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작도 가능한 수들은···”
“!!!!”
좔좔좔 읊어대는 가이난도의 모습에 같이 일어난 친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생들까지 깜짝 놀랐다·
“워다나즈가 가르친 거야?”
“말 말도 안 돼· 저 정도면 바위한테 노래도 가르치겠는데·”
가이난도의 설명이 끝나자 미친 분신이 손을 흔들었다· 일어났던 학생들이 다시 자리에 착석됐다·
“완벽하진 않지만 요체는 이해하고 있군· 이번만 용서해주겠다· 앞으로 왕족의 가르침을 방해한다면 마땅한 처벌이 있을 터· 마법사들은 경각하도록 해라·”
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감사의 인사를 보내면서 수신호로 물었다·
-어떻게 대답한 거야?
가이난도도 마찬가지로 수신호로 대답했다·
-이한이 알려줬어·
-뭐? 어떻게? 그럴 기회가 없었는데?
-일어날 때 염동력으로 종이 쪽지를 손에 붙여주더라·
“····”
학생들은 경탄했다·
늘어나는 건 황자 놈의 마법 실력이 아니라 워다나즈의 마법 실력이었던 것이다·
‘괴물 같은 녀석·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저걸 저렇게···’
‘염동력 마법을 저렇게 섬세하게 다룰 수가 있나?’
‘그걸 떠나서 말하는 동안에도 안 들키게 조절했다는 게 더 놀랍다·’
친구들이 감탄해하고 미친 분신이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이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시험도 나만 다른 시험 보나?’
놀랍게도 <마법대수학과 비전기하학> 강의를 맡은 나이튼 교수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별개의 시험을 보게 하는(정확히는 한 명만) 기발한 교육신념을 가진 마법사였다·
덕분에 이한은 작년부터 혼자서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교수도 학교에 없고 미친 분신도 도와준다고 해서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음·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기도·’
원래라면 시험 부분을 공부했을 시간에 미친 분신의 고대 역사와 비전기하학의 원론 강의를 듣고 있으니 이게 맞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미친 분신이 이한을 불렀다·
“제자 네가 다른 마법사들을 가르쳐야겠다·”
“예?”
“이해를 못하고 있지 않느냐· 왕족의 가르침을 수준에 맞게 해설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고개를 들자 다른 친구들은 퀭하고 처연한 얼굴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친 분신의 질문들이 친구들을 연신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아하· 그게 저군요·”
제자의 대답에 미친 분신은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속으로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나빠진 게 맞군·’
* * *
미친 분신을 섬기는 시종장 인타렌달스는 주인의 명령을 받아 산맥의 공방을 나와 에인로가드로 움직였다·
다행히 해골 교장이 없는 만큼 죽음의 기사들의 눈치도 덜 볼 수 있었다·
해골 교장이 자리에 있었다면 대낮에 본관 근처를 돌아다니는 일 같은 건 전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주인님께서 조금 이상하시지 않은가?’
요즘 인타렌달스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충성심으로 주인을 모신 시종장만이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이었다·
그의 주인이 누구던가·
마법으로 이 세계의 결여를 해결하려던 구도자 아니던가·
물론 불운한 사고로 인해 육신을 잃어버리고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사념체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위대한 대마법사에게 그건 그저 한낱 시련일 뿐이었다·
실제로 지금 상황만 봐도 주인의 비범함이 엿보였다·
강림한지 얼마나 됐다고 의발을 이어받을 제자를 찾아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비범함을 넘어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과감히 마법을 전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주인이 제자를 구하려는 이유도 결국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본인이 달성하기 힘들어진 비원(悲願)을 전수해서 완성하려는 것·
주인을 방해하는 사악한 찌꺼기인 해골 교장이 있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잠잠했는데 왜 주인이 미적거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인님· 상황이 조금 정리된 것 같으니 고위 마법을 전수할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됐다· 기다리도록 해라·
-그러면 소세계를···?
-아니· 그럴 필요 없다·
-???!
-기다리도록 해라· 왕족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인타렌달스는 혹시 저번에 있었던 내면에 있던 사악한 면모가 깨어난 것 때문인가 싶었다·
확실히 놀랍긴 했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거기까지였다·
그 시기나 정도가 예상 밖이었을 뿐 미친 분신 본인도 인타렌달스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육신을 잃어버리고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사념체가 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계속해서 세계로부터 거부를 받고 언제 겁화가 닥쳐올지 모르는 삶·
···그렇다면 더더욱 제자를 채찍질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만약 주인이 역소환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거라면 지금 이 안일한 가르침이 더더욱 이해불가였다·
더욱 거세게 가르쳐야 훗날 주인이 다시 강림했을 때 그 가르침의 후계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느긋한 태도라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타렌달스는 시종장으로서의 본분을 넘어 주제 넘는 충고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 물건들도 지금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에게 전수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인타렌달스가 지금 공방에서 들고 옮기는 것은 미친 분신이 지시한 물건들이었다·
강림 이후 공방을 만들고 주변의 마법을 설치하기 위해 모았던 시약과 재료들·
그리고 미친 분신이 쓴 몇 권의 책들·
분명 값진 물건들이었지만 지금 느긋해진 제자한테 굳이 줘봤자 더 방만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상하군··· 분명 왕족이 직접 가르쳤는데도 남은 분량이 더 늘어나다니?”
“스승님께서 시험에 안 나오는 내용을 자꾸 추가하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
눈앞의 광경을 목격한 인타렌달스는 기절할 뻔했다·
지금 저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