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화
“음!”
시작하자마자 지혜가 막히자 골렘 선배는 신음했다·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지혜에 의존하라고 하자마자 이런 일이 닥쳐올 줄이야·
벌써부터 마법에 의존하고 싶어졌다·
‘안 돼· 이건 마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답이 없다·’
저번처럼 약한 예지라면 몇 개의 금제로 어떻게든 액운의 방향을 돌려볼 수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저걸 마법으로 비틀려면 후배는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왼쪽 앞발로만 걸어 다니되 어떤 마법사한테도 들키면 안 되고 입을 한 번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금제가 나올 수도 있었다·
“···잠깐· 별과 계약했다고?”
고민하던 골렘 선배는 문득 깜짝 놀랐다·
지혜가 막힌 것 때문에 놓쳤는데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후배는 아까처럼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선배님· 지금 그게 중요합···”
“중요하지 이건!”
이번에는 골렘 선배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위협적인 미래를 봤다 하더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 법이었다·
고작 2학년인 후배가 별과 계약했다니!
“무슨 별하고 계약했는데?”
“객성 아르나요·”
“과연!”
골렘 선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이한은 약간 감탄했다·
‘역시 4학년답다· 이 정도로는 안 놀라시는군·’
이한은 이 별이 무슨 별인지 알게 되었을 때 억울해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역시 선배는 달라도 뭔가 달랐던 것이다·
“과연·”
“?”
고장난 축음기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는 선배의 모습에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을 아래로 던지니 어느새 선배와의 거리가 멀어져있었다· 놀라울 만큼 은밀한 뒷걸음질이었다·
“과연···”
“선배님· 설마 도망치시는 건 아니죠?”
“아 아니야·”
그러나 골렘 선배의 눈빛은 저 멀리 파셀레트 교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런 흉악한 운세는 교수가 맡아서 처리해야 했는데!
‘나는 아직 멀었구나· 교수님께서 위험을 느끼고 쓰러졌을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골렘 선배는 그제야 지혜를 깨달았다·
진정한 지혜는 미친 척 드러눕는 것에 있었다·
물론 이한은 선배가 도망치는 걸 내버려두지 않았다· 호다닥 달려와서 붙잡고 늘어졌다·
“선배님· 객성 아르나에 관한 위험은 사실 많이 과장된 편입니다· 기록도 옛날 기록들이라 실전된 것도 많고 과장된 것도 많죠·”
“실전되고 남은 게 그 정도면 절대 과장이 아닌 것 같···”
“저 안 도와주시면 매일 찾아올 겁니다·”
“후배· 최선을 다해 지혜를 짜내보겠어· 제발 날 믿어다오!”
골렘 선배는 식겁해서 다시 그림을 쳐다보았다·
아르나와 계약한 후배의 예언을 해석해주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르나와 계약한 후배가 매일 찾아오는 것이었다·
“자· 보자··· 네가 왕관을 쓰고 있군· 왕관은 보통 승리와 영광 권력과 권위 불멸을 은유하는 상징이지· 내 생각에는 네가 대결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쥘 수도 있을 것 같아· 교장 선생님의 권력이라면 바로 이 영지의 교장···”
“···이거 사실 소세계 마법입니다·”
이한은 미안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누가 봐도 저 소박한 왕관은 소세계 바실리오스 마법이었던 것이다·
“····”
골렘 선배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하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흥미롭군·”
“!”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한은 펄쩍 뛰었다· 검사로서 단련된 후배답게 그 높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골렘 선배는 거의 천장까지 뛰어오른 이한을 보며 놀라워했다·
‘강화 마법 걸어놨나?’
“스승님 오셨습니까!”
“목소리가 크군· 예의범절을 갖추도록 해라·”
“스승님 오셨습니까·”
“····”
미친 분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제자가 지금 반항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미친 분신은 이한이 당황했을 뿐 건방지게 행동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제자의 예언인가?”
“예···”
“흐음·”
미친 분신은 흑색 가루로 그려진 그림을 신중하게 내려다보았다·
두 학생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눈빛만 교환했다·
‘선배님· 비장의 마법이 있으시면 지금 꺼내셔야 합니다·’
‘그런 게 있으면 내가 교수였겠지···!’
“그림은 잘 봤다· 주의해야겠군·”
“예?”
이한은 무슨 주의인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과 묻고 싶지 않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혹시 고대 왕국 시절에는 스승을 담그려는 제자를 미리 담그는 풍습도 있었을까?
“시간이 다 됐군· 다음 강의로 이동 안 하나?”
미친 분신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강의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면 움직이도록·”
* * *
광인이 가장 두렵게 느껴질 때는 멀쩡하게 행동할 때였다·
미친 분신과 같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이한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상대가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제자 너는 왜 왕족이 혜성의 움직임을 보고 점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것만 하냐? 소세계까지 같이 완성했어야지’같은 말도 안 되는 구박을 하지도 않았고 ‘왕족과 대결하려고 하다니 감히’하면서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서 걸어갈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어 이한은 지금 버두스 교수의 강의실로 가고 있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원래라면 미친 분신을 데리고 버두스 교수를 찾아간다는 사실에 두근거리고 가슴 설레어야 했는데···
“스승님?”
“무슨 연유로 왕족을 부르는 것이지?”
“생각에 잠기신 것 같아서요·”
“···혹시 제자로서 스승이 명상할 때는 마땅히 방해해야 한다고 알고 있느냐?”
미친 분신은 황당함과 경멸을 섞어 제자를 쳐다보았다·
평소 많이 보여주던 눈빛이 돌아오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걱정했잖습니까·”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느냐? 무슨 광언을···?”
