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화
‘이건··· 눈물인가?’
카르넬라는 자신의 뺨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후배가 포위당한 상황에 대한 걱정의 눈물은 당연히 아니었고 기쁨의 눈물이었다·
무너진 적 진형이 텅 비었다!
“들어가! 들어가!”
“호르마시· 왼쪽으로! 내가 후배를 도와주겠··· 야!”
카르넬라는 선배가 뭐라고 하든 말든 무시하고 강아지를 재촉했다· 머리 세 개 달린 지옥의 짐승이 유황 숨결을 뱉으며 경기장을 내달렸다·
지금은 후배를 포위 안에서 구출한 뒤 데리고 나올 때가 아니었다·
상대가 혼란에 빠진 이상 더 세게 때릴 때였다·
“선배님!”
놀랍게도 후배는 적진 한복판에 포위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카르넬라의 움직임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챘다·
기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마치 모든 걸 그리폰에게 맡겨놓고서 주변만 둘러보고 있다가 반응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됐다·
방금 그리폰이 보여준 모습은 진정한 기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광란의 질주였으니까·
주인과 탈것의 마음이 진정 하나로 일치하지 않았다면 그런 위용을 보여줄 수 없었다·
‘후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선수다!’
카르넬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 후배가 카르넬라보다 아주 조금 더 뛰어난 격구 선수일지도 모른다고!
저렇게 날뛰는 와중에 카르넬라가 오는 것까지 알아차리다니·
쉭-!
이한이 정확하게 공을 쳐서 날렸다· 카르넬라는 그대로 받은 뒤 골대를 향해 질주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잘했어 후배! 이 호르마시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폰리그가 다 했습니다!”
“굳이 겸손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알겠어!”
“아니 진짜 폰리그가 알아서 질주했다니까요!”
* * *
“워다나즈! 워다나즈! 워다나즈!”
앙라고는 망토로 급조한 깃발을 휘두르며 외쳤다· 근처에는 벌써 에인로가드 격구 클럽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원래 이런 경기장에서는 미친 사람들끼리 서로 뭉치고 교양 있는 제국의 정상인들끼리 서로 뭉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이렇게 분리가 됐다·
“껄껄껄! 이 젊은 친구 아주 마음에 들어!”
술 취한 관중들은 앙라고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자네가 한 번 우리를 지휘해서 야유해보게! 멋들어지게!”
“!”
앙라고는 깃발을 휘두르다가 멈칫했다·
여기 처음 보는 사람들을 지휘해서 그랑덴 시 격구 클럽들에게 야유를 퍼부어야 한다니·
과연 그가 할 수 있을까?
“어서!”
“알 알겠습니다· 불··· 불파드 불파드· 너무 약하다네· 식사도 뺏기고 침대도 뺏기고 쫓겨날 선수 불파드·”
“노래로?!”
“허 가사가 중독성 있고 착 감기는군 그래· 같이 부르자!”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자 앙라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달카드!’
친구의 노래를 표절한 앙라고는 더욱 더 크게 불렀다· 생각보다 매우 거슬리는 노래에 그랑덴 시 격구 클럽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불쾌하다는 듯 야유를 퍼부어댔다·
“알파!”
“그 그 노래는 에인로가드 모두의 것이잖아!”
살코의 부름에 앙라고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부터 내뱉었다·
그러나 살코는 그것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아니· 왜 불렀냐?”
“저쪽 자식들이 자꾸 워다나즈한테 야유를 퍼붓는데 뭐 막을 방법이 없나?”
깃발을 흔들던 앙라고는 살짝 당황했다·
“격구 경기 별로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경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게 하려는 거지· 알파· 난 경기에 별 관심이 없다니까·”
“····”
앙라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모르게 친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야유를 퍼붓는데 막을 방법이 있을 리가···”
“으하하! 젊은 친구들!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있군! 막을 방법이 있다네!”
술 취한 관중들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앙라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예? 야유를 어떻게 막습니까?”
