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화
강철구두 가문의 자룬은 늙은 드워프 광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리하르콘에 대해 해박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오리하르콘이 자룬을 밀어낸 건 오염되어서가 아니었다·
원래 완성되지 않은 오리하르콘은 탐욕스러운 침입자들을 밀어냈다· 어떤 식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오리하르콘 또한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이런 오리하르콘이 완전히 완성되면 침입자를 밀어내는 특성은 대부분 사라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면 일반적으로 고밀도의 마력응축체가 됐고 누군가 접촉해서 영향을 주거나 오염시켰다면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변했다·
“과연·”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가 그만 쉿쉿대도록 달래며(별로 효과는 없었다) 미친 분신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직접 익혀야 하는 가르침만 아니라면 미친 분신의 가르침은 대부분 유익하고 알찼다·
고대에 실전된 지식과 지혜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가끔 이한이 직접 익혀야 하는 마법들이 나와서 그렇지···
“그런데 몸에서 떼놓지 말라는 건 역시··· 마력을 많이 잡아먹어서입니까?”
“그렇다·”
‘보통 이런 걸 저주 받은 광석이라고 할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오리하르콘이 생겨나는 장소는 지하 깊은 곳에서도 그 기운이 특히 심유한 곳이었다·
어지간한 기운으로는 오리하르콘을 결정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하르콘을 발견하면 보통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 뒤 광부가 꾸준히 방문해서 돌보는 게 맞았다·
지금처럼 대뜸 뽑은 다음 마법사가 갖고 다니는 건 조금 많이 특이한 경우였고···
“그냥 여기에 두고 키우는 게 맞지 않았을까요?”
“분명 보물은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어놔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뿐만 아니라 길들이는 것까지 고려해본다면 가지고 다니는 게 유리하다·”
“아· 원하는 대로 길러진다고 하셨죠·”
생각해보니 오리하르콘은 돌보는 사람의 뜻대로 길러지는 특이한 광석·
확실히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갖고 다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마력이 미친듯이 빨려나가긴 하겠지만 그거야 뭐···
‘이미 한둘이 아니니까·’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쉿쉿대던 몬스터는 주인의 시선에 왜 그러느냐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기르는 겁니까? 말을 걸면 되나요?”
만약 그런 걸로 된다면 이한은 자기 전마다 ‘비싸고 값진 보석이 되려무나’하고 자장가를 불러줄 수도 있었다·
“오리하르콘에게 귀가 달린 것처럼 보이느냐?”
“···없긴 합니다·”
“오리하르콘을 원하는 대로 기르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광부의 성품·”
고대 시절 한 무리의 사악한 드워프 광부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마검을 만들기 위해 미완성의 오리하르콘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결국 원하던 걸 찾아낸 이들은 오리하르콘 앞에서 유혈낭자한 의식을 수행했다·
붙잡아 온 포로를 처형하는 건 물론이고 각종 고문과 인신공양까지·
종국에는 오리하르콘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서로 망치를 휘둘렀을 정도였다·
“그 오리하르콘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드워프들이 원하던 대로 사악하고 악랄한 금속이 되었다· 그 보답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드워프를 죽였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악한 드워프 광부였지만 그 최후는 허무했다·
마검을 완성시키기도 전에 오염된 오리하르콘이 무기의 형태로 변해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드워프 광부들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달랐겠지만·
‘이게 뭐가 원하는 대로 기를 수 있다는 거지?’
이한은 속으로 황당해했다·
원하는 대로 기를 수 있는 건 보통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에게 하는 소리 아닌가·
들어보니 수틀리면 검의 형태로 변해 주인의 목을 찔러버리는 금속 같은데···
저건 이한의 기준에서 전혀 원하는 대로 기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리하르콘을 원하는 대로 기르고 싶다면 최대한 선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라는 겁니까?”
“틀렸다· 그런 가식을 꾸밀 시간에 제자 네 순수한 의지로 다스리는 게 좋을 거다·”
‘···그런 게 있나?’
순수한 의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 쯤 지난 오리하르콘이 ‘황금 내놔’라고 말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쪽 소매에서는 바실리스크가 먹을 거 달라고 잉잉대고 다른 쪽 소매에서는 오리하르콘이 황금 달라고 징징대면···
‘끔찍하겠군·’
“저···”
“그만· 왕족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군· 다른 마법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그냥 그저 그렇습니다·”
미친 분신은 노골적으로 혀를 쯧 찼다·
매우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제자는 스승을 실망시키는 존재였다·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제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스승 밑에서 배운단 말인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니 그렇···”
말하던 미친 분신은 멈칫했다·
다른 차원에서 연락이 도착한 것이다·
“이쪽도 시간이 남아도나보군·”
“?!”
스승이 냉소적인 말투와 함께 허공에 마법 문자를 불러오자 이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지금 미친 분신에게 저런 연락을 보낼 사람이 얼마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혹시 야차왕 님이십니까?”
“그렇다· 물어보는 걸 보니 야차들의 문자를 배우고 싶은가보군·”
‘아닌데요·’
정말 배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미친 분신이 자기만 아는 문자를 허공에서 읽어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배워놓을 거 그랬나?
“그렇군·”
“···무슨 내용이십니까?”
“제자 네가 소세계에 입문하기 시작했다는군·”
미친 분신은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게 이한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이 저주 받을 야차 잡놈이?’
