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8화
휴식 시간·
마법사들은 각자 소모된 것들을 보충하느라 바빴다·
시군팅은 마력 물약을 마신 뒤 쇠뇌용 볼트의 촉을 점검하고 마법이 약해진 게 있다면 추가로 마법을 시전했다·
시약주머니에서 꺼낸 적자색 가루를 조금씩 쇠뇌의 파인 홈에 뿌리고 특별 제조한 용액을 뿌리고···
‘과연·’
이한은 옆에서 흥미롭게 보고 배웠다·
사실 부여 마법 학파에서는 버두스 교수한테 직접 배운 것보다 이렇게 선배들 걸 보고 배운 게 더 많았다·
“시군팅 선배님·”
“왜?”
유크벨티레가 말을 걸면 ‘뭐요 선배’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시군팅이었지만 이한은 그래도 나름 후배라고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마법을 좀 배우고 싶습니다만·”
현재 부여 마법 학파 선배들은 각자 자신만의 특출난 장점이 있었다·
시군팅 같은 경우는 아까 남쪽 동굴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쇠뇌 하나만으로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처음에는 ‘쇠뇌 하나에 잡화점을 차리셨나’하던 이한도 보다보니 살짝 솔깃해진 것이다·
저런 무기를 하나 만들어놓으면 앞으로 이한도 굳이 일일이 마법을 시전해서 원거리 무기를 만드는 대신 간편하게 꺼내서 툭툭 갈겨댈 수 있으리라·
“그렇군· 그럴 법도 하지·”
드워프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쇠뇌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녹슨 싸구려 쇠뇌를 꺼냈다·
“일회용 아티팩트로 이런 쇠뇌를 구현하고 싶다는 거겠지?”
“···????”
하지도 않은 말을 선배가 꺼내자 이한은 당황했다·
“일회용 아티팩트요?”
“네 연구 주제 아닌가?”
“···?”
이한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연구 주제라니·
그런 걸 정한 기억이 없는 만큼 더더욱 그랬다·
‘혹시 나 몰래 버두스 교수가 내 이름으로 연구 주제 정한 다음 제국 수도에서 지원금 타먹었나??’
버두스 교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이한은 버두스 교수를 믿기보다는 제국 관료들을 믿었다·
분명 버두스 교수가 끼어 있었다면 이중 삼중으로 확인을 했을 터·
“작년에도 만들었다면서·”
시군팅은 혼란스러워하는 후배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설명했다·
이한은 작년 버두스 교수 밑에서 배울 때부터 일회용 아티팩트에 깊은 관심을 보였었다·
버두스 교수가 아쿠아마린이나 정령고래 가죽을 써서 가죽 물통 아티팩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도 굳이 그런 비싼 재료를 쓸 필요 없다고 사슴 가죽 코야크 실 구리 반지만을 써서 아티팩트를 만들지 않았던가·
부족한 성능은 막대한 마력을 투입해서 어떻게든 커버했었다·
아티팩트의 수명은 짧아지겠지만 애초에 영구 아티팩트가 아니라 일회용 아티팩트를 만드는 작업·
사실상 간이 아티팩트에 가까운 만큼 그런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 생각에도 그건 꽤 흥미로운 주제다· 잘 골랐어· 사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주는 거기도 하고···”
시군팅은 후배의 연구 주제를 마음에 들어했다·
아티팩트 장인들은 언제나 영구성과 영원성에 몰두했지만 가끔 거기서 벗어나면 더 넓은 세계가 보이곤 했다·
단 한 번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아티팩트의 각종 제약을 벗어나 강력한 화력과 출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아티팩트 장인은 떠올릴 수 없는 대가문 출신 귀족만이 떠올릴 수 있는 대담하고 배포 큰 연구 주제였다·
“····”
이한은 아까 동굴에서 몰려드는 적을 혼자서 막았을 때보다 경악했다·
‘싸게 만들어서 싸게 팔려고 한 건데 뭔···?’
