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8화
캐튼이 후배의 말에 당황해하는 사이 서리거인은 이어서 설명했다·
-이 대결은 전사가 완력과 마력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증명하는 대결이다·
“과연· 알겠습니다·”
이한은 신중하게 반응했다·
일단 저 빙하의 얼음을 봤을 때 마력으로 녹일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이한에게 유리한 요소였다·
최근에 오리하르콘 관련해서 마력을 활용했던 경험도 있었으니 이것도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더 유리한 대결이 나올지도 모른다·’
괜히 골랐다가 뒤에 더 유리한 대결이 나온다면 낭패였다· 이한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다음 대결은 이거다·
쿵!
“···?”
서리거인은 옆에 쓰러진 동료를 질질 끌고 오더니 쿵 하고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종목에 이한과 지젤은 경악했다·
저게 대체 무슨 대결이지?
-이 녀석의 머리를 세게 두드려서 깨우는 거다·
“···제가 서리거인의 신체적 구조에 대해 잘 모르긴 합니다만 이 상태에서 머리를 세게 두드리면 영원히 잠들 것 같습니다·”
-하하하! 도전자·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이 투구는 마법의 투구다·
서리거인은 이한의 말에 웃으며 쓰러진 동료의 투구를 가리켰다·
놀랍게도 투구에서는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한이 마력을 감지하는 재능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듣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대단하다· 서리거인의 마법이라 구조가 독특해서 그런가? 그걸 감안해도 비범한데·’
저런 식으로 외부에 마법을 숨길 수 있는 투구라면 평범한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모든 충격을 막아주는 무적의 투구지·
“···아까 쓰러졌잖습니까?”
-얼굴을 때렸잖나· 무적의 투구도 감싸지 못한 부분까지 막아주지는 못하지·
서리거인은 참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럼 얼굴을 때려서 깨우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체? 쓰러진 전사의 약점을 때리면 영원히 잠들 수 있다· 당연히 투구 위를 때려야지·
“무적의 투구라고 하셨···”
-무적의 투구지만 아주 세게 때리면 충격이 있다· 바로 그걸 시험하는 대결이지·
“····”
이한은 앞으로 서리거인들이 무슨 말을 하면 절반 정도는 허풍이라고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적의 투구치고는 별로 무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투구 위로 충격을 가해서 상대를 죽·· 아니 깨우는 대결인가·’
이 대결도 이한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
저 투구는 마법으로 충격을 막아주는 만큼 마법 자체를 깨뜨린다면 그 기능이 사라졌다·
아무리 서리거인의 마법이라 하더라도 발도르오른의 마력 망치를 휘두른다면 잠시나마 정지시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저 투구가 마력 망치를 대비해서 별개의 마법 구조를 갖춰놓은 것 같지는 않다· 통할 가능성이 높아·’
“후배님·”
“?”
캐튼이 어느새 뒤편에 다가와 있었다·
수인족 선배는 걱정된다는 듯이 속삭였다·
“괜찮겠소? 지금이라도 신호만 준다면···”
“아· 아직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
캐튼은 크게 놀랐다·
혹시라도 지젤 후배가 착각했을까봐 직접 확인하러 왔는데 이한도 똑같은 대답을 할 줄이야?
“혹시 다른 대결도 있습니까?”
-그렇다· 마지막 대결은 아주 즐거운 대결이지· 독주(毒酒)를 마시는 대결이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시는 대결은 꼭 서리거인들만의 풍습은 아니었다·
당장 제국 곳곳에서도 저런 풍습을 찾아볼 수 있었고 거인이나 드워프들도 좋아했···
-마법으로 만든 독이 든 술이지·
“···예?”
이한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그러나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서리거인은 커다란 술통을 갖고 오더니 말했다·
-우리 주술사가 만든 독을 듬뿍 넣은 술이다· 전사가 얼마나 튼튼한지 증명하고 싶다면 이 술을 들이붓곤 하지·
서리거인들은 독한 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독을 넣은 술을 즐기곤 했다·
가끔 마시다가 진짜로 죽는 거인도 나오긴 했지만 그건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사망자가 나온다고 싸움을 멈출 거인은 없었다·
캐튼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결심을 내렸다·
“검을 뽑겠소· 후배님·”
“행운이 따르네요· 아주 잘 됐습니다·”
“?!?!!”
캐튼은 기뻐하는 흰 호랑이 탑 후배를 경악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혹시 워다나즈하고 사이가 안 좋기라도 한 것일까?
‘분명 친해 보였는데···’
* * *
대결은 당연히 세 번째 승부를 고른 이한의 승리로 끝났다·
-크어어어어억···
“····”
그러나 이한은 이겨놓고서도 기뻐하지 못했다·
쓰러진 거인이 둘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독 독을 너무 많이 마셨···
“그쪽이 쓰러지면 누가 제 명예를 보장해준단 말입니까! 선배님· 혹시 이 독주를 해독할 방법을 아십니까?”
“후배님·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소·”
캐튼은 당당하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야·’
“나도 저 술은 처음 봐· 워다나즈· 애초에 서리거인의 독이잖아·”
“혹시 모라디 가문이 서리거인하고 싸운 적은 없고?”
“모든 가문이 다 외차원의 괴물들하고 투쟁하는 건 아니거든·”
지젤과 다퉈봤자 해결이 되진 않았다· 이한은 포기하고 방법을 바꿨다·
고나달테스의 영락!
상대의 상태 이상을 자신한테 옮겨오는 이 기묘한 마법은 평상시라면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중독 정도는 얼마든지 가져와도 별 상관이 없는 만큼···
-커헉!
중독 때문에 안색이 어두워지던 서리거인이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내 내가 졌단 말인가?
