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1화
연금술 강의는 그렇게 끝났다·
이한은 강의실에서 걸어 나오며 <우레걸음의 침수향> 제작법을 그냥 태워버릴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참자·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식은 언제나 힘인 법·
저 제작법이 언젠가 이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한은 지금 당장 익히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자존심 문제였다·
우레걸음 교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지는 않겠다!
“스승님· 괜찮으셨습니까?”
이한은 뒤에서 따라오는 미친 분신을 보며 물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교수 역할을 맡은 마법사에게 문제가 있군·”
“아하·”
스승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레걸음 교수한테는 문제가 있었다·
제자의 질문에 대답 안 하면 모를까 저렇게 추가 과제를 내며 조롱하다니·
매우 심술궂은 인성이었다·
“우레걸음 교수님이 좀 인성이···”
“유약하지·”
“예?”
“유약하다고 했다· 스승은 무릇 너그러움뿐만이 아니라 엄격함 또한 겸비하고 있어야 하지·”
우레걸음 교수는 버두스 교수의 전례 때문에 억지로 친절하게 굴었지만 오히려 그 친절이 역효과를 불러왔다·
미친 분신에게 유약한 마법사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저런·’
이한은 말도 안 되는 오해에 안타까워했다·
우레걸음 교수도 원래 어디 가서 심술궂은 마법사를 꼽으면 순위권에 들 수 있는 사람인데 저런 오해를 받다니···
“그래도 평소에는 좀 더 엄격하십니다·”
“그렇다면 왕족의 눈치를 보고 행동했다는 뜻이 되겠군· 이 또한 뛰어난 마법사가 할 일은 아니지·”
‘그건 그렇긴 해·’
이한이 생각하기에도 우레걸음 교수는 좀 많이 굽신거리긴 했다·
아무리 버두스 교수가 당했다지만 에인로가드의 교수치고는 좀 많이 없어보였다·
-워다나즈· 괜찮아?
강의실에서 나온 다른 친구들이 뒤쪽에서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괜찮아·
-정말로?
-물론이지· 근데 좀 멀리 떨어져라·
“····”
전혀 안 괜찮잖아!
닐리아와 요네르는 기막혀했다·
대체 어떤 괜찮은 사람이 멀리 떨어지라고 한단 말인가·
“애초에 워다나즈를 납치했던 마법사가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교장 선생님이 안 계시니까···”
“지금이야말로 투서를 넣어야 할 때 아닌가?”
친구들은 이렇게 중요한 때 자리에 없는 해골 교장을 욕하며 투덜댔다·
원래라면 죽음의 기사들을 이끌고 엄정하게 외부인을 처단해 에인로가드의 규율을 다잡아야 할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난장판이 되는 것 아닌가·
평소 탈주하는 학생들은 그렇게 잘 잡아넣었으면서 이럴 때는 아무 것도 못 하다니·
“다들 신중하게 생각해·”
“과연· 투서를 보내면 나중에 교장 선생님한테 보복당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졸업할 때까지 징벌방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아니· 그거 말한 게 아니라 투서 내용 이야기한 거였는데· 투서 내용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적어야 교장 선생님도 타격을 입지·”
“역시 메이킨이야·”
친구의 노련한 조언에 2학년 학생들은 감탄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여기 있는 학생들보다는 해골 교장이 제국 관료들에게 펼칠 수 있는 힘이 더 강했다·
게다가 해골 교장이 에인로가드 영주로 일이년 있었던 게 아니지 않은가·
어설프게 ‘교장 선생님이 빵 안 주고 굶겨요 흑흑’ 같은 고발을 해봤자 다 대비가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학생들도 이제 신입생이 아닌 만큼 어느 정도 넓은 시야를 갖추게 된 상태였다·
“다들 각자 저 분신이 위험한 짓을 하는 걸 기록하자·”
“과연! 워다나즈는 거의 모든 강의를 다 들으러 다니니 역할 분담도 쉬울 거야· 운이 좋네·”
“···그 말 워다나즈 님 앞에서는 하지 마시죠···”
친구들은 굳게 결의했다·
워다나즈를 위해 사악한 마법사의 더 사악한 분신을 면밀히 감시하겠다고!
