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화
-지나치게 잔혹하군!
이한이 고자질한 덕분에 미친 분신이 밀랍 메모장을 모조리 압수해버리자 서리거인들은 불만을 토했다·
물론 미친 분신한테 말하지는 못했다· 자기들끼리만 나눴다·
-예로부터 현명한 왕은 백성을 탄압하지 않고 신하를 억압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조용히·”
서리거인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입을 다물자 캐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먼저 내 제안부터 말씀드리겠소· 여기 마법사들의 자격을 증명해 줄 시련이 필요한데 그 시련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원하오·”
선배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움찔했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강렬하게 말했다·
‘거절해!’
‘거절하라고!’
명예롭고 자긍심 높은 종족이 무슨 마법학교 학생 시험을 돕는단 말인가·
그건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고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마땅히 거절해야 했다·
-···알겠다· 도와주도록 하지·
“!!!!”
그러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학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서리거인들은 훨씬 더 미친 분신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캐튼은 밝은 얼굴로 외쳤다·
“후배님들! 참으로 잘 됐소! 거인들이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이야! 잉걸델 교수님도 기뻐할 것이오!”
“와···”
“후··· 신납니다···”
이한과 지젤은 가식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캐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쁘지 않소?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드는데···”
“아닙니다· 기쁩니다· 하하·”
“정말 기쁘네요· ···워다나즈 아까 그 술통에 든 독 남아 있어?”
“젠장· 아까 버리지 말걸·”
이한과 지젤은 깊게 한탄했다·
서리거인과 또 싸울 줄 알았다면 그 독주를 버리지 않았을 텐데!
“혹시 검만 갖고서 상대하게 하진 않으시겠지? 마법도 허락해주시겠지?”
“아마 그럴 거 같긴 한데 이미 서리거인을 시험으로 낸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서·”
둘이 속삭이는 사이 미친 분신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서둘러라· 뭐하고 있느냐·”
제자가 서리거인의 유물을 찾는 대신 쓸데없는 대화만 나누고 있으니 미친 분신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것도 당연했다·
서리거인과 상대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부산을 떤단 말인가·
아직도 품위 관해서는 갈 길이 먼 제자였다·
이한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서리거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제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말하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기회를 봐서 서리거인의 유물을 회수할 생각을 했지(정확히는 훔치려고 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리거인들 앞에서 대놓고 말해도 되나?
-무슨 제안인가? 빨리 말해라·
“그만 질질 끌고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서리거인은 물론이고 미친 분신까지 이한을 재촉했다·
둘러대거나 피할 말을 찾지 못한 이한은 결국 솔직하게 실토했다·
“···여러분들이 찾으러 오신 유물을 손에 넣으러 왔습니다만···”
“····”
뒤에 있던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워다나즈가 당당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존경스럽다 워다나즈!’
‘서리거인들 앞에서 저렇게 말할 줄이야···!’
살기등등한 거인들 앞에서 ‘너희 유물을 손에 넣으러 왔다’라고 말할 줄이야·
아무리 광기로 번뜩이는 워다나즈라 하더라도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서리거인들도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한의 옆에는 미친 분신이 있었다·
“제자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대답해라!”
-알 알겠다· 유물을 가져가도 좋다·
미친 분신에게 겁먹은 서리거인들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저게 통한다고?!’
‘그렇구나 워다나즈 녀석· 처음부터 교장 선생님의 분신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거야! 무시무시한 녀석 같으니!’
에인로가드의 역사가 아무리 길다지만 그 중에 해골 교장의 분신까지 이렇게 알뜰하게 이용해먹은 학생은 분명 워다나즈가 처음일 것 같았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친구의 교활한 음모에 전율했다·
물론 전율하고 있는 건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쉽게?’
아무리 겁을 먹은 서리거인들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저항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순히 내놓다니·
혹시 여기서 더 많은 걸 얻어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앞으로 제게 쓸데없이 대결 신청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십시오·”
-그건··· 알겠다· 맹세하겠다·
“근처에서 다 들리게 투덜대는 것도 안 됩니다· 맹세해주십시오·”
서리거인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 도전자가 그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단 말인가?
‘마법인가?’
-···맹세하겠···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친 분신이 입을 열자 이한은 아차 싶었다·
스승의 권위를 빌려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됐다· 왕족이 정리해주도록 하마· 여기 있는 서리거인들을 부하로 부리고 싶은 거겠지·”
“예··· 예???!”
무심코 대답하던 이한은 깜짝 놀라 외쳤다·
뭐라고?
“아닙니···”
이한은 그냥 앞으로 차원을 방문할 때 멀리서 대결하자고 쫓아오는 거인들과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차원을 방문할 때마다 거인들이 부하를 자처하면서 우르르 몰려오는 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친 분신은 사려 깊은 스승답게 제자 본인도 모르는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다·
저렇게 말을 돌려서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너희 서리거인들은 과거에 왕족에게 진 빚이 있다· 그 빚을 지금 여기서 갚아라·”
-으윽··· 알겠다· 맹세하겠다···
“····”
이한이 끼어들 틈도 없이 서리거인들은 맹세를 끝내버렸다·
앞으로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면 명예를 걸고 달려와서 싸워주겠다고!
“와· 워다나즈· 유물 회수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서리거인들을 이후에 부하처럼 부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
“···조용히 하지 못해?”