이한이 가죽 물통 아티팩트를 만든 건 외출 시 초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아쿠아마린이나 정령고래 가죽을 쓰라는 버두스 교수의 조언은 당연히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제국 유명 장인이야 각종 후원과 지원 그리고 비싼 보수를 받으니 저런 재료를 쓸 수 있다지만 이한은 아직 무명 마법사 아닌가·
당연히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인데 무슨 대가문 출신 귀족만이 떠올릴 수 있는 대담하고 배포 큰 연구 주제라니·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버두스 교수님이··· 아니· 버두스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는데?”
“역시 똑똑하군· 당연하지· 가르시아 교수님이 이야기해주셨다·”
‘···가르시아 교수님 혹시 학생들 옷에 도청 아티팩트 달아놓은 건 아니겠지?’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 봐라· 일회용 아티팩트로 내 쇠뇌를 구현하려면···”
“그런데 선배님· 제 연구 주제가 이런 일회용 아티팩트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
시군팅은 설명해주려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유크벨티레를 쳐다보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뜻이 전해졌다·
-난 내가 관심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선배도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을 한다!
시군팅에게 유크벨티레 같은 사람이 되어 무시 받고 싶지는 않았던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사실 제 연구 주제는 일회용 아티팩트가 맞습니다· 마저 설명해주시죠·”
“역시 넌 평범한 후배가 아니라니까· 아주 비범해·”
시군팅은 자신의 쇠뇌를 일회용 아티팩트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안했다·
재료는 안정성 지속성 영구성보다는 폭발력 화력 출력(그리고 불안정성)에 중점을 둔다·
“···좀 더 싼 재료는 없습니까?”
“뭐? 왜? 이것보다 더 싼 재료를 쓰면 더 불안정하고 위험해질 텐데·”
“···저는 그런 위험을 즐깁니다· 그런 불안정과 위험을 통제하면서 제 마법이 끓어오르는 걸 느끼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 미친 녀석 같으니!”
시군팅은 더더욱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그가 사람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후배의 욕망에 따라 시군팅은 마법과 주문 구성을 조정했다·
안정성이나 마법사를 도와주는 조정은 다 빼버리고···
“휘유· 이건 잘못 쓰면 마법사 얼굴을 갈기겠는데· 워다나즈· 나중에 만들어서 쓰면 꼭 소감을 들려줬으면 좋겠군·”
시군팅은 단단히 부탁했다·
자신은 능력도 가문도 부족해서 다루지 못했지만 후배가 이 연구 주제를 어떻게 꽃피울지는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기분 탓인지 후배는 아까보다 살짝 기운이 없어 보였다·
시군팅은 그게 유크벨티레 선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크벨티레 선배한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물약을 나눠준 탓에···
“혹시 마지막으로 조언해주실 거 있으십니까?”
“있지·”
“오· 뭡니까?”
“유크벨티레 선배한테 물약 나눠주지 마· 쓸데없는 낭비다·”
“···마법적인 조언 말입니다·”
* * *
“조언?”
바닥에 진흙으로 된 작은 탑을 쌓아 올리던 안파곤은 의아해했다·
“예·”
“유크벨티레 선배한테 음식 나눠주지 마· 쓸데없는 낭비···”
“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마법적인 조언 말입니다·”
“흠·”
이한과 같은 탑인 3학년 소년은 고민했다·
부여 마법 학파 중에서 가장 사교적이기도 하고 같은 탑이기도 한 만큼 도와주고 싶었지만(유크벨티레는 제외였다)···
“난 너와 연구 주제가 너무 다른데·”
“···혹시 일회용 아티팩트요?”
“그거 말고 다른 주제도 있었냐? 대단하군· 역시 전 학파를 듣는 녀석은 달라도···”
‘아니· 이 사람들 서로 이야기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평소 필요한 대화는 안 하면서 이딴 쓰레기 같은 소문은 왜 이렇게 다 안단 말인가?