“쉽지! 다들 따라오게!”
그랑덴 시 격구 클럽 패배에 은화를 건 관중들과 원래 에인로가드 격구 클럽을 응원했던 관중들· 그리고 그냥 취한 관중들까지 섞여 우르르 움직였다·
관중들은 움직이면서 슬쩍슬쩍 진흙을 한 덩이씩 챙기기 시작했다·
‘···설마···’
취하지 않은 앙라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투 투탄타· 이거···”
“야 이 자식들아! 약해빠졌으면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어디서 방해질이냐!”
퍽!
우르르 몰려간 관중들은 상대 쪽 관중들에게 진흙을 날리기 시작했다·
앙라고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제국법으로 불법이잖아요!!”
“우하하하하! 그런게 어딨나! 자네도 던지게!”
-이 새끼들이! 매번 지다가 미쳤나!
진흙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드물었다· 안 그래도 약한 상대한테 처참하게 밀려서 기분 나빠진 사람들은 즉시 반응했다·
“알파! 알파! 빠져나가야 해!! 미친 놈들이었··· 야!!”
앙라고는 저 멀리서 살코의 모습을 보고 기겁해했다·
살코는 마법으로 진흙을 만들어 동료 관중들에게 나눠주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저 비겁한 자식들을 무너뜨리자! 저 비겁한 자식들을 무너뜨리자!”
‘···경기에 관심 없다면서 이 새끼야!!!’
차라리 경기에 무관심하던 때가 나을 지경이었다· 앙라고는 울상을 지었다·
* * *
“선배· 관중석이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원래 시끄러워· 집중해·”
“싸우는 것 같은데요·”
“원래 싸워· 집중해·”
“진흙 괴물이 소환된 것 같은데요·”
“원래 소환돼· 집중해·”
“····”
이한은 카르넬라를 버두스 교수 보듯이 쳐다보았다·
지 하고 싶은 소리만 하는 모습이 아주 똑닮았다·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하지 않지·’
관중석에서 전쟁이 일어났든 말든 경기장은 이미 전쟁 중이었다·
점수 차이는 이쪽이 압도적이었지만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여전히 신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상대의 저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차이면 포기할 법도 한데···’
그랑덴 시 격구 클럽의 선수들은 실로 놀라웠다·
전반전 내내 그리폰이 그렇게 날뛰고 짓밟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기를 시작한 것이다·
탈것이 쓰러지면 새 탈것으로 교체하고 선수가 쓰러지면 새 선수로 교체했다·
보통 이런 교체가 진행되면 흔들릴 법도 한데 이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끈기가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우리가 한 번 이기는 게 그렇게 싫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강해진 거지??”
작년 에인로가드 1학년 후배들한테 진 것 때문에 선수들이 눈 뒤집혔다고는 생각도 못하고 학생들은 당황스럽다는 듯 이야기를 나눴다·
페르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수통을 꺼내 목을 적셨다·
전반전 내내 달린 탓에 몸에 수분이 쭉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타고 있는 몬스터들은 더더욱 지쳤을 것이다·
“워다나즈· 그리폰은?”
그르르륵···
폰리그는 괜찮다는 듯이 소리를 냈지만 이한은 크게 지쳤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반전까지 뛰는 건 힘들지도 몰랐다·
“지친 것 같습니다·”
“워다나즈도 힘들 테고 선수를 바꾼 뒤 수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페르세의 말에 짐승 하나와 사람 하나가 펄쩍 뛰었다·
짐승은 그리폰이었고 사람은 카르넬라였다·
크르릉!
“최고 공격수를 뺀다니 미쳤어 선배!? 우리 수비로 어떻게 막으라고!”
“그렇다고 억지로 내보낼 수는 없어·”
“안 지쳤어! 안 지쳤지?! 이 눈빛을 보라니까?”
