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3화
‘앗· 또 정신을·’
옆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너무 흥미로워서 잠깐만 쳐다봐도 홀린 듯 쳐다보게 됐다·
일렌딜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발드로가드 학생에게 집중했다·
‘친절··· 한가? 하긴··· 친절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저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확실히 사교성이 좋고 교우관계가 넓었다·
관계라고는 몇몇 후배 말고는 없는(그나마 그 후배들도 대할 때 별로 편하진 않았다) 일렌딜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후배가 자신과는 정반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애초에 전 학파를 수강하는 이상 발이 넓지 않기도 힘들었다·
그게 발드로가드 학생한테도 적용된다는 건 조금 신기했지만···
비버-펭귄-여우:과연 그렇군· 어쨌든 잘 모르는 선배야· 찾으면 말해줄게·
‘아마 평생 못 찾겠지만·’
이펠드렘:감사합니다!
비버-펭귄-여우:고나달테스한테 물어봐· 고나달테스가 그런 건 잘 알 거야·
둘을 화해시켜주기 위해 일렌딜은 부족한 솜씨로나마 최선을 다했다·
고나달테스를 꺼림칙해하던 이펠드렘이었지만 6학년 워다나즈 선배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살짝 흔들려하는 것 같았다·
이펠드렘:괴팍하고 못된 사람이라 어울리기 싫은데··· 알겠어요· 생각해볼게요·
비버-펭귄-여우:마법사라면 어울리기 싫은 사람과도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
“다른 반신은 허락할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다루는 법을 깨닫도록 해라· 다루기 어렵다고 바꾸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지 왕족의 제자가 할 짓이 아니다·”
마침 옆에서도 어울리기 싫은 사람 아니 인공 반신과 어울리는 후배가 보였다·
그걸 보니 더더욱 일렌딜은 자신이 한 말에 확신이 생겼다·
이펠드렘:좋은 말씀이군요! 확실히 그 말이 맞아요! 사실 저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발드로가드에 입학하면서 인근의 새 저택을 구입했는데 아무래도 새로 고용한 하녀들하고 잘 맞지 않는 거예요· 아무래도 제국 서부라 그런지 관습도 좀 낯설었고요·
비버-펭귄-여우:와··· 정말 힘들었겠는걸·
일렌딜은 자신이 흑마법 학파가 아니라는 게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고위 저주를 익혀놨다면 얼굴 모르는 상대도 충분히 저주할 수 있었을 텐데·
이펠드렘: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친해졌어요· 친해지고 나니까 상대의 좋은 점을 알겠더라구요·
비버-펭귄-여우:그래· 이제 그만 이야기해도 되겠지?
일렌딜은 슬슬 대화를 끝내려 했다·
더 이야기해봤자 그녀의 속만 더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펠드렘은 모처럼 따로 이야기를 걸어온 에인로가드 학생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펠드렘:저기 혹시 마법에 관해서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비버-펭귄-여우:발드로가드 선배나 교수한테 물어보지 그래?
약간의 심술을 담아 일렌딜은 빈정거렸다·
정말 마법에 대해 심도 깊은 질문이라면 발드로가드 마법사들이 대답해주기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이펠드렘:지금 선배님하고 교수님들은 다 같이 봄맞이꽃 기념 제국 마차 여행을 가셨거든요·
“····”
일렌딜은 마치 숲을 망가뜨리는 외부인을 봤을 때처럼 격렬한 살의가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비버-펭귄-여우:···물어봐· 잠깐· 너는 왜 안 갔지?
이펠드렘:아 지금 연구하고 있는 마법이 재밌어서요!
“?”
일렌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이해가 가지 않아 이한을 불렀다·
“저 저기···”
제자가 인공 반신과 열심히 마법을 익히는데 방해를 하자 미친 분신은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일렌딜은 깨갱 고개를 숙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군· 계속 아무것도 아니도록 해라·”
“네 넵·”
일렌딜은 얌전히 시선을 돌렸다·
발드로가드 학생이 마법이 재밌어서 노는 걸 멈추다니·
‘우연이거나 착각이겠지···?’
이펠드렘:지금 제가 압축 마법진과 적층(積層) 마법진을 직접 설계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폐쇄된 마법진 안에서 마력 상승과 하락의 합은 같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보면 정십이면체 루비 시약 부분에서만 마력이 역으로 튀고 있거든요· 제가 어디서 실수를 한 건지 모르겠어요·
“!??!?!”
압축 마법진이란 십 수 개 이상의 마법진을 하나의 마법진에 압축해서 새겨넣는 기술이었다·
에인로가드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도 보통 고학년 때 입문하는 난이도 높은 고등 기술!
적층 마법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마법진들을 수직으로 쌓아서 겹친 다음 상승과 연계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압축 마법진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발드로가드 학생이 물어보고 있다니·
일렌딜은 혹시 자신이 속고 있나 싶었다·
상대는 혹시 발드로가드 학생인 척하는 에인로가드 학생이 아닐까??
비버-펭귄-여우:혹시 그쪽 몇학년이라고 했지?
이펠드렘:저요? 3학년이요·
비버-펭귄-여우:혹시··· 발드로가드 입학할 때 다른 마법학교에서 제안 온 적 없어?
이펠드렘:어? 어떻게 아셨어요? 페트로가드에서 초대장 왔었는데·
마법학교 페트로가드는 절대 발드로가드처럼 무늬만 마법학교인 곳이 아니었다·
뛰어난 마법 아이템 장인들을 길러내는 곳·
그런 곳에서 제안을 받은 적 있었다면 상대가 발드로가드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수준의 마법을 보여주는 게 이해가 갔다·
페트로가드 3학년이라면···
‘아니 그래도 대단한데?’
