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5화
제자의 대답에 미친 분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팔고(八苦)를 마법으로 지워버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처럼 한정된 시간 안에 제자에게 의발을 전수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 난항 속에서 제자의 의젓함이 그나마 등불처럼 빛났다· 철없이 굴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잘 생각했군· 그러면 출발하도록 하지· 마법사 너는 짐꾼을 맡도록·”
“죄송합니다· 짐은 제가 들 테니 신경 쓰지 마시죠·”
이한은 스승의 말에 대신 사과했다· 캐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짐은 더 튼튼한 사람이 들면 되는 거요· 후배님·”
‘그럼 스승님이 들어야 하지 않나?’
물론 아무리 미친 분신의 기분이 좋다 하더라도 이한이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지팡이를 흔들어 스켈레톤 골렘을 불러왔다· 중형급의 이 소환수는 그 덩치 덕분에 짐꾼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그만큼 마력 소모도 심하긴 했지만···
“자· 그럼 가시죠!”
“·····”
“선배님?”
“아· 미안하오· 저 소환수가 참 멋있어서··· 혹시 나중에 배울 수 있겠소?”
“···스승님! 차원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이한은 재빨리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 * *
“음· 모라디· 슬슬 기말고사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
지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같은 탑 학생들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피곤해서 환청을 듣는 건가? 믿기지가 않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 모라디·”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1학년 때 죽어라 공부를 피하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2학년이 되고 중간고사까지 겪고 나자 슬슬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현실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시험이란 건 평소부터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일주일 전에 급하게 준비하는 게 아닌 최소한 2 3주일 전부터 준비해야하는 것 아닐까??
사실 학기 시작부터 시험을 대비했던 워다나즈가 정상이고 그들이 비정상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중간고사 전에 중간고사를 끝내는 워다나즈가 정상이었을지도···”
“그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정신 차려·”
지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지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피로와 압박감 때문인지 지능이 살짝 내려간 것 같았다·
아무리 양보해도 중간고사 시작 전에 중간고사를 미리 다 끝내버리는 건 비정상이 맞았다· 선배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기말고사 준비를 미리 시작하고 싶다고? 와· 대단한데· 너희들이 이런 소리를 할 날이 올 줄이야·”
“미안하다니까···”
“그런 자식들이 격구를 하러 가?”
“우 우린 징벌방은 안 갔잖아·”
지젤은 ‘자랑이다 이 새끼들아’하는 눈빛으로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현재 흰 호랑이 탑의 앙 모 학생은 격구 경기 보겠다고 탈주했다가 징벌방에 끌려간 상태였다·
격구를 사랑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낭만적이고 전설적인 일화로 남았지만 지젤 앞에서는 탑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 개짓거리일 뿐이었다·
“이깟 공놀이 제국법으로 금지했어야 했어·”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너도 솔직히 좋아하잖아 모라디!”
“안 좋아하는데·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격구채 부러뜨린다고 했지·”
지젤은 지긋지긋함을 꾹 참고 으르렁댔다·
기본적으로 기사 가문 출신들은 다른 사람이 격구를 안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걸 볼 때마다 지젤은 한 대씩 패서 상상력을 넓혀주고 싶었다·
그놈의 공놀이!
“어쨌든 기말고사 이야기는 접수했어· 너희들이 꺼낸 이야기 중 가장 기특하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네·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즉시 시작하자고·”
“바로?”
“바로·”
“···조금 더 늦게 시작해도 되지 않··· 아 아니야! 바로 시작하자!”
지젤이 한 대 칠 것 같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바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거대한 광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리강철의 원석이 광맥 곳곳에 가득히 박혀 있었다·
‘이번 주 안에는 다 캐내고 싶은데·’
요즘 지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다른 차원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고대 유물과 소환 마법의 비극적 역사> 강의 시간에 주어진 차원을 더 탐사하다가 우연히 서리강철의 원석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다른 탑 학생들에게 서리강철은 딱히 매력적인 재료가 아니었다·
이 금속의 특성은 마력을 머금으면 예리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었는데 에인로가드 학생이 굳이 이런 걸 쓸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사 가문 출신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안 그래도 아끼는 무기와 갑옷을 다 놓고 들어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저렇게 쓸만한 금속도 드물었던 것이다·
최고의 걸작은 아니더라도 학교 다니는 동안 휘두를 검 한 자루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이제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2학년이라 어느 정도 관록이 붙어 손수 정련 제작도 가능했고···
문제는 이걸 캐내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각종 광업용 물약과 마법 스크롤을 준비해서 왔는데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이거 더럽게 단단한데·”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그들을 가로막는 난관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비범한 해결책으로 대응했다·
바로 몸으로 때우는 것이었다·
“타올라라 곡괭이여!”
“끓어올라라 힘이여!”
다른 탑 학생들이 봤다면 ‘저 자식들은 뭔 학년이 오르니까 더 무식해졌네’라고 빈정거렸을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게 원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강점이었다·
단련된 육신을 기반으로 강화나 변환 마법을 과감하게 겸비하는 이런 방식은 무식하고 단순하단 비아냥거림은 들을지언정 그 파괴력은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었다·
“너희 여기서 뭐하냐?”
“···!?”
지젤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푸른 용의 탑 친구와 5학년 선배 그리고 해골 교장의 분신과 스켈레톤 골렘 짐꾼이 있었다·
“뭣··· 너야말로 여긴 무슨 일인데 워다나즈?!”
