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7화
후배가 ‘이제는 나만을 위해 살겠다’라고 결심하는 동안에도 선배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한이 보온 마법 유리병에 담긴 뜨끈한 홍차를 꺼내고 향신료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군·’
방금 신경 안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이한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이난도를 비롯해 2학년 친구들은 음식만 꺼내놓으면 새끼 바실리스크마냥 애틋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에인로가드에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은 세이렌의 노래 같은 거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부여 마법 학파 선배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일에만 집중했다· 괜히 버두스 교수 밑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순간 이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건 일 년 반 가까이 에인로가드의 보모로 활약한 사람의 자부심이었다·
감히 자신이 준비해 온 간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면 좋은 거지 왜 불평한단 말인가·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시군팅 선배님은 뭐 하십니까?”
“아티팩트 점검 중이다·”
이한보다 한 학년 위인 드워프 소년은 다양한 흐름의 마력이 느껴지는 쇠뇌를 점검하며 말했다·
지하로 내려온 만큼 아무리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에인로가드에서 자기 몸은 자신이 지켜야 했다·
“과연· 다양한 마법이 걸려 있군요·”
쇠뇌에 장전된 볼트의 촉에서 느껴지는 마법은 적 추적과 유도 계열·
아마 솜씨 없는 마법사도 명사수로 만들어줄 것이다·
짤막한 볼트 뒤에 달린 화살깃에는 가속과 관통 강화 계열 마법·
이 정도 마력량과 주문 구성이라면 빗겨서 맞더라도 그대로 강철 방패를 꿰뚫어버릴 수 있었다·
거기에 활틀에는 암흑 시야와 시야 강화 마법이 장전 장치에는 자신감 고양과 계산 보조 마법 작도 보조 마법이···
“···?”
이한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봤다· 하지만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선배님· 혹시 이 쇠뇌에는 계산 보조 마법이나 작도 보조 마법이 걸려 있는 거 아닙니까?”
“···맞아!”
시군팅은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는데 이 아티팩트에 걸린 마법을 먼저 분석해낼 줄이야·
괜히 다른 마법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었다·
“놀랍군· 어떻게 알았지?”
“쇠뇌에 계산 보조나 작도 보조는 왜 필요한 겁니까? 조준도 어차피 마법이 할 텐데요···”
이한이 생각하기에는 저런 마법을 넣을 자리에 다른 전투용 마법을 하나라도 더 구겨 넣는 게 맞았다·
그러나 시군팅은 후배를 전투에 미친 마법사 보듯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미 전투력은 충분하니 평소에 쓸 마법을 넣어야지·”
“평소에 쓸···?”
“그래·”
이한은 계산이나 작도를 평소에 언제 쓰냐고 물으려다가 무심코 옆을 보았다·
유크벨티레와 안파곤이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열심히 아티팩트 설계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과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럴 수 있지· 워다나즈· 너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이런 아티팩트를 갖고 다니는 게 좋을 거다·”
“그렇군요···”
선배에게 조언을 받은 이한은 들고 있던 보온 마법 유리병과 샌드위치 포장지를 슬쩍 배낭에 집어넣었다·
저렇게 공부하는 선배들을 보니 괜히 부끄러웠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럼 이거 말고 다른 전투용 아티팩트는 뭘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게 전부인데?”
시군팅은 후배가 뭘 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움에 미친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면 보통 마법사는 전투 수단을 여러 개 갖고 오지 않았다·
마법은 연구와 비원 달성의 길이었지 전투의 도구가 아닌 것이다·
“혹시 워다나즈 너는 전투용 아티팩트가 여러 개냐?”