“선배님하고 주제가 다르다니 아· 혹시 아까 싸울 때 소환하신 거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안파곤의 전공은 건축물이었다·
그렇지만 살코처럼 영구히 남는 건축물 같은 건 아니었다· 안파곤은 마법 구조물을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소환하고 되돌리는 것에 능했다·
아까 전투에서 간이 요새를 소환하려고 했던 것도(물론 후배가 그 전에 다 끝내버려서 못했다) 그 중 하나·
그런 만큼 일회용 아티팩트를 연구하려는 후배한테는 크게 도움이···
“아· 아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구조물도 더 간략화시켜서 일회용에 가깝게 만들 방법이 있겠군·”
“굳이 일회용으로 안 만드셔도 됩니다만·”
이한은 멀쩡한 구조물 소환 마법이 더 궁금했지만 안파곤은 굳이 개량을 선택했다·
후배 입장에서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 * *
유크벨티레는 식사 대용 물약을 먹는 대신 초콜릿 크림 웨이퍼 과자를 먹어야 했다·
조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유크벨티레는 얌전히 먹고 영양을 보충했다·
“····”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이한은 선배가 빤히 쳐다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혹시 몰라서 지팡이를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식사 대용 물약이 나았어’같은 소리를 한다면 스스로를 통제해야 했다·
“이건 어느 가문의 제품이지?”
“예?”
“이 과자· 메이킨 가문의 새로 나온 제품인가?”
“제가 만든 건데요·”
“···!”
유크벨티레는 경악했다·
저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남는 시간에 오븐에 버터 섞은 밀가루 반죽을 넣고 구운 뒤···
···그 다음은 어떻게 했을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유크벨티레는 요리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간 낭비를 했다고?”
“그 다음에는 크림을 바르거나 초콜릿 코팅을 합니다· 보통· 왜요· 뭐 불만 있으십니까?”
이한의 목소리에는 살기 불만 협박 위협이 가득했다·
유크벨티레는 고개를 젓더니 대답했다·
“합리적으로 당분을 섭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따로 구매하려고 했어·”
“···더 드시죠! 선배님!”
이한은 방금 툴툴댔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마냥 활짝 웃었다· 그러나 유크벨티레는 즉답했다·
“배부른데·”
“···다른 분들 혹시 관심 없으십니까?”
“물약 마셔서 괜찮다·”
“난 간식 먹는 걸 안 좋아해·”
“····”
이한은 갑자기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 * *
오수의 제자· 오랜만이군·
이한을 저렇게 모욕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휴식 도중 잠시 꾼 꿈·
그 꿈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이한은 이미 야차왕의 궁전에 도착해있었다·
“····”
이한은 검은 책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이제는 별개 차원도 아니라 바로 야차왕의 궁전으로 사람을 보낸단 말인가?
검은 책은 오해라는 듯이 펄쩍 뛰었다·
이번에는 책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세계가 오수의 제자 너를 부른 걸 보니 분명 선업을 쌓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예? 아닌데요?”
이한은 뭔 개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어떤 미친 선배가 오리하르콘 광맥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선배들하고 그걸 뺏으려고···”
겉으로 보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오수의 제자·
“····”
야차왕은 현기(玄機)가 번뜩이는 태도로 말했지만 이미 삐딱해진 이한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헛소리 해놓고 그럴듯하게 말해서 넘어가려는 수작 아닌가?’
세계는 시방삼세(十方三世)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지· 너 자신의 눈을 믿지 말고 세계를 믿어라·
“저 돌아가도 됩니까?”
돌아가야 할 때면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겠지· 흐음· 오수의 제자· 네가 오늘 유독 불만스러워보이는 건 왕이 스승에게 보인 무례 때문이겠지?
“····”
하지만 오수의 광증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스승을 존경하는 그 태도가 기특하구나·
이한은 이를 갈았다·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상대가 의도 왜곡 마법으로 왜곡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독한 강적이 존재할 줄이야·
“무슨 마법을 배워야 돌아갈 수 있습니까?”
마법을 향한 야망과 탐욕 본색을 드러내는군? 오수의 제자·
“···예· 제가 그렇습니다· 마법에 미친놈이죠·”
이한은 반쯤 자포자기해서 대답했다·
시군팅 앞에서 포기하고 나니 그 다음은 더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