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화
언제나 어떤 일이 있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미친 분신이었지만 지금 같은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박수갈채로 시작한 강의실의 학생들은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다·
“교장 선생님 분신의 동상을 세우자!”
“오늘을 기억하라! 오늘은 성 고나달테스께서 사악한 버두스를 퇴치한···”
쿵!
“시끄럽다·”
“앗· 네·”
학생들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로 제정신을 차렸다·
가슴은 버두스 교수를 거꾸로 매단 것 때문에 뜨겁게 타오르더라도 머리는 바로 차갑게 식힐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었다·
“놔줘! 고나달테스!”
“왕족을 그렇게 부르는 걸 누가 허락했나·”
“뭐? 아니··· 원래 네가 허락했잖아!”
미친 분신은 버두스 교수를 고문하거나 하지 않았다·
고대 시절에도 이런 마법사는 있었다· 그리고 그 때에도 고문은 별 소용이 없었었다·
이런 마법사에게는 다른 방식의 가르침이 있는 법·
콰직!
미친 분신은 버두스 교수가 작업하고 있던 아티팩트를 부숴버렸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모습에 버두스 교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치 짓던 나무 댐이 무너진 비버 같았다·
“무··· 무··· 무슨 짓이야!!!”
“아직도 예의범절을 갖추지 못했군·”
미친 분신은 무심한 태도로 버두스 교수의 다음 아티팩트를 꺼냈다·
으직!
지팡이가 그대로 쪼개지자 버두스 교수는 새된 비명을 터뜨렸다·
저 지팡이를 완성하기 위해서 마법사 23명의 협력과 6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통곡하는 비버 수인의 모습은 가장 증오로 물들었던 학생의 마음도 약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친 분신은 멈추지 않았다·
이한은 새삼 상대가 고대의 대마법사란 걸 느꼈다·
버두스 교수가 아무리 에인로가드의 미친 교수라 하더라도 잔혹한 시대를 헤쳐 나온 고대의 대마법사를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내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티팩트 두 개가 추가로 더 박살나자 드디어 버두스 교수는 예의범절을 깨달았다·
그 모습에 미친 분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예절을 잊으려 하지 말도록· 제자를 가르치는 자는 무릇 스스로의 품위에도 주의해야 한다·”
버두스 교수는 대답 대신 엉엉 울기만 했다· 그러자 미친 분신이 바로 다음 아티팩트를 꺼냈다·
“안 잊었습니다! 안 잊었어요!”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마법사· 명심하도록· 그리고··· 방금 가르침은 뭐였지?”
“고 고대에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버두스 교수는 눈을 깜박이며 미친 분신의 눈치를 봤다·
뒤에서 듣고 있던 이한도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고대에는 이런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스승이 제자한테 떠먹이는 게 아닌 제자가 직접 스승의 비전을 보고 훔치는 방식·
그러다 가끔 서로 죽이기도 하고···
콰직!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미친 분신은 바로 다음 아티팩트를 부숴버렸다· 버두스 교수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감히 왕족을 능멸해? 어느 고대의 마법사가 이런 식으로 가르쳤단 말이냐?”
“어 아니었습니까?”
이한이 무심코 말하자 미친 분신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저런 개소리를 지껄인 게 자신의 제자라는 게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훔쳐 배운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저기 자신의 할 일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짓거리가 어디 스승이 보여줄 모습이란 말이냐?”
‘···그건 그래!’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공감했다·
생각해보니 고대에 대해 그들이 잘 모르다보니 ‘고대에는 이렇게 배웠다더라’라는 말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 같았다·
고대도 사람 살던 시절인데 그렇게 이상하게 가르칠 리 없지 않은가·
아무리 가혹하고 혹독하게 가르치긴 했어도 고대에도 스승이 제자를 내팽개치고 자기 할 일만 하는 걸 가르침이라고 하진 않았다·
“그런 건 제자가 아니라 하인이고 노예다· 마법사 너는 여기 왕족의 제자를 하인처럼 부렸단 말인가?”
