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7화
“그건 무리요· 우리의 차원은 광대하고 마법사의 숫자는 끝이 없소· 그런 마법사를 어떻게 찾는단 말이오?”
캐튼은 어이없다는 듯이 따졌다·
설마 뒤의 후배 중에 범인이 있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으리라·
서리거인은 캐튼의 건방진 태도에도 바로 무기를 뽑지 않았다·
비범한 전사는 존중 받을 자격이 있는 법·
-너희의 차원 전체를 뒤지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분명 그 마법사는 아직 이 차원에 남아있을 터· 여기 차원은 다른 차원에 비하면 그 넓이가 협소한 편이니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소· 그 마법사가 차원에 남아 있다는 건 어떻게 안단 말이오?”
캐튼은 다시 물었다·
위치를 찾았다면 서리거인들이 직접 움직였을 터·
그러지 않고 저렇게 지시를 내리는 걸 보면 상대의 위치를 아직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 차원에 남아있을 거라고 확신한다니·
-전사여· 잘 생각해보라· 왕에게 인정 받은 도전자가 차원에 방문할 이유가 무엇이겠나·
지젤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교수님이 시켜서·”
“쉿· 조용히 해·”
다행히 둘은 듣지 못했다· 서리거인은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담아 말을 이어나갔다·
-그 도전자 또한 우리가 찾는 유물을 탐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유물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아직까지 차원에 남아있겠지· 나는 느낄 수 있다· 놈이 이 차원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
이한은 상대한테 치유 마법사나 만나보라고 하고 싶었다·
대체 있지도 않은 적의 기척을 어디서 느꼈단 말인가?
그러나 캐튼은 서리거인의 말에 넘어간 표정이었다·
“과연··· 그대들 정도의 강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말이 되는군·”
‘말 안 됩니다·’
-바로 그렇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인들도 계속해서 느끼고 있지· 차원 어딘가에 있는 놈의 기척을 말이야·
‘단체로 치유 마법사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두 후배의 비관적인 생각과 별개로 캐튼은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알겠소· 내가 직접 찾아보겠소· 하지만 명심하시오· 그 자가 탐욕스럽고 사악한 이유로 유물을 탐냈다면 그대들에게 위치를 알려주겠지만 이유가 정당하다면 나는 침묵할 것이오·”
-하! 과연 전사답군·
“난 마법사요·”
-···뭐? 마법사였다고!?
“아까도 말했잖소? 마법사 셋이라고·”
-뒤에 다른 마법사 한 명이 더 있다는 뜻인 줄 알았다·
서리거인은 혼란스러워했다·
누가 봐도 전사인데??
뒤의 둘은 확실히 마법사가 맞았다· 단련된 자세와는 별개로 마법사 특유의 분위기가 풍겼던 것이다·
그러나 캐튼한테서는 마법의 냄새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건 순수한 전사의 풍모였다·
캐튼은 서리거인에게 일갈했다·
“그대들처럼 강력한 종족이 선입견에 넘어가다니· 반성하시오!”
-그··· 그런··· 정말 마법사라고? 내가 틀렸단 말인가?
충격에 빠져서 중얼거리는 서리거인을 내버려두고 캐튼은 후배들과 함께 돌아나왔다·
“서리거인들은 강하지만 교만함이 눈을 가리고 있소· 후배님들· 만약 상대하게 된다면 이 점을 노려야 할 것이오·”
‘딱히 교만해서 착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후배 둘이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캐튼은 계속해서 말했다·
“일단 서리거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저 마법사를 먼저 찾아봐야겠소· 흐음··· 어떤 마법사인지 궁금하군· 그들의 왕에게 인정 받고 또 유물까지 탐내고 있다니· 사악한 마법사가 아닐까 걱정이오·”
캐튼의 걱정에는 일리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서리거인의 왕은 난폭하고 강대한 존재·
선한 마법사라면 굳이 이런 존재를 만나서 도전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추가로 서리거인의 유물까지 손에 넣으려고 하는 이상 더더욱···
“···선배님· 그거 사실 접니다·”
“?”
캐튼은 귀를 쫑긋거렸다·
후배의 말이 마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배님·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오· 방금 뭐라고 하셨소?”
“서리거인들이 찾는 게 접니다···”
이한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작년에 정말 재수 없게 서리거인의 왕과 대면했는데 그 뒤로 계속 서리거인들이 재수 없게 굴고 있다고···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했는지 보다 못한 지젤이 나서서 변호해줄 정도였다·
“워다나즈 잘못이 아닙니다· 선배님· 서리거인들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잘못했다는 게 아니오· 후배님· 잠깐 그럼 유물은 왜?”
“서리거인들도 훔친 유물이라서요·”
이한은 같은 가문의 형인 아르실이 주고 간 임무를 설명했다·
서리거인들이 찾고 있는 유물은 원래 거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훔친 물건인 만큼 이한은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로서 정당하게 회수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음· 약간 개소리처럼 들리는데·’
이한은 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아르실이야 개소리를 해도 다른 정령들이 맞다고 간신배처럼 행동해줬지만 이한은 달랐다·
개소리를 하면 한 대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리거인도 훔친 유물이면 원래 주인이 나서야지 왜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가 나서냐고 캐튼이 말한다면?
“과연· 그렇다면 후배님에게 정당한 자격이 있는 게 맞소·”
“···선배님!”
이한은 감격했다·
같은 에인로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캐튼이 이한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겠소· 후배님들·”
“뭐죠?”
“서리거인들을 베어버리고 힘으로···”
“그 전에 스승님한테 보고 좀 하겠습니다·”
이한은 재빨리 캐튼을 말렸다·
귀여운 겉모습 때문에 착각하기 쉬웠지만 애초에 <수인 인성-귀여움 반비례 가설>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잊으면 안 됐다·
이 선배 또한 수틀리면 바로 검을 뽑아들 수 있는 에인로가드의 광인인 것이다!