“저··· 저도 하나죠· 하하·”
이한은 슬쩍 말을 돌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팡이 하나로 많은 마법을 시전하니 하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마 상대가 납득하진 않겠지만···
“저는 그러면 다른 선배님들하고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저 녀석은 실력은 뛰어나지만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자주 낭비하는군·’
시군팅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 *
에인로가드 지하 광산 구역에는 다양한 괴물들이 돌아다녔다·
원시 마법을 쓸 줄 아는 반인반수의 악어 괴물 쿠카·
희귀한 금속을 찾아다니며 울어대는 새 알리칸토·
오염된 흙이나 금속에 마력이 깃들어 자연적으로 탄생한 야생 골렘들까지·
영리한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이런 적과 맞서 싸우지 않았다·
광산의 괴물을 잡는다고 누가 훈장을 달아주는 것도 아닌 만큼 회피가 가장 좋은 방법···
-그르르르륵!
해골과 금속이 달린 세 갈래 나뭇가지를 흔들던 악어 괴물이 울부짖으며 도망쳤다·
마법사 놈한테 저주를 걸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바로 반격이 날아왔다·
염동력으로 움직임이 묶인 뒤 진흙 벽도 으깨버리는 물의 포탄이 살벌하게 날아들자 쿠카는 자신이 적을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쫓을까요? 그러고 보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회피가 가장 좋은 방법··· 아니·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군·”
유크벨티레는 하려던 말을 바로 바꿨다·
후배의 전투력을 보니 생각해보니 굳이 회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호위를 비롯해 여러 상황을 생각하고 데리고 왔지만 이렇게 잘 싸울 줄이야·
“남쪽 동굴로 내려가서 직행하자·”
“그런데 유크벨티레 선배님· 여기는 인기척이 없는데 괜찮은 거 맞습니까?”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닐리아에게 시간 될 때마다 그림자 순찰대 교육을 받은 만큼 이한은 이런 부분에서도 꽤 요령이 늘어난 상태였다·
캄캄한 지하 광산 구역이라 하더라도 레인저나 순찰대의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 법·
옆으로 빙 돌아가는 서쪽 경사로는 지나갔던 학생들의 흔적이 꽤 많이 보였다·
그러나 남쪽 동굴 쪽은 누가 봐도 사람들이 한동안 오고 가지 않은 길처럼 보였다·
정말 가도 되는 게 맞나?
“물론이지·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 혹시 내 판단을 못 믿는 건가?”
“네? 네·”
“믿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럼 가자·”
‘분명히 <네>라고 했는데·’
이한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못 믿겠다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대답을 수정해서 듣는다니·
그리고 1시간 후·
“헉 헉헉·”
학생들은 지친 표정으로 헐떡이며 동굴 반대쪽 출구로 걸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이한은 특히 피곤해보였다·
아무래도 일행의 전위를 맡아 달려드는 적들을 혼자서 막은 만큼 어쩔 수 없었다·
남쪽 동굴은 이한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험한 곳이었다·
악어 괴물 쿠카 수십 마리가 침입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우르르 뛰쳐나오고 벽에서는 야생 골렘들이 쏟아져 내리는 곳·
이한은 괴물들이 날리는 저주는 그냥 몸으로 막아내고 야생 골렘은 염동력과 검술로 막아섰다·
-선배님! 광역 마법 언제 완성됩니까!
-어느 선배?
-···유크벨티레 선배님이요!
-아! 유크벨티레 선배 언제 완성됩니까?!
-28초 더·
-그럼 다른 분들이라도 지원 사격 좀 해주시죠!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법을 쓸 틈이 없어요!
-일단 내가 소형 요새를 소환하겠다· 워다나즈· 요새 뒤로 피해ㄹ··· 아니 혼자 다 잡았냐?
마력 염동력 검술 셋 중 하나만 없었어도 금세 뚫렸을 만큼 적들의 공세는 매서웠다·
지팡이와 검을 다시 집어넣은 뒤 이한은 유크벨티레에게 다가갔다·
치열한 격전 도중 공격이 날아왔는지 상대의 가방 일부분이 부서져 있는 게 보였다· 유크벨티레는 그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유크벨티레 선배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래·”
“혹시 원래라면 이쪽 길로 안 오는데 제가 있어서 이쪽으로 온 겁니까?”