저 정도면 페트로가드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렌딜은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비버-펭귄-여우:왜 페트로가드에 가지 않았지?
이펠드렘:친구들이 다 발드로가드 가기로 해서요·
“····”
일렌딜은 자신도 모르게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에인로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사실 정말 눈엣가시는 역시 발드로가드였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는 마법사들을 데리고 가서 그 새싹을 썩혀버리는 지옥 같은 곳!
“설득 다 하셨습니까?”
뒤에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목깃 부분이 화염에라도 맞았는지 크게 그슬려있었다· 일렌딜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분 분신이···?”
“예? 아· 아닙니다· 마법 연습하다가 신나서 실수했습니다·”
인공 반신이 구리다고 하는 걸 무시하고 이한은 자신의 마법 수련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인공 반신이나 미친 분신이 강력하고 사악한 마법을 익히자고 하는 걸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한은 그냥 자신이 하려는 마법을 하면 됐다·
그리고 그 결과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인공 반신의 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유용하단 사실이었다·
-정말 성공률이 올라갔군요! 대단합니다!
-너무시시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주십시오·
-대륙지배는언제···
미친 분신처럼 극단적으로 힘을 끌어내거나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보조용으로만 사용한다면 별로 어렵지도 않았고 현재 이한에게 훨씬 더 유용했다·
현재 시전 시 실패 가능성이 높은 어려운 마법들의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신성(神聖)의 좋은 점은 마법이라면 수백 개의 과정과 이론을 거쳐야 할 어려운 현상도 직관적으로 구현 가능하단 점이었다·
덕분에 신이 난 이한은 기세를 타고 새 화염 속성을 연습하다가 옷을 태워먹을 뻔했다·
“다 다행이다··· 분신이 공격한 줄 알았어·”
“아· 하긴· 저도 제가 너무 안일한 마법만 연습한다고 화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일렌딜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후배가 연습하고 있는 마법들은 전부 다 2학년이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화를 내진 않으시더라고요·”
“어 정말···?”
“예·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던데요?”
“?”
일렌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분신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아! 알겠어! 빈정거린 거라면···”
“그래서 혹시 비꼬신 거냐고 물어봤는데 화내셨습니다·”
“····”
일렌딜은 경악의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 후배의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그 타고난 마력도 타고난 마법의 재능도 아니었다·
미친 대마법사의 분신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광기였다·
대체 어떻게 저런 말을?
“여하튼 아니더군요· 이렇게 활용하는 게 사실 맞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만··· 선배님도 한 번 활용해보시죠?”
“나 나는 됐어·”
일렌딜은 질색하며 즉답했다·
신성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그냥 숲을 부활시키고 재생시키는 데에 쓰지 굳이 수상쩍은 인공 반신과 접촉해서 고위 마법을 연습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법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선배님· 잘 설득해주셨습니까?”
“어? 어어···”
일렌딜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해줬다·
상대한테 잘 말했고 설득했고 알고 보니 상대가 이런 마법사더라···
“···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시는 겁니까·”
“진··· 진짜야!!!”
후배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일렌딜은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정말 저런 마법사가 발드로가드에 있는데!
* * *
‘내 추측이지만 현재 스승님은 상당히 기분이 좋으신 거 같다·’
걸어 나오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요즘 일어난 몇몇 일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교수를 대신해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이한이 하라는 걸 안 하고 쉬운(어디까지나 미친 분신 기준에서) 마법을 연습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거나···
이 모든 미스터리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친 분신의 기분이 아주 좋다는 것!
“···?”
미친 분신은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증거는 없었지만 제자가 건방지고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생각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지금 하려는 일도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
“무슨 일이지?”
“이제 다음 강의를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강의길래 따로 묻는 거냐?”
미친 분신은 확실히 제자에 대한 이해도가 늘었다·
여기서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강의는 아니라는 뜻인 것이다·
“검술 강의 <검과 인생>···”
“····”
바로 일그러지는 미친 분신의 얼굴에 이한은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건 절대 기분이 좋은 사람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젠장· 잘못 판단했군·’
기분 좋은 줄 알고 과감하게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된 셈이었다·
“이 와중에 검술 강의를 듣고 있다니· 지금 뭐가 중요한지 정말 모른단 말이냐?”
“원래 듣고 있었던 겁니다만···”
“조용히! 다른 마법들은 그 수준이 하찮더라도 길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검술은 이야기가 다르지·”
“검술도 그 경지가 높아지면 마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그건 터무니없이 멀리 돌아가는 길이다· 날이 저물고 있는데 무엇하러 길을 돌아간단 말이냐·”
미친 분신은 높은 경지의 검술이 마법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았다·
결국 힘을 이용하고 세계를 바꾸는 건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 공통점 때문에 마법사가 검술을 익히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잠깐· 스승님도 근접 전투 익히지 않으셨습니까?”
이한은 과거에서 본 기억을 떠올리고 물었다·
자기도 익혀놓고 제자한테는 시간 낭비라고 하다니?
“왕족이 직접 익혀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법이 경지에 오르면 자잘한 재주는 그 필요가 없어지는 법·”
미친 분신은 생각보다 훨씬 완고했다·
과거를 들먹여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 강의를 가르치는 선배님이 꽤 특이하신 분인데 혹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 않다·”
“검술로 온갖 마법을 시전하십니다·”
미친 분신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내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