“왜 왜 화를 내?!”
감탄 한 마디 했다가 친구가 벌컥 화를 내자 불운한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당황했다·
내가 뭘 했다고?!
* * *
에인로가드 도서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도서관에는 각 탑의 2학년 학생들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서로 다른 탑 학생들이 이렇게 모이는 일은 에인로가드에서 매우 드문 편·
하지만 2학년 학생들은 이제와서 그런 점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점에 주목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야· 워다나즈 뒤를 저주 받은 망령처럼 따라다닌다고 하더라고·”
“아니· 그건 나도 들어서 알아· 저 옆에서 망치 두드리는 놈들 뭐냐고·”
“아·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어디서 광석 구했나봐· 그래서 장비 만든다고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도서관에서 저래도 돼?”
다른 탑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든 말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풀무질을 하고 망치를 두드렸다·
애초에 에인로가드 도서관은 침묵과 평화의 장소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저번에 임시 요새 만들어서 생존 투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무슨!
“로웨나· 검은 어때?”
“이 정도면 아주 쓸만할 것 같습니다· 오늘 세 자루는 더 만들 수 있겠군요·”
“후후· 그 고생을 해서 얻은 보람이 있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다른 차원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생을 한 만큼 완성된 장비는 더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워다나즈· 고맙···”
차원 방문을 도와준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멈칫했다·
누가 봐도 워다나즈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보였던 것이다·
저번에 차원에서 돌아오면서도 저랬던 것 같은데···?
“워다나즈가 왜 저러지?”
모두 의아해하는 사이 바트렉이 설득력 있는 가설을 내놓았다·
“지금 시험 준비해야 하는데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고 어려워서 아닌가?”
“과연·”
현재 도서관에 여러 탑 학생들이 모인 이유는 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워다나즈도 에인로가드 학생인 이상 그 준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듣는 강의의 숫자와 난이도를 생각해봤을 때 기분이 안 나빠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생각에는 몇몇 놈들이 징벌방에 가서 그런 것 같은데·”
평소에는 말이 그리 많지 않은 라파드엘이었지만 이번에는 드물게 의견을 내놓았다·
확실히 이것도 그럴듯했다·
몇몇 놈들이 사고를 쳐서 징벌방에 간 탓에 안 보이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근데 징벌방 갔다고 워다나즈 기분이 나빠지는 게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물었다·
흰 호랑이 탑 담당 교수도 아니고 워다나즈가 왜?
그러나 이미 적응이 끝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뭐가 이상해? 원래 그랬잖아·”
“맞아· 징벌방 간 놈들이 나쁜 거지·”
“···듣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모라디· 워다나즈가 징벌방에 간 놈들 때문에 화난 건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런 부분에서 믿음직한 친구를 불렀다·
지나가던 지젤은 ‘공부나 할 것이지 별 쓸데없는 대화는 더럽게 많이 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번에 서리거인들 때문에 화난 거겠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했는데 강제로 엮인 셈이잖아·”
“어?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거인들을 만났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것 같은데···”
“동시에 맹세하지 않은 다른 서리거인들하고도 엮일 수 있다는 소리지· 얼마나 성가시겠어·”
“하지만 워다나즈는 이미 뒤쪽 산맥의 거인들하고도 친하게 지내잖아? 서리거인이 추가된다고 뭐 달라질 게 있어?”
“····”
지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설마 이렇게 날카로운 논리가 날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워다나즈한테 가서 따지고 오면 되겠네·”
“아 아니· 그건 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서리거인들하고 엮여서 화가 난 친구한테 ‘넌 거인들하고 원래 친했잖아’라고 말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이한은 금속으로 된 목에 걸 수 있는 로켓 크기의 작은 술통을 가볍게 지팡이로 두드렸다·
‘역시 안 되는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번뜩이는 가설을 내놓았지만 그 중 정답은 없었다·
이한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서리거인의 유물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다· 이 술이다· 우린 이 술을 찾으러 온 거다·
-···아까처럼 독이 든 술입니까?
-그것보다 훨씬 귀한 게 들었지· 바로 지혜다!
-!!!
서리거인의 설명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지혜가 담긴 술이라니·
에인로가드 학생들이라면 누구든 지능 상승 물약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그건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저번처럼 광기에 찬 예언가가 되는 실패작이 아닌 진정한 지혜의 물약·
서리거인의 유물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열 수 있습니까?
-그건 우리도 모른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다·
-····
주먹 크기도 되지 않는 작은 술통은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흔들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한이 아무리 마력을 때려 넣어도 정교하게 분산시켰다·
‘젠장· 마력 망치까지 계산해서 만드는 놈이 있다니!’
유물 제작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낭비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다나즈· 서리거인들 때문이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응?”
지젤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이한은 당황했다·
“차원은 넓고 서리거인을 다시 만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어··· 고맙다· 근데 왜 갑자기?”
“?”
지젤은 멈칫했다·
서리거인들 때문이 아니었나?
“이쪽으로 와라· 오늘 <마법대수학과 비전기하학>을 끝내도록 하겠다·”
뒤에서 미친 분신이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제시하자 이한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뭐야· 정말 서리거인 때문이 아니었군·’
하긴 생각해보니 워다나즈는 예전부터 거인들과 사이가 좋았다·
서리거인들도 따지고 보면 거인들이니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