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화
이한은 놀랐다·
‘이게 통할 줄이야·’
막상 본인도 던지면서 이게 통할지 확신이 없었는데 상대가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놀라웠다·
“뭐하나·”
“앗· 예· 지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미친 분신의 말에 무심코 대답한 이한은 뒤늦게 문제점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미친 분신은 캐튼 선배를 보고 싶어 할 수 있었지만 캐튼 선배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전투력 하나만 놓고 보면 5학년에서 손꼽히는 선배가 원한이라도 품는다면 앞으로 에인로가드 생활이 조금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억지로 따라왔다고 해야겠군·’
* * *
“후 후배님!”
흰 호랑이 탑의 5학년 학생 캐튼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배신감과 분노의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이었다·
“이 못난 마법사를 위해 저렇게 대단한 분을 모시고 올 줄은···”
“···제가 선배님을 워낙 좋아하잖습니까· 하하·”
와락!
캐튼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한을 끌어안았다·
고양이 수인의 체격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작은 편이었고 캐튼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름 강적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왔던 이한이었지만 바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컥! 선배님· 아픕니다·”
“아 미안하오· 후배님· 너무 기뻐서·”
캐튼은 급히 사과했다·
해골 교장의 분신을 본 게 너무나도 기뻐서 힘 조절을 하지 못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의 분신께 배울 기회라니···”
“교장 선생님께 직접 여쭤보지 그러셨습니까?”
이한은 의아해했다·
물론 대부분의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해골 교장에게 질문하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광기 넘친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교수들한테 물으면 물었지 뭐하러 미치광이 대마법사한테 묻는단 말인가·
그러나 이한이 보기에 캐튼 선배 정도의 광기라면 해골 교장에게 마법을 물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무엇보다 5학년 정도면 해골 교장한테 질문 한 번도 안 한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물 것 같···
“예전에는 많이 질문했었소·”
캐튼은 살짝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피하시더군·”
“····”
이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해골 교장도 질려서 도망치게 만들 정도의 우직함이라니·
‘대단하시다!’
“분명 안에 계시는데 없다고 하시니···”
“그런 거짓말을 하시다니 너무하시는군요·”
“역시 후배님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소· 그래서 벽을 부수고 침입했는데 징벌방으로···”
“····”
“하지만 이렇게 배울 기회가 생기다니 정말 기쁘오!”
캐튼은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이한은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해골 교장도 가르치다가 못해먹겠다 싶어서 도망치는데 과연 그 분신이라고 다를까?
‘나한테 화내시는 건 아니겠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캐튼은 예의를 갖췄다·
“기본적인 예절은 아는군· 그 마법사와는 달리·”
‘처음에 버두스 교수님을 만난 게 행운일지도 모르겠군·’
이한은 미친 분신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두스 교수를 제일 먼저 만나서 그런지 그 뒤의 마법사들은 다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왕족 앞에서 네 재주를 보여라·”
“예!”
캐튼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이한이 몇 번 본 적 있던 에인로가드 최다 낙제 5학년 학생의 검무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검으로 할 수 있는 마법의 총결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걸 또 제국의 어느 누가 하겠나 싶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원시적인 소세계까지 구현되자 미친 분신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검 근처의 현실이 바뀜에 따라 이글거리는 오러가 물로 바뀌는 모습에 미친 분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고대 시절에도 이 정도 재능을 타고난 검사는 흔치 않았다·
마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자신의 육신을 인지하는 능력이 날카롭다는 등의 범속한 재능이 아니었다·
자신을 던져서 세계를 부수려는 저돌성!
혹자는 이걸 우악스럽다거나 포악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건 검사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재능이었다·
마법사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검사는 세계를 찢어발기는 법·
문제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낭비가 대단하군· 왜 저런 재능을 가지고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것이냐?”
···저런 재능을 가지고 자꾸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사라면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야지 왜 원시적인 소세계를 억지로 구현하고 있단 말인가·
“선배님 본인은 마법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마땅히 말렸어야 했다·”
“그건 선배님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무모해보여도 본인이 하겠다면··· 저나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냥 조언까지죠·”
이한의 말에 미친 분신은 잠깐 멈칫했다·
스승의 반응에 이한은 바로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췄다·
‘지금 가능한 방어 마법이···’
“그렇군· 제법 타당한 말이다·”
“!”
상대가 ‘어디서 개소리를!’하면서 화를 내는 대신 인정하는 말을 하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정말 기분이 엄청나게 좋으신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무엇을?”
“어··· 그러니까 선배님의 무모한 선택을···”
“알 게 뭐냐· 어차피 왕족의 제자도 아닌 마법사인데· 그보다 호위로는 쓸만하겠군·”
미친 분신은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캐튼을 고평가했다·
마법사가 경지에 오르면 호위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지만 그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보호가 필요한 법·
저런 검사를 호위로 붙여서 나쁠 게 없었다·
“좋다· 마법을 가르쳐주도록 하지·”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캐튼은 감격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친 분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마법이 궁금하지? 고대 비전 흑마법 소세계 역마법 언령 영혼···”
“<하급 화염 장벽>을 배우고 싶습니다!”
“···?”
미친 분신은 귀를 의심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급 화염 장벽>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상대의 검술 재능이 뛰어나단 것만 알았지 마법 재능이 이 정도로 형편없을 줄은 몰랐던 미친 분신은 경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수준이 낮을 줄은···?!