이한은 이를 갈았다·
이제까지 당한 수많은 비열한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너그럽게 넘어가줬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게 이런 기습이라니·
정말 지독히도 사악한 존재였다·
“말이 입문이지 설명만 들은 정도입니다· 아직 감도 못 잡았습니다·”
미친 분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한을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침묵이 이한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바실리오스인가?”
“···예 그렇긴 한데 정말 설명만 들은···”
“과연· 역시 그렇군·”
미친 분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보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이한은 진지하게 도주로를 고민했다·
“훌륭하다·”
“?!”
갑작스러운 칭찬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예?”
“훌륭하다고 했다· 왕족에게 칭찬을 두 번 듣고 싶은 건 이해간다만 게걸스럽게 굴지 좀 말도록·”
“···그런 게 아닙니다· 아직 감도 못 잡았는데 훌륭하다고 하셔서 그런 겁니다·”
미친 분신은 마지막으로 생각에 잠겼다·
긴 침묵 끝에 미친 분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그게 좋겠군·”
“????”
이한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상대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게 가능한 겁니까?”
“혼란스러울 법도 하겠지· 아둔한 제자를 위해 왕족이 자비를 베풀 수밖에·”
“오· 어떤 자비입니까?”
이한은 반색했다·
혹시 <쉽고 빠르게 익히는 소세계 입문서> 같은 책이라도 있나?
* * *
‘후후·’
새로운 한 주의 시작·
디레트는 지하 2층 <독 뼈 피> 강의실 입구에 두꺼비 가죽으로 만든 풍선을 걸어놓은 다음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잘 만든 것이다·
옆에서 강의실 벽에 어둠을 칠하고 있던 유크벨티레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은 네 마법에 하등 도움도···”
“닥쳐·”
“하지만 정말로 마법에···”
“시끄러·”
“비논리적으로 말을 끊는다고 디레트 네 주장이 맞는 게 되지는···”
“어· 조용히 해·”
“····”
유크벨티레는 아까보다 아주 살짝 더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벽에 어둠을 마저 칠했다·
디레트는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종종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기껏 이런 준비를 하겠다고 유크벨티레가 진 빚을 사용하다니·
용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검을 생쥐에게 휘두르는 꼴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특이한 학생을 제외한다면 학생들은 누구나 ‘내가 교수가 되면 난 다르게 행동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었다·
디레트도 그랬다·
모 교수를 비롯해 여러 삭막한 교수들 밑에서 수학했지만 디레트는 만약 자신에게도 가르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기존 교수들과는 다르게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것이다·
배우는 학생들도 즐거워서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는 모두가 행복한 강의를 선물해주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자 디레트는 강의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였다·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후배 한 명이 강의 자습부터 학파 자금까지 알아서 처리하지 않았다면 몇 배는 더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동안 여유가 없었지만 마침내 디레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클럽 주간 때문에 잠깐 강의들이 멈춘 것이다·
디레트는 그 틈을 타 이것저것 준비했다·
두꺼비 가죽으로 만든 풍선(평소 어두컴컴한 지하 강의실을 유쾌하게 만들어줬다) 어둠으로 칠한 강의실 벽(뚫어져라 쳐다보면 가끔 언데드들이 얼굴을 내밀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해골 잔에 따라놓은 딸기 슬러시(맛있다) 등등·
이걸 볼 후배가 한 명밖에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음· 빈 책상에 언데드들 소환해서 앉혀놓을까? 축제 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나도록?”
“····”
유크벨티레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디레트는 친구가 입을 열 때까지 쿡쿡 찔렀다·
“···정말로 쓸데없고 의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
“그래· 해야겠다·”
“····”
디레트는 친구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든 말든 언데드를 소환해서 의자에 앉혔다·
준비하다보니 새삼 이걸 올해 1학년 후배들 앞에서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흑마법 학파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몇 배는 늘었을 텐데·
‘후배가 들어와서 이거 보면 놀라서 넘어지는 거 아니야?’
축제 같은(흑마법 기준으로) 강의실 분위기는 디레트가 그런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도시에서 <흑마법사 축제>로 진행해도 될 것 같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한은 평소와 많이 다른 강의실 모습에 멈칫했다·
‘뭐지? 함정인가?’
“놀랐지!”
디레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확히···”
“강의가 쉬는 동안 강의실을 좀 꾸며봤어· 즐겁고 유쾌하게 배울 수 있도록!”
“아·”
그제야 이한은 변화한 강의실의 목적을 깨달았다·
축제 같은 거구나!
‘함정이 아니었군·’
목적만 알면 대답도 쉬웠다·
“너무 멋집니다· 선배! 아마 에인로가드에서 가장 멋진 강의실일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가 이런 곳에서 배운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질투하겠는데요?”
단련된 후배의 노련한 반응은 디레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 정말?”
“예· 그런데 선배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후배· 편하게 말해· 우린 같은 학파잖아?”
행복해진 디레트는 선배 뒤에 ‘님’자가 어느새 추가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강의를 한 분이 더 들으실 것 같은데요·”
“난 괜찮아· 누군데?”
에인로가드에서 청강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수강하는 강의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있다면 잠깐 방문해서 들어도 됐다·
디레트는 이한의 친구 중 한 명이 흑마법적 지식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 분이십니다·”
“마법사· 가르침을 시작하도록·”
후배와 떠들고 있는 사이 어느새 조용히 강의실에 들어와 앉아 있는 미친 분신의 모습에 디레트는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