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화
야차왕은 이한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렵지 않다· 오수의 제자· 세계가 너를 불렀다면 그건 명약관화한 일이지·
“어떤···?”
말했듯이 명약관화하다· 수준을 봤을 때 소세계로의 입문을 시작하란 거겠지· 사승(師承)까지 감안한다면··· 오수의 소세계가 적합하겠군·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좀 더 쉽지 않겠습니까?”
이한은 말하고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이런 대화를 예전에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인가?
오수의 제자· 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은 마법사들을 만나왔고 그 마법의 비의를 들어왔다· 그런 내 지혜를 그리 멋대로 의심하다니· 치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통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생각났습니다·”
뭐가 생각났단 말인가?
“이거 별 계약 때 하셨던 말 아닙니까!”
이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이를 갈았다·
왜 이렇게 익숙한가 싶었더니 예전에 한 번 당해서였다·
시험을 도와주겠다고 꼬드겨서 믿었더니 관련도 없는 별과의 계약을 추천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후로 겪었던 수많은 고난과 시련들이 별과의 계약 때문이 아닌지 의심됐다·
그놈의 객성이니 뭐니···!
그러나 야차왕은 과연 왕답게 뻔뻔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황금빛 눈동자를 깜박이며 말했다·
오수의 제자· 그 일을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건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이 뻗은 손가락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낱 점에 불과할 뿐이지· 그렇기에···
‘정말 더럽게 뻔뻔하시군·’
야차왕은 세상의 일이란 짧게 보면 그 진의를 알 수 없다고 설득했다·
예를 들어 여기 강을 건너 이웃 마을로 가려는 한 소년이 있다고 쳐보자·
홍수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 다리는 곧 무너질 것이고 원래라면 소년 또한 휩쓸리게 됐다·
미래를 알고 있는 야차왕은 소년을 구하기 위해 쥐로 변해 짐을 훔친 뒤 도망쳤다·
물론 소년은 짐을 뺏긴 일에 펄펄 뛰며 분노했지만 나중에 다리가 떠내려간 걸 보고 자신의 행운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
당연히 이한은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위엄 넘치는 야차왕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재 야차왕은 버두스 교수가 있는 위치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별과 계약한 게 훗날의 시험을 위해 미리 준비한 걸 수도 있다 이 말이십니까?”
드디어 조금 현명하게 구는구나·
‘덤비면 내가 지겠지?’
이한은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상대의 궁전에서 덤벼드는 건 승산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오수의 제자여· 잘 생각해보도록 하라· 설령 왕의 예측이 틀렸다 하자· 그러면 그 뒤의 예측도 전부 틀려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지금 배워야 하는 마법에 대해 다른 추측이라도 있는 것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예측을 헐뜯고 늘어질 이유가 없겠군?
이한은 침묵했다·
버두스 교수보다 더 짜증나는 게 있다면 그건 버두스 교수가 맞는 말을 할 때였다·
야차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세계는 이제까지 이한이 배운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마법·
심지어 그게 해골 교장의 소세계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한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야차왕 같은 초월자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괜히 무례하게 굴어서 받을 도움도 쳐내면 안 됐다·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부디 그 전에 꿈에서 깨길 빌며 이한은 부탁했다·
* * *
범용한 마법사라면 소세계 하나로 그 진전이 끝난다·
야차왕은 이한을 앉혀 놓고 마법 강의를 시작했다·
고유세계와 달리 소세계는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수가 가능함에도 그렇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오수의 제자?
“아무래도 완전한 이해와 체득이 어려워서 아니겠습니까·”
고유세계에 비해 그 범위가 좁고 자격을 덜 따진다지만 소세계 또한 세계의 법칙을 바꾸는 비의·
세계의 법칙을 이용하는 마법과는 본질적으로 그 이치가 달랐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이한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알았다·
어떤 마법은 단순히 암기하고 훈련하는 것만으로 시전할 수 없듯이 소세계 또한 그런 마법에 속했다·
하나의 세계·
즉 소세계를 만든 마법사의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사 자신과 맞지 않는 소세계를 억지로 시전할 수는 없었다· 만약 소세계 <금화펑펑낭비탕진> 같은 마법이 있다면 이한은 평생 익히기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 그나마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수되는 소세계는 가능성이 높은 편이지·
아무래도 스승과 제자는 서로 사고방식이 닮기 쉬운 만큼 전수 가능성도 높은 편이었다·
“안타깝습니다· 저는 스승님과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서 어려울지도요·”
야차왕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이한의 말을 무시했다·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은 마법사들을 만난 왕의 눈에도 오수는 천인(天人)의 자질이 있었지· 그래서 그만큼 여러 소세계를 계승하고 창조할 수 있었다· 오수의 제자여· 먼저 네가 본 소세계를 말해봐라·
“음·”
이한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먼저 소세계 덴드로비움과 소세계 바실리오스가 있었다·
검은 책이 (강제로) 시전해서 보여줬던 강력한 소세계 마법·
각자 거대한 나무와 소박한 왕관으로 대표되는 이 두 마법은 아직도 완전히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마법이었다·
덴드로비움은 나뭇가지 끝에 피는 꽃의 색에 따라 법칙이 바뀌는 것 같았고 바실리오스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더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소세계 휘도르· 과거에서 봤습니다· 물방울 하나로 악마들을 쓸어버리던데요·”
휘도르는 오수의 제자 네가 지금 익히기 힘들다·
“···아니· 지금 제가 익히고 싶다고 한 말이 아니라···”
불가능하진 않다· 제마멸사의 뇌창을 만들어서 모독자를 격멸했다지? 휘도르 또한 그런 이치로 완성된 소세계다· 훨씬 더 고등한 개념이 압축되어 있지만 말이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이한은 경악했다·
소세계 휘도르가 제마멸사의 뇌창과 비슷한 원리라는 건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았다·
물방울 하나로 모든 적을 파괴하려면 결국 원소 마법의 극한일 테니 비슷한 원리로 수렴진화할 것 아닌가·
하지만 여기 있는 야차왕이 그랑덴 시에서 있었던 사투를 파악하고 있는 건 정말 놀라웠다·
‘혹시 알시클 님이 첩자인가??’