* * *
“서리거인들이 축객했단 말이냐?”
보고를 들은 미친 분신의 반응은 이한의 예상과는 달랐다·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감히 왕족의 이름을 짊어지고 찾아간 사자를 돌려보내다니· 거인 놈들이 시간에 취해 돌아버린 모양이구나· 누가 목줄을 쥐었는지 알려줘야겠다· 준비해라!”
추상같은 명령에 이한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스승님· 스승님의 신분은 딱히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
미친 분신은 제자의 말에 멈칫했다·
스승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서리거인들과 대화를 나눴다니·
“그럼 무슨 자격으로 서리거인들과 대화를 나눴단 말이냐?”
“···그러니까 제가 예전에 서리거인들의 왕하고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만···”
“····”
갑자기 다른 소리를 하는 제자의 모습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미친 분신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제자와 쌓은 친분이 미친 분신에게도 참을성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반강제로 도전하게 됐는데 이게 서리거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는지···”
“그렇군·”
미친 분신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왕족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도전자로서 먼저 제안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서리거인들은 난폭하고 호전적인 종족인 만큼 저런 사정이 있었다면 설명이 됐다·
제자는 분명 왕족의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제안을 받았을 것이다·
서리거인 왕에게 인정 받은 도전자로서 명예를 짊어지고 결투하자고!
“숨겼습니다만···”
“뭐?”
“그··· 도전자인 걸 숨겼습니다·”
“···어째서냐?”
“뛰어난 마법사라면 자신의 정체를 섣불리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합···”
미친 분신은 손을 뻗어 제자의 개소리를 막았다· 더 들어봤자 시간 낭비였다·
“가서 정체를 밝히고 당당히 대결해서 승리해라· 그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도록·”
대마법사는 실로 지혜로웠다·
명령을 내린 뒤에도 제자가 투덜거리거나 변명할 걸 예상했는지 바로 손을 휘둘러 땅을 밀어내버렸다·
이한이 반론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절벽 아래에 도착한 뒤였다·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멀리서 제자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돌아왔지만 미친 분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 *
-과연 도전자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한낱 나약한 필멸자가?
-나는 그 전사를 믿는다· 놈은 약한 종족이지만 우리 거인의 영혼을 닮은 눈빛을 가졌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이야! 정말 궁금하군·
서리거인들은 아까 찾아온 수인족 전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떠들었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서리거인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왕이 선사한 돌을 지팡이 끝에 박은 마법사였다·
-!!!!
-설마!
“저를 찾는다고 들었습···”
이한은 최대한 당당한 척 외치려고 했다·
굳이 몰래 숨어다녔다고 하거나 피해다녔다고 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제발로 직접 찾아온 도전자처럼 보여야 한다!
퍽!
서리거인 전사는 옆에 있던 동료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동료는 벽에 세워 둔 몽둥이를 집어 들려고 팔을 뻗었지만 조금 늦어버렸다· 그 대가로 동료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
지젤은 깜짝 놀라서 캐튼에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거죠?”
“에인로가드 학생들도 종종 저러지 않소?”
“그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대답에 의아해하던 지젤은 뒤늦게 깨달았다·
동료를 쓰러뜨린 서리거인이 환호한 것이다·
-이로써 도전자의 명예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됐다!
“····”
이한과 대결하는 명예를 혼자 누리고 싶었기에 동료부터 쓰러뜨린 것이다·
지젤은 그 모습에 경악하면서도 낯익음을 느꼈다· 실제로 에인로가드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도전자! 너를 찾고 있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유물을 노리고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 마법을 갈고 닦기 위해 혼자서 수련하고 있었을 뿐!”
-그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니 이 자식들이·’
분명 이한이 어딘가에 숨어서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뻔뻔하게 우겨놓고 이제와서 ‘그건 별로 안 중요해’라고 말하는 서리거인들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같은 거인들 아니랄까봐 뻔뻔한 점은 서로 비슷했다·
-도전자· 나는 왕에게 인정받은 명예로운 도전자를 쓰러뜨렸다는 명예를 원한다!
“···저는 인정을 원합니다· 제가 이기면 더 이상 대결을 요청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이름을 걸고 다른 거인들에게 제 명예를 보장해주셔야 합니다·”
-좋다!
서리거인은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다른 놈들이 대결 못하는 건 거인이 알 바 아니었다· 이런 명예는 원래 선착순이었다·
도전자의 명예를 갖고 싶었다면 여기 있었으면 될 일 아닌가?
뒤에서 캐튼이 작게 말했다·
“정확히 어떤 대결일 때 나서야 하오 후배님?”
“저도 들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워다나즈 힘으로는 힘들 것 같은 대결일 때···”
아무리 미친 분신이 시켰다 하더라도 이한이 무작정 들이받을 정도로 거인 같은 마법사는 아니었다·
당연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뒀고 그 안전장치가 뒤의 둘이었다·
대결의 종류에 따라 안 되겠다 싶으면 나서서 깽판을 친다!
-도전자· 내가 대결을 제시할 테니 너는 그 중에서 고르도록 해라· 먼저 저 빙하를 봐라!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서리거인들이 머무르는 골짜기 옆의 빙하는 차원의 마력이 엉킨 얼음이라 자연적으로는 녹지 않았다·
이런 얼음은 마법으로 풀거나 거대한 마력으로 안의 구조를 흩뜨려서 녹여야 했다·
-빙하 안에 흰 꽃이 있다· 저 흰 꽃을 누가 먼저 갖고 오는지의 승부다·
“나서야겠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자 캐튼이 바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지젤은 약간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저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