그 질문에 이한은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드러냈다·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약한 모습에 지젤은 살짝 당황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캐튼 선배가 잉걸델 교수님 기말고사 지역 확인하신다고 해서 따라왔어·”
“····”
확실히 슬프고 우울할 일이 맞았다· 지젤은 경악해서 소곤거렸다·
“머리에 화살을 맞으신 게 아니라면 기말고사를 왜 여기서 보는데? 검술 확인하기 좋은 곳이 제국에 수십 군데가 넘잖아!”
당장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말고사 장소로 그랑덴 시의 검술 길드 연무장을 가능성 높게 점치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의 증언도 그렇고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진 차원이라니 왜?
이한은 잠깐 멈칫하다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잉걸델 교수님이 드디어 미치신 것 같다· 에인로가드란 독에 결국 중독되신 거지·”
“큭· 과연··· 어쩔 수 없지· 교수님도 사람이니까·”
다른 마법학교 학생이었다면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에인로가드 학생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멀쩡한 사람도 에인로가드에 오래 있다 보면 슬슬 맛이 가는 것이다·
“다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캐튼 선배 뒤를 쫓아서 시험에 대한 걸 면밀히 조사해 올 테니까· 겸사겸사 서리거인 유물도 챙겨오고·”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든든함 그 자체를 보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든든한 친구가 있단 말인가?
“왜 미적거리고 있느냐·”
“앗· 스승님·”
이한이 대화하느라 움직임을 멈추자 미친 분신이 뒤에서 다가왔다·
제자의 설명을 들은 미친 분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서져라·”
콰직!
거대한 암반과 광맥이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바위는 바위로 철은 철로·”
돌은 돌끼리 뭉치고 광석은 광석끼리 뭉쳤다· 분류는 순식간에 끝났다·
“다 됐군· 너희 마법사들도 따라오도록·”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황당함 그 자체를 보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왜??
물론 이한이라 하더라도 대답해 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거짓말하지 마 워다나즈!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지금 우리가 마법 안 하고 다른 짓 한다고 이러는 거냐?! 이것만 채굴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어!”
학생들은 자기들도 약간 설득력이 없게 느껴지는 말을 외쳤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이번 일까지만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니··· 정말 나도 모르겠는데· 왜 따라오라고 하신 거지?”
이한은 미친 분신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지젤이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관둬· 괜히 자극하지 말자·”
“모라디· 오늘 스승님은 평소와 달리 기분이 좀 좋으신 상태야· 물어봐도 괜찮을 텐데·”
‘그게 가능한가?’
지젤은 의아했지만 다시 부정을 표했다·
“관두라니까· 너만 또 두들겨 맞을 거야·”
확실히 그렇게 말하니 부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친 분신이 요즘 기분 좋고 친절한 분신이 되긴 했지만 원래 미친 대마법사만큼 예측하기 힘든 존재도 드문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따라와도 괜찮나?”
“기말고사를 미리 확인하는 건데 당연히 괜찮지· 일도 일찍 끝났고·”
지젤의 대답에 친구들은 뒤에서 투덜댔다·
‘전혀 안 괜찮거든!’
워다나즈와 지젤은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의견이 갈렸지만 친구들을 괴롭히고 밀어붙이는 데에는 언제나 의견이 일치했다·
하필 왜 저런 부분에서만···
* * *
“선배님· 그런데 정확히 차원의 어떤 점을 확인하시려는 겁니까?”
이한의 질문에 지젤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동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캐튼의 판단일지도 몰랐다·
캐튼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시 그랑덴 시의 검술 길드 연무장으로 위치가 변경될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서리거인들이 시험을 도와줄 수 있는지 질문해보려고 하오· 후배님·”
“····”
“····”
이한과 지젤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뒤에 있는 학생들은 다행히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적절한 장소를 확인한다는 게 그런 뜻이었습니까???”
“그것 말고 뭐가 있겠소? 풍경 확인?”
캐튼은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었다· 두 후배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만약 서리거인이 시험을 본다면···’
‘검으로 서리거인하고 맞서야 하나?’
지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캐튼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후배님? 혹시 걱정이 있다면···”
“···별 거 아닙니다· 제 검술 실력으로 과연 서리거인과 맞설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답하면서 지젤은 은밀하게 상대를 떠보았다·
정말 서리거인과 대결하는 걸 생각하고 있을까?
“후배님 정도면 할 수 있소!”
‘젠장·’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었다· 지젤은 잉걸델 교수가 대체 왜 이렇게 미친 건가 속으로 한탄하며 말했다·
“저는 아직 오러도 미숙합니다·”
“하지만 후배님은 경지에 발을 디뎠소· 이제 깨닫는 건 내일이 될 수도 아니면 바로 오늘일 수도 있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먼저 검의 길을 걸어 간 선배의 든든한 조언은 깊은 위로가 됐다·
지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고 아득한 길·
그런 길의 짧은 구간을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로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맞아· 모라디· 게다가 넌 흰 호랑이 탑 놈들 때문에 신경써야 할 것도 많잖아·”
“고맙다· 워다나ㅈ···”
친구한테도 감사를 표하려던 지젤은 멈칫했다·
···네 탑 학생들을 모두 신경쓰면서 먼저 오러 깨달은 자식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넌 조용히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