* * *
미친 분신의 가르침은 실로 현묘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캐튼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상대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미친 분신은 자신의 기존 제자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였는지 느낄 뿐이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
가르침이 끝나자 지칠 대로 지친 미친 분신은 대답 없이 홱 돌아서버렸다·
이한은 눈치를 보며 캐튼에게 물었다·
“도움이 좀 되셨습니까?”
“전혀 되지 않았소 후배님!”
“···죄송합니다·”
“왜 죄송하오? 난 충분히 기쁜데?”
캐튼은 후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배우고 바로 깨닫지 못했다고 슬퍼하기에는 이제까지 캐튼이 거쳐 온 실패의 역사가 너무나도 길었다·
이제 와서 이런 것 하나 때문에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이한은 흔들림 없는 선배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감명 받았다·
자신이라면 흔들리거나 무너졌을 것 같은데도 저런 꿋꿋함이라니·
‘존경스럽군·’
하긴 저런 정신을 갖고 있으니 징벌방에서도 흔들림 없이 훈련을 계속했다 싶었다·
후배가 존경의 시선을 보내는 동안 캐튼은 가볍게 행장을 꾸렸다· 비상식량부터 시작해서 몇몇 아티팩트도 챙겨 넣는 모습에 이한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강의 끝나고 어디 가십니까?”
“서리거인들의 차원에 좀 방문해보려고 하오·”
“오· 저도 이번에 방문한 차원에 서리거인들이 출몰했는데 신기하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밀레이 교수 강의 시간에 방문한 차원 이야기였다·
밀레이 교수는 이번 학기 동안 소환 마법의 기초를 위해 학생들에게 낯선 차원의 지도를 방문해서 작성하라고 제안했고···
···이한과 친구들은 아르실의 도움으로 쉽게 완성했지만 그 대신 서리거인들이 획득한 유물을 추가로 가져와야 하는 저주에 걸렸다·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와 거래를 하는 일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캐튼이 서리거인들의 차원에 방문하려고 하다니·
신기한 우연의 일치였다·
“그 차원이 맞소· 후배님·”
“···예!?”
이한은 깜짝 놀랐다·
캐튼이 왜 이한과 친구들이 방문한 차원에 가려고 한단 말인가?
“잉걸델 교수님께서 부탁하셨소· 기말고사를 치르기 적절한 장소를 확인해달라고 말이오·”
“아 아니· 어떻게 서리거인이 출몰하는 위험천만한 차원이 기말고사를 치르기 적절한 장소가 된단 말입니까?”
믿었던 교수한테 배신당한 이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볼라디 교수도 아닌 잉걸델 교수가 어떻게 이런 잔혹한 시험을?
후배의 감정을 느꼈는지 캐튼은 살짝 당황해했다·
“그건 나도 잘··· 교수님 말로는 2학년 학생들이 다른 차원에 자주 방문하는 것 같으니 말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 대비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소·”
“어떤 미치광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단 말입니까!”
분노하던 이한은 문득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잉걸델 교수에게 과제로 교만공과 광목왕과 아르실이 있는 차원에 방문한 걸 제출했던 건 이한 본인이었던 것이다·
그걸 본 잉걸델 교수가 ‘2학년 학생들은 위험한 줄도 모르고 다른 차원에 적극적으로 방문하는군’하고 한숨을 쉬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마?
“음· 후배님이 정 궁금하다면 내가 교수님한테 물어서 범인을 찾아보겠···”
“이렇게 된 이상 누가 퍼뜨렸는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에인로가드 학생답게 담담히 맞설 뿐입니다·”
이한의 태도에 캐튼은 감탄했다·
후배지만 저런 의연하고 대담한 태도는 배울 만했다·
‘잠깐· 이번 기회에 유물까지 갖고 나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주는 미친 분신의 감시주간이었지만 이 동행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해골 교장이 그렇듯 그 분신 또한 괴팍하고 변덕이 심했던 것이다·
옆에 미친 분신과 캐튼이 있을 때 서리거인의 유물까지 갖고 나오는 게 맞지 않을까?
“선배님·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침 다음 강의 시간도 비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럴 수가!”
“물론 아직 2학년인 제가 같이 가는 게 놀라우시겠죠· 하지만 스승님도 같이 가실 테고···”
“아니· 다음 강의 시간이 비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오· 후배님·”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 질문할 때부터 같이 가고 싶어할 수도 있겠다 싶었소· 후배님은 그런 걸 좋아하잖소·”
“대체 어느 차원의 선배님 후배가 그런 걸 좋아합··· 아닙니다· 어쨌든 허락해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괜히 여기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이한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미친 분신도 설득해야 했던 것이다·
“스승님· 오늘 강의는 끝났는데 선배께서···”
서리거인들이 출몰하는 차원과 그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미친 분신은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제자 네가 이 강의를 굳이 들으러 왔을 때 배움을 게을리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
어떻게 알았지?
이한은 스승의 날카로운 추측에 전율했다·
캐튼 선배를 미친 분신에게 보여준 건 이한 본인을 향한 압박을 좀 완화시키려는 의도도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걸 보니 왕족의 착각이었군· 이걸 위해서 굳이 온 거였나?”
“···바로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