“하 하인처럼 안 부렸어요··· 엄청 잘 대해줬습니다···!”
버두스 교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대답했다·
물론 미친 분신은 믿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마법사가 왕족의 제자를 어떻게 대했지?”
“여기 학생들 중 가장 심하게 부려먹었습니다·”
시군팅이 즉답했다·
자신의 학파 교수라 하더라도 부여 마법 학파 학생은 진실을 말하는 법·
파직!
“내가 언제!!”
아티팩트가 또 하나 더 박살나자 버두스 교수가 울먹이며 외쳤다·
그러나 시군팅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다른 학파 학생들과 달리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은 버두스 교수가 펑펑 울든 말든 침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맹세해라· 마법사·”
“뭐 뭐를요?”
미친 분신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다음 아티팩트를 꺼냈다·
한 개가 또 부서지자 버두스 교수는 닥치는 대로 외치기 시작했다·
“금 금화를 투자 받고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아닌가? 의뢰인의 연락을 무시하고 멋대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 이것도 아니야? 학··· 학생들의 작품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콰직 콰직 콰직!
“교수님· 힘내십시오! 잘 하고 있으십니다!”
“모르겠어! 도와줘!”
버두스 교수는 그나마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제자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이한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미친 분신이 차가운 눈동자로 이쪽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알려준단 말인가·
“지금 방향으로 조금만 더!”
“학··· 학생들이 천치 머저리 같아도 그걸 말로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건 말해야 한다· 마법사·”
미친 분신이 지적했다·
천치 머저리 같으면 그건 말해주는 게 맞았다· 버두스 교수는 혼란에 빠졌다·
이게 아니라고?
“교수님께서 평소에 안 하시던 걸 떠올려보십시오!”
“어 어··· 휴식? 편지 답장? 시험 출제?”
콰직!
“····”
“학생들을 작품 돌보듯 돌보겠습니다! 이것도 틀렸나?!”
그제야 아티팩트가 부서지는 게 멈췄다· 버두스 교수는 통곡했다·
저런 멍청이들 때문에 자신의 작품들이 부서지다니!
“울음 그치고 다시 가르침을 준비해라· 아까처럼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 그런데 고나달테스··· 님·”
버두스는 평소처럼 부르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님’을 붙였다·
“뭐지?”
“어떻게 가르치··· 면 될까요?”
“····”
미친 분신이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버두스 교수는 제발 남은 아티팩트를 부수지 말아달라고 펑펑 울었다·
* * *
다행히 미친 분신은 남은 아티팩트를 부수지 않았다·
대신 버두스 교수를 매달아놓은 채 본인이 직접 강의에 나섰다·
이한은 감탄했다·
‘대단하다·’
미친 분신은 제자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을 가르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한도 제자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개짓ㄱ··· 아니 가혹한 시험을 치렀던가·
그런데 지금 미친 분신은 자신과 상관없는 학생들을 임시로라도 가르치고 있었다·
버두스 교수를 채찍질해서 좋은 스승으로 만드느니 자신이 나서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미친 분신마저 포기하게 만들 줄이야·
‘교수님· 교수님은 패배했지만 사실 이기신 겁니다·’
이한은 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물론 거꾸로 매달린 버두스 교수한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아티팩트 내버려둬! 내버려두라고!”
학생들이 부서진 아티팩트 잔해를 우르르 몰려와서 나눠 가지자 버두스 교수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아티팩트들의 재료를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후원자들과 투자자들의 살해 협박을 견뎌야 했던가·
“닥쳐라· 더 깨뜨려버리기 전에·”
“····”
버두스 교수는 우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매달린 학생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 잔해를 챙겨갔다· 지팡이 완성을 위해 아주 귀중한 도움이 될 터였다·
“선배님· 버두스 교수님을 왜 자꾸 쳐다보시는 겁니까?”