“그런데 워다나즈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사실 난 처음에 버두스 교수 강의 이야기 들었을 때 워다나즈가 일부러 데리고 온 건가 생각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니야· 나도 물어봤는데 이한이 일부러 데리고 온 건 절대 아니래·”
요네르의 말에 친구들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마음 속 한구석에 ‘사실 워다나즈가 일부러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하는 생각이 다들 조금은 있었던 것이다·
* * *
불가살이:이 마법사를 이용하려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생각 같아·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마법을 시전하지 말란 건 아주 기초적인 말이잖아·
이악투스:버두스 교수님이 털렸다면서? 혹시 벤도졸 교수님도 털 수 있을까?
불가살이:다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상대는 위험한 마법사야·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하는 건 교수님들에게 맡겨· 곧 교장 선생님도 돌아올 거야·
바콴탈라나:교수들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건 그 마법사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하찮고 무가치한 일이지· 할 수 있다면 마법을 캐내야 해·
불가살이:혹시 내 말이 안 보이는 건 아니지?
이펠드렘:저는 보여요!
불가살이:정말 고마워··· 이악투스· 내 말 무시해도 난 계속 글씨를 쓸 거야! 무시할 테면 무시해봐·
이악투스:알겠어· 알겠어· 불가살이· 널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넌 맨날 재밌는 일을 망치는 재주가 있잖아·
불가살이: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욕을··· 그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소리야! 사과해!
‘일리가 있긴··· 하군·’
에인로가드의 파수꾼 회원들은 모처럼 뜨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대화 주제는 요즘 소문이 자자한 ‘미친 대마법사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였다·
이악투스는 교수를 토벌하는 데에·
바콴탈라나는 비전을 캐내는 데에·
불가살이는 교수고 비전이고 그냥 위험하니까 최대한 거리를 두자고 하고 있었다· 가장 재미 없고 인기 없을 법한 주장이었다·
이악투스:그리고 애초에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교장 선생님 분신하고 같이 돌아다닌다면서? 그것만 봐도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불가살이:그건 틀린 소리야!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납치되기까지 했었다고!
이펠드렘:납 납치요? 에인로가드에서는 학생이 납치도 되나요? 그리고 납치된 게 그 워다나즈라고요?!
불가살이:···아주 가끔 일어나지 보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번에 새로 가입한 발드로가드 학생이 얼굴을 내밀자 다른 회원들은 아차 싶었다·
평소처럼 에인로가드 학생들만 있다고 생각한 채 떠들다보니 외부인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상상을 못한 것이다·
이한은 새 회원을 달래기 위해 깃펜을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발드로가드 학생 앞에서 치부를 다 밝힐 수는 없었다·
고나달테스:맞아· 말이 납치지 분명 과장된 부분이 있다· 그냥 조금 과격한 마법 전수겠지· 그 워다나즈란 녀석이 허풍이 좀 심해서···
이펠드렘:어 어떻게 납치된 걸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고나달테스 당신은 저번에도 그렇고 진짜 무례하군요!
“····”
사람 사이의 관계는 첫인상이 생각보다 중요했다·
저번에도 파수꾼 클럽에서 ‘워다나즈’라는 가명을 쓰려고 했다가 이한에게 직설적인 악평을 들은 발드로가드 학생은 경계심을 가득 드러냈다·
같은 에인로가드 학생인 워다나즈를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납치당한 것도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다니 어떻게 저렇게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군지 직접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고나달테스:···이악투스· 네가 대신 설명해봐라·
이악투스:뭐 납치가 흔한 일이 아니긴 한데 원래 천재들이 저런 거 아니겠어· 미치광이 마법사들이 자기 마법 전수하려고 몰려들 정도는 되어야 진짜 천재지· 앞으로도 있을 텐데 벌써 너무 놀라지 마·
고나달테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요즘 그런 일이 어디 있나? 고대 시절 소리 하지 마라·
이악투스:뭐야 왜 화내는데?