오수의 제자여· 차원은 의외로 소문이 빠르다는 걸 잊지 말도록· 언데드 계(界)는 모독자의 굴욕으로 소란스럽던데·
“····”
제국의 마법사들이 다른 차원의 강자들을 파악해놓듯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도 대륙의 마법사 중 비범한 자들은 미리 주목해놓기 마련이었다·
저번에 있었던 사투로 언데드 차원의 존재들은 이한이란 마법사에 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못 들은 걸로 해야지·’
이한은 빠르게 현실부정했다· 지금 너무 걱정할 게 많아서 이것까지 걱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나미스··· 이 뒤나미스는 뭡니까? 저번에 야차왕 님께서 하라고 해서 말하긴 했었는데·”
저번에 미친 분신이 정말로 미쳤을 때 야차왕은 분신을 기습하기 위해 이한에게 ‘뒤나미스의 비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으니 데스포티스를 시전해보겠다’를 그대로 따라하라고 조언했었다·
반신반의했던 이한이었지만 그 효과는 정말로 뛰어났다· 그렇게 대단했던 미친 분신이 무심코 뛰쳐나왔다가 그대로 기습당한 것이다·
뒤나미스는 오수의 제자 네가 지금 익히기 위험하다·
“····”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야차왕과 달리 이한은 이미 미친 분신에게 뒤나미스를 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는 긴급 상황이라 넘어갈지도 몰랐지만 만약 나중에 ‘뒤나미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남은 건 덴드로비움과 바실리오스입니까?”
그 중에서도 바실리오스겠군· 덴드로비움은 왕족의 묘목이 필요해서 오수의 제자 네가 당장 익힐 수는 없다·
이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익힐 때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바실리오스에 입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도록· 바실리오스는 왕관이다· 왕관을 쓰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지·
“고대 왕국의 혈통을 말하시는 겁니까?”
마법사의 질문에 야차왕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땅 위의 왕국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오수의 제자· 마법사의 왕관이 그렇게 속물적일 리가 있겠나· 하늘의 왕국은 혈통으로 왕관을 쓸 수가 없다· 잘 생각해보도록 하라·
“?”
고민하던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안 알려주시는 겁니까?”
오수의 제자· 이건 왕이 알려주면 오히려 네게 해가 되는···
‘아니· 뭐야 이 사람?’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까지 긴 장황설을 참고 들어준 이유는 그래도 야차왕이 비범한 능력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소세계 중 어떤 소세계가 입문하기 좋고 그 입문 방법도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해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스스로 생각해보라니·
“애초에 그럴 수 있었다면 제가 벌써 스스로 입문했을 겁니다·”
그렇다· 이제 세계가 왜 널 불렀는지 알겠나? 네가 스스로 입문할 수 있기에 부른 것이다·
“····”
살면서 부여 마법 학파 선배들이 그리워질 줄이야·
이한은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을 전환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았다·
저 멀리 시선을 던지자 대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까마득한 구산팔해의 차원이 눈에 들어왔다·
빛과 어둠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던 지형은 마치 안개가 옅어지고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궁전 아래 골짜기에는 숲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숲의 나무와 풀들은 온통 칼날과 강철이었고 이파리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그 살풍경한 모습은 이한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로만 정리될 뿐이었다·
도산검림(刀山劍林)·
“저긴 뭡니까?”
흐음· 죄인들을 가둬놓는 숲이군·
“여기도 그런 게 있습니까?”
일반적이지는 않다· 오수의 제자· 보통 죄인들을 가둬놓지는 않지· 하지만 저들은 조금 특별하거든·
야차왕은 크게 웃으며 설명했다·
먼 옛날 오수가 이 차원에 왔을 때 야차왕은 마법사의 고행을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그 때 모여든 추종자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새로운 강자 새로운 왕이 탄생할 줄 알고 그 밑에 모인 부랑자와 무뢰배들·
“···아니 스승님을 추종했다고 저렇게 가둬놓으신 겁니까?!”
오수의 제자· 가끔 보면 상상력이 꽤 풍부하군· 오수를 배신한 이들이라 내가 저렇게 가둬놓은 거다·
“아·”
젊은 시절 해골 교장은 이 차원 곳곳을 쏘다니며 비의를 찾아 헤맸다·
그 과정에서 공격도 당하고 사기도 당한 만큼 여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으리라·
당연히 모여든 추종자들 중에서 이탈하고 배신하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과연·”
이한은 관심을 끄고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바실리오스의 자격이 대체 무엇일까···
···오수의 제자· 스승을 배신한 저들이 증오스럽지 않나?
“예? 뭐 이제 와서 새삼···”
뜬금없는 질문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정말 배신이 원한에 사무쳤다면 해골 교장이 직접 와서 에인로가드로 데려갔을 것 아닌가·
충분히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굳이 이한이 증오할 이유가 없었다·
시작이 좋군· 바로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
이한은 더더욱 혼란 속에 빠졌다·
시작이 좋다니·
혹시 해골 교장과 관련된 것들은 무조건 엮이지 말고 피하란 뜻인가?
‘그럼 이미 늦은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