이한은 옆에 있던 바르글리오스 선배가 매달린 교수를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자 의아해했다·
혹시 교수를 매달아놓은 봉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아· 미안하다· 그냥 몇 번 다시 봐도 기분이 좋아서·”
“···그 그렇군요·”
* * *
“알았다·”
“···뭘?”
한손에는 주먹밥을 다른 한손에는 깃펜을 들고 얼굴을 거의 책상 위로 박을 만큼 기울이고 있던 디레트는 친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굳이 공방에 따라와서 ‘왜 후배는 내 말은 안 듣고 네 말만 들을까?’를 고민하는 게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친구 아닌가·
“디레트 너는 어두운 색의 머리칼이지·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도 어두운 색의 머리칼이고·”
“···혹시 흑색인 거 기억 못 해서 어두운 색이라고 대충 뭉개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머리카락은 은색이지· 그 차이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걸 수도 있겠어·”
“과연· 놀라운 발견인데· 제국 학회에 꼭 발표해봐·”
디레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모발색 상성’ 이론은 꼭 예지 마법 학파한테 전해주고 싶었다·
아주 좋아서 방방 뛰리라·
“···혹시 비꼬는 건가?”
“당연히 비꼬는 거지!”
디레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유크벨티레는 충격으로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다른 하찮은 마법사도 아닌 디레트 네가 왜?”
“···아오· 알았어· 내가 알려주면 되잖아·”
친구가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쳐다보자 디레트는 마음이 약해졌다·
유크벨티레는 그렇다면 용서해주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레트· 네가 가끔 무례하고 시간 낭비를 많이 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는 반성할 줄 아는 확고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
“····”
디레트는 방금 부러뜨린 깃펜을 치워버리고 새 깃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늘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강의 있지? 가서 교수님을 도와줄 겸 후배들 가르쳐줘·”
“왜?”
“···그냥 한 번이라도 좀 내가 하라면 하면 안 돼?”
“난 언제나 네 부탁을 들어줬는데· 디레트·”
디레트는 또 새 깃펜을 꺼내야 했다·
어떤 마법사도 보여줄 수 없는 인내심으로 표정을 유지하며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의 수제자는 입을 열었다·
“자· 잘 들어봐· 유크벨티레· 후배들은 마법을 가르쳐주는 선배한테 존경심을 가져·”
“난 이미 가르쳐 준 적 있는데·”
“···교수님 없을 때 강의 대신 들어간 건 억지로 한 거니까 해당이 안 돼·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도와줘야 해·”
“디레트 너도 그랬고?”
“그래!”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러지 않았으면 모두가 편했을 텐데·”
유크벨티레는 친구의 행동을 비난했다·
디레트 혼자 선심을 쓴 탓에 다른 선배들은 후배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평균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줘야했다·
“···억울하면 너도 해· 가서 환심 사·”
“음·”
유크벨티레는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하겠어·”
까득!
디레트는 아예 깃펜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더 부숴먹을 수는 없었다·
“왜?”
“오늘 강의는 버두스 교수님께서 맡으셨지· 평소 자리를 비우셨을 때 내가 강의를 맡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오늘 같은 기회를 그리 헛되이 낭비할 순 없어·”
버두스 교수가 강의실을 비워버리면 그 대신 들어가서 가르쳐야 하는 건 유크벨티레였다·
모처럼 버두스 교수가 강의실에 있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디레트한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너 지금 나한테 와서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잖아···’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
“아니야· 생각해봤는데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강의를 도우면서 새로 배울 게 없어·”
“야· 나가·”
디레트는 친구를 패지 않기 위해 축객령을 내리려 했다·
마침 그 때 후배 한 명이 공방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들으시면 놀랄 겁니다!”
“오골도스· 미안한데 모아놓은 뼈가 사라지는 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 버두스 교수를 두들겨 패고 대신 강의했답니다!”
“!?!”
디레트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아무리 놀랐어도 유크벨티레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유크벨티레는 충격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나를 부르지 않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