“예·”
-기억이 안 난다! 인정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대결을···
스륵-
캐튼이 서리거인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서리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청한다면 그건 전사로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겠지· 도전자의 명예를 내 이름으로 보장해주겠다· “고맙습니다!”
서리거인은 옆에 널브러진 투구 쓴 동료를 깨웠다·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대결 한 번으로 명예를 결정짓다니· 두 번이나 세 번이 뭐 그리 나쁘단 말인가?
“····”
“····”
투구 쓴 서리거인은 뒤늦게 깨어나더니 외쳤다·
-몽둥이가 아니라 주먹을 휘둘렀어야 했··· 어떻게 됐나!?
-도전자는 시험을 통과했다· 내가 명예를 보장해주기로 했지·
-이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 그럴 거면 나한테 넘겼어야 했다! 네놈이 우리 모두의 명예를 앗아갔어!
-흥· 그럼 먼저 대결하지 그랬나·
회복한 서리거인들은 자기들끼리 날 선 대화를 으르렁거리며 주고받았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자 힐끔힐끔 이한을 쳐다보았다·
-대결 한 번 더 하면 왕에게 인정받은 도전자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말해서 대결 한 번은 너무 적지 않나? 진정한 명예는 여러 번의 대결로 만들어지는 법인데···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어?”
지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겉모습은 위풍당당한 전사 종족 그 자체였는데 하는 짓은 에인로가드 산맥에 사는 거인들보다 쪼잔했다·
졌으면 진 거지 자꾸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아 대결 한 번은 너무 적다’ ‘대결 더 했으면 좋겠다’ 같은 식으로 질척대다니·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욕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방인!
서리거인들은 찔렸는지 더 이상 질척대지 않고 길을 안내했다·
골짜기 안쪽에 위치한 눈과 얼음으로 된 요새에서 머무르고 있던 다른 서리거인들은 방문자를 보고 의아함을 표했다·
-누구지? 다른 차원의 이방인이 여기는 무슨 일로?
-그 왕에게 인정받은 명예로운 도전자다·
-뭐!? 그렇다면 그 명예는 내가···
-이미 끝났다· 내가 도전하고 패했고 더 이상의 도전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네놈이 뭔데!
서리거인들은 우르르 몰려나와서 동료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 욕심 많은 자 때문에 위대한 명예의 기회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아쉬운 건 이해가 갑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다들 포기하시고···”
이한의 말에도 서리거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한 명이 중얼거렸다·
-약속한 놈이 사라지면 초기화되는 것 아닌가? 다시 대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잠깐 이쪽으로 와보겠나?
-감히?! 절대 날 없앨 순 없을 거다!
동료들에게 끌려가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서리거인은 격노해서 외쳤다·
그러나 다른 서리거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왕에게 인정받을 명예의 기회가 그냥 사라진 만큼 이 이기적인 동료를 치워버려서라도 다시 얻고 싶어 했다·
“거기까지다· 쓰레기 같은 놈들· 아직도 하잘것없는 일들로 다투고 있단 말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인간 마법사의 목소리에 서리거인들은 분노를 드러냈다·
아무리 몇몇 이들이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온 이방인들이 멋대로 모욕해도 될 만큼 서리거인은 자비로운 종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자가 감히··· 헉! 고나달테스!
-고 고나달테스다!
-고나달테스라고???
분노를 터뜨리려던 서리거인들은 뒤의 마법사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서리거인들이 아무리 다른 종족의 생김새를 구분하는 데에 둔하다지만 저 생김새는 잊을 수가 없었다·
거인족의 악몽 고나달테스!
바로 그 마법사가 하인 무리를 데리고 골짜기 입구에 서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로?
“왕족의 제자가 사절로 방문했는데 지나치게 오래 걸리더군·”
미친 분신 뒤에 따라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교장의 분신이 위험한 대마법사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들 편에 있는 대마법사였다·
‘저 서리거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세요!’
-고나달테스의 제자였다고?!
“한 번·”
-?
“한 번 자비를 베풀었다· 두 번째는 없을 테니 그 혀를 잘 간수하도록·”
서리거인들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마법사의 제자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결 다 끝나고 늦게 온 미친 분신이 조금 얄밉긴 했지만 이제라도 온 게 어딘가 싶었다·
덕분에 계속 질척대려던 서리거인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예전에 거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먼 고대 시절 젊은 해골 교장이 거인부터 악마들까지 두들겨 패던 건 이한도 봤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저리 겁을 먹을 줄이야· 심지어 다른 차원의 종족인데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들 이제 명예니 승부니 그만 집착합시다! 마땅히 본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한은 재빨리 외쳤다·
서리거인들이 겁을 먹었을 때 확실히 못을 박고 다시는 이야기 못하게 만들어놔야 했다·
-알겠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대신 잠깐만 기다려라·
서리거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더니 각자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밀랍으로 된 메모장이었다·
커다란 손으로 끼적거리는 모습에 이한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한은 아까 가장 먼저 쓰러진 투구 쓴 서리거인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다들 뭘 적으시는 겁니까?”
-도전자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건가?
“···서리거인 글자를 모르는 거지 다른 건 읽을 줄 압니다·”
-글자는 배워놓는 게 좋다·
1개 언어 사용자가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자 괜히 얄미웠다·
하지만 이한은 인내했다·
“그래서 무슨 뜻입니까?”
-이건 ‘왕에게 인정받은 명예로운 도전자’라는 뜻이다· 도전자 너를 칭하는 수식어지·
“···그 밑은요?”
-그 밑은 ‘마법사 고나달테스의 제자’라는 뜻이다· 이 또한 도전자 너를 칭하는 수식어다·
“그러면 마지막 줄은 뭡니까?”
-절대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명예를 두 개나 갖고 있으니 가장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리거인들에게서 문자를 압수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