고나달테스:화 안 냈다·
이한은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상대가 기분 나쁜 소리를 했다고 즉각 반응했다가는 들킬 수 있었다·
이악투스:어쨌든 다 끝난 일이고 지금은 괜찮아· 그 분신이 본관 강의실을 어슬렁거리고 있긴 한데·
불가살이:맞아· 괜찮아·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이펠드렘:네···
불가살이:에인로가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해하고 있으면 지금 물어봐·
이펠드렘:아 아니요· 오해 안 하고 있어요·
‘다들 달래는 기술이 서투르군·’
이한은 혀를 찼다·
분위기를 보니 발드로가드 학생의 오해를 풀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겁을 더 먹게 만든 것 같았다·
사실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었다· 저 상대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건 이한 아닌가·
현재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외부인인 만큼 경계심을 풀 수 있다면 푸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워다나즈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
밝히는 건 위험도 크고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미친 분신의 동행은 의외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회원들의 대화도 들어보니 교수를 공격하게 유도하거나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저번의 조우린처럼 신체를 탐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이어도 해골 교장의 분신한테 덤벼드는 건 조금···
비버-펭귄-여우:다들 강의 때문에 고생이 많네· 힘내라고·
“!”
* * *
일렌딜이 파수꾼 클럽에 글을 남긴 건 사소한 변덕 때문이었다·
‘다들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다니까·’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마법과 그 평가에 목을 매는 만큼 중요한 걸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렌딜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숲·
온갖 정령과 식물들이 살아 숨쉬는 마법의 공간·
이 공간을 돌보고 가꾸기 위해서라면 에인로가드 강의들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일렌딜은 대부분의 강의를 불출석하고 있었다· 4학년 학생에게서는 쉽게 보기 힘든 과감성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이어드 혼혈 학생에게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강의와 가르침에 집착하는 저 학생들을 보라·
그 집착 때문에 이런저런 외부 사건에 휘말려 고생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렌딜은 고요한 숲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
-선배님! 계십니까?
“····”
멀리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일렌딜은 경악했다·
왜?!
왜 저 후배가 숲에 찾아왔지?!!
‘맞 맞아!’
일렌딜은 숲 한복판에 설치된 유물 <반신의 메아리>를 보고 나서야 기억이 되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이 유물은 그냥 받은 게 아니었다·
저 후배가 숲에서 인공 반신을 길들이고 사악한 고대 마법을 연습할 수 있는 조건을 걸고서 받은 것이었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일렌딜은 자책하며 대답하려고 했다·
-천박하게 부르지 말고 종이 새를 보내도록·
-예· 알겠습니다·
“···!”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에인로가드 고학년 학생답게 일렌딜은 즉시 움직였다·
바로 땅을 깊숙이 파고 지하에 숨어버린 것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땅을 설득하고 바위에게 부탁해 지하로 들어간 솜씨는 과연 에인로가드 고학년 학생다웠다·
‘말 말도 안 돼·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일이···!’
강의를 듣는 다른 학생들을 비웃어서 천벌이 내린 것일까?
일렌딜은 깊이 반성했다·
만약 이번만 자비를 베풀어준다면 절대 다른 학생들을 조롱하지 않겠···
“선배님! 선배님! ···어디 가셨나?”
“아래·”
“예?”
“아래에 있다·”
미친 분신이 턱끝을 까딱거리며 말하자 이한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무슨 선배님이 채굴하는 드워프도 아니고 숲 지하에 왜 계시겠습니까?”
쩍!
미친 분신이 손을 휘두르자 땅이 갈라지고 아래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일렌딜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이어드 혼혈 선배는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안 안녕하세요···”
“····”
“저기···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