카르넬라의 지원에 그리폰은 살짝 흡족한 눈빛을 보냈다·
보아하니 상대는 여기 있는 마법사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그리폰의 편을 들어주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냉혹하게 고개를 저었다·
“폰리그 지쳤습니다·”
“안··· 안 돼! 후배!”
카르넬라는 선배가 할 수 있는 가장 추잡한 짓을 시전했다·
바로 흙바닥 위로 털썩 몸을 던진 뒤 구르며 후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제발! 후반전만 버텨줘!!!”
방금까지 흡족해하던 그리폰도 징그럽다는 듯 기분나빠했다· 이한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상대는 선배다· 상대는 선배다···’
슬쩍 발을 빼려고 시도하며(카르넬라는 격구 선수의 끈기로 놓지 않았다) 이한은 입을 열었다·
“선배· 폰리그를 뺀다고 꼭 지는 건 아닙니다·”
“져! 난 볼 수 있어· 이 호르마시가 억지를 부리는 거 같아?”
다크 엘프 선배는 길쭉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예···”
“지금 얇디 얇은 에인로가드 선수들로 공격 없이 수비만 해서 버티면 벌어놓은 점수는 금세 따라잡힐 거야 후배· 제발 날 믿어줘· 이번 경기도 지면 난 쪽팔려서 발드로가드로 소속을 바꿔야 할지도 몰라!”
“아니··· 전 공격할 건데요·”
“···?”
쏘아대듯 외치던 카르넬라는 멈칫했다·
“그리폰을 뺀다면서?”
“네· 근데 이런 상황 대비해서 유니콘한테도 괜찮냐고 물어봤었거든요· 괜찮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후반전에는 유니콘 타고 나갈 생각입니다·”
“····”
“····”
선배들은 경악했다·
이한이 유니콘을 돌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격구 경기 때 타고 나가도 될 만큼 친해진 상태였다니·
페르세는 간단히 계산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 가지만 더·”
“뭐지 페르세?”
“벤도졸 교수님한테는 이거 절대 비밀이다·”
“···물론이지!”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벤도졸 교수가 듣는다면 정말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 * *
-뭐 저런 새끼가 있냐!
그랑덴 시 격구 클럽에 큰 돈을 건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경기는 마무리되었다·
미친 그리폰만큼 파괴력 있지는 않았지만 유니콘도 만만찮게 사기적인 탈것이었다· 연속 텔레포트로 현란하게 경기장을 누비자 그랑덴 시 선수들은 원하는 만큼 추격이 불가능했다·
“이 이겼다!”
얼떨결에 싸움에 휘말린 뒤 적 관중들을 제압하고 있던 앙라고는 경기 끝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함성을 터뜨렸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투탄타! 경기 끝났다! 그만하고 빠져나가자!”
“워다나즈! 워다나즈!”
앙라고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살코는 새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적 관중들에게 진흙을 던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말려야 하나 주변을 둘러보던 앙라고는 저 위쪽 관중들이 질색하며 이쪽을 쳐다보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확인해보니 그들이 있는 경기장 구역 근처로 큰 여백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이 질색하며 거리를 벌린 것이다·
‘···내 내가 미치광이들 한복판에 있었구나!’
그냥 싸움만 생각하던 앙라고는 뒤늦게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교양 있고 멀쩡한 관중들이 보기에는 앙라고도 저 술 취한 미치광이들과 똑같아 보일 것 아닌가!
‘내가 어쩌다가···!’
친구를 욕하면서 앙라고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경비대원들한테 붙잡혀 그랑덴 시 임시 감옥이라도 가면 이제 에인로가드 2학년 머저리 순위에서 황자를 제치고 앙라고가 위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앙라고 학생?”
낯익은 교수의 목소리에 앙라고는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변장했다는 것도 잊고 앙라고는 무심코 대답했다·
“가 가르시아 교수님···!”
“···지금 뭐하는 거죠 대체?”
앙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살코가 다른 사람들이 만든 임시 가마 위로 올라가 진흙탄을 연발로 쏘아 갈기고 있었다·
앙라고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격구 구경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