건방지고 오만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곳이었는데 전투 마법사도 아닌 선배들이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볼라디 교수도 아니고 굳이 더 위험한 곳으로 갈 리가···
“그래·”
“···그러니까 제가 저런 괴물들 상대로 마법 저항력도 뛰어나고 근접 전투력도 있으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오신 거라고요?”
“응·”
“혹시 위험하거나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안 해보셨겠죠?”
유크벨티레는 후배가 왜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싶어 의아해했다·
“성공할 거라고 계산했지· 실제로 성공했고· 왜 자꾸 묻는 거지?”
이한은 디레트 선배한테 물어보지 않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 걸 깊이 후회했다·
악마의 제안은 원래 유혹적이고 달콤해 보이기 마련인데 거기에 넘어가다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꽉!
다행히 아까 골렘 상대로 검을 많이 휘두른 탓에 선배에게 휘두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유크벨티레는 파손 상황 확인을 끝냈다·
“···물약이 부서졌군·”
“!”
마력 회복 물약부터 시작해서 영양 보충 물약까지·
체력 부족하고 단련 안 된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에게 이런 물약은 상당히 중요했다· 유크벨티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다른 분들은 넉넉히 갖고 오셨을 테니까 나눠주시면 안 됩니까?”
“싫은데·”
“싫어·”
안파곤과 시군팅은 즉시 거절했다·
이한은 경악해하며 되물었다·
“아 아니· 이유라도 있습니까?”
“줄 이유가 없잖아·”
“같은 학파인데···”
두 선배는 이한이 희한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같은 학파인 게 뭐 어쩌라고?
이한은 자신이 미치광이 사이의 정상인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워다나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라· 만약 내가 내 몫의 물약을 잃어버리면 유크벨티레 선배가 나눠줬겠나?”
“그거야 나눠주셨겠죠·”
“안 나눠줄 건데·”
“····”
뒤에서 들려오는 유크벨티레의 대답에 이한은 인상을 팍 썼다·
정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요?”
“물약 관리도 마법사가 해야 할 몫이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유크벨티레 선배님이 없으면 우리도 곤란하잖습니까·”
이한은 재빨리 뒤를 무시하고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두 선배를 불렀다·
“자룬 선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건 유크벨티레 선배님 아닙니까?”
“찾는 수단을 우리한테 주고 선배는 돌아가면 되지·”
“유크벨티레 선배님이 그딴 양보를 할 리가 없···”
“할 거다·”
“····”
콰직!
시군팅은 순간 통로 바깥 쪽 바위가 쪼개지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설마 무영창 염동력으로 저 정도 거리에 있는 바위를??
“···또 왜요?”
이한의 질문에 유크벨티레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제안한 의뢰니까 당연한 일인데·”
물약 관리를 못한 건 유크벨티레의 실수였고 학생들을 모아서 내려온 건 유크벨티레의 제안이었다·
합리적인 에인로가드 부여 마법 학파 학생이라면 이럴 때 자룬의 위치를 넘겨주고 자신은 혼자서 쓸쓸히 위로 올라가야 하는 법·
“···그냥 제가 물약 나눠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올라가서 갚으시죠·”
후배의 제안에 안파곤과 시군팅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 그런 짓을?”
“워다나즈는 마력이 넘쳐서 그런 거 아닙니까?”
“마력이 넘쳐도 왜 선배한테 물약을 버리지?”
“확실히···”
‘다 패버리고 싶군·’
뒤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하고 이한은 배낭에서 물약을 꺼냈다·
물약을 받은 유크벨티레가 물었다·
“식사 대용 물약이 없는데···”
“···그냥 음식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거나 드세요·”
유크벨티레는 ‘그건 오래 걸리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본능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가끔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있는 법·
소(小) 버두스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에도 불구하고 유크벨티레는 확실히 스승보다는 눈치가 있는 편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