제자가 연속으로 개소리를 해대자 미친 분신은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참· 지금 가는 강의는 스승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
미친 분신이 제자의 광기를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건 말건 안심한 이한은 강의 이야기를 했다·
원래 이한은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강의를 굳이 들으러 가지 않아도 됐다·
이미 지팡이를 완성시킴으로서 기말고사까지 사실상 끝내놓은 상태였고 버두스 교수는 이한이 오던 오지 않던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본인이 강의에 나오는 것도 신경 안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한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을 향해 움직였다· 이렇게 기쁜 마음은 또 처음이었다·
‘버두스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게 이렇게 즐겁다니·’
“···왕족이 만족할 거라니· 그만큼 수준 높은 강의란 뜻인가?”
“예!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수님을 처벌하셔도 좋습니다·”
“하· 제자 너는 겸손함을 처음부터 배워야겠구나· 과신은 좋지 않은 버릇이다· 그렇게 말한 이상 왕족의 처분에는 자비가 없을 것이다!”
미친 분신은 제자의 건방진 호언장담을 꾸짖었다·
저렇게 말한 이상 평가에는 한 점의 자비도 들어가지 않을 터였다·
만약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교수 또한 처벌받으리라·
“좋습니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쾅!
이한은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흥분에 선배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잘못 들었나?
“워다나즈 혹시 강의 착각한 거 아니지?”
“왜··· 신이 난 것 같지?”
“저는 강의실에 들어올 때마다 언제나 신이 났었습니다·”
‘드디어 미쳤구나!’
선배들은 경악했다·
다른 학파 소속 학생들은 부여 마법 학파가 드디어 워다나즈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긴 이상하지 않지·’
“스승님· 들어오십시오·”
“?”
학생들은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학생이 앞에 있건 말건 이한이 들어왔건 말건 자기 아티팩트를 보고 있던 버두스 교수도 왠지 모를 동물적 직감 때문에 앞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깩!”
“?!”
강의실이 무너져도 자기 작품 집중할 때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버두스 교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고 고나달테스···!”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그 분신이십니다·”
“아!”
버두스 교수는 비버 수인 특유의 귀여운 얼굴로 가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의 대충 한다고 찾아온 줄 알았어!”
‘알긴 아시는군·’
이한과 학생들은 버두스 교수를 노려보았다·
해골 교장이 에인로가드에 없자 신이 난 건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도 매우 행복해졌다·
평소라면 징벌방 걱정을 하며 강의를 날로 먹었을 텐데 이제는 당당하게 날로 먹어도 되는 것이다·
“잠깐· 분신이면 왜 여길?”
안도하던 버두스 교수는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았다·
미친 분신이라면 워다나즈를 납치해야지 왜 에인로가드 강의실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강의를 구경하고 싶어하십니다·”
“왜?”
버두스 교수는 이한한테 물었다·
이한은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미친 분신은 교수에게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왕족이 네 허락을 구해야 하나?”
“아 아니··· 들··· 들어· 마음껏 들어·”
미친 분신은 고나달테스와 똑같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차이점이 있었다·
고나달테스는 분노하더라도 버두스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미친 분신은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럼··· 강의 시작할게···”
버두스 교수는 힐끗 눈치를 본 뒤 다시 자기 아티팩트를 만지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아무 말 없이 자기 지팡이 구성을 재개했다·
“···?”
미친 분신은 고대 왕국 시절에서도 본 적 없는 참신한 강의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강의라고 하지 않았나?”
“예·”
“여기 어디에 가르침이 있지?”
“저기 교수님의 작업을 보고 훔치면 되는데요·”
“····”
미친 분신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바로 손을 휘둘렀다·
“깩!”
버두스 교수는 분신을 본 순간부터 대비했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에인로가드 교수라면 고나달테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투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찰칵!
유리 정육면체 목걸이 안에 든 소세계 마그눔 오푸스가 발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친 분신은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버두스 정도 되는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순순히 당해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고대 시절의 생존자 자격이 없었다·
“걸작은 납으로·”
언령과 함께 버두스 교수의 소세계가 그대로 취소되었다·
비버 수인의 큼지막하고 귀여운 눈망울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아무리 고유세계를 준비하지 못했다지만 소세계가 이렇게 일격에 취소되다니·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소세계의 구성을 파악하고 역마법을 건 것이다·
그것도 언령으로!
“리 리베룸 베토!”
달칵!
버두스 교수는 끽끽대며 부츠 뒷굽 안에 든 두 번째 소세계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라게사 같은 강적을 상대로 대비한 두 번째 소세계이자 마지막 구명줄이었다·
“인과는 역전되리라·”
“!”
버두스 교수는 두 번째 소세계 마법이 기록된 아티팩트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발동되는 대신 상대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마치 처음부터 상대의 보물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동해있었다·
“죄인은 수감되리라!”
그리고 버두스 교수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서 거꾸로 매달렸다·
모든 아티팩트들과 마법들이 일시에 무력화되고 그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
미친 분신은 버두스 교수를 마치 햄스터 보듯 쳐다보았다·
제자의 도주나 다른 일에 관해서 이미 몇 번의 불경함을 저질렀음에도 관대히 용서해줬건만 이렇게 뻔뻔한 놈이었을 줄이야·
“···와아아아아아아아!”
“교장 선생님 분신 만세!!!”
학생들은 책상과 의자를 넘어뜨리고 일어서더니 박수를 쳤다· 심지어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도 천천히 박수를 칠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