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8화
“으음· 선배님· 폰리그가 화난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후배 네가 뛰어난 격구 선수라는 증거지·”
케르베로스한테 악마의 뼈다귀를 물려주고 있던 카르넬라는 당황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예?”
“봐· 이 의욕에 찬 모습을· 그리폰을 달래서 경기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주인과 탈것의 마음이 일치한 거잖아· 훌륭해·”
폰리그는 기쁨에 차서 부리를 부딪쳤다·
이 미치광이 마법사들 중에 그나마 폰리그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배를 쳐다보았다·
‘이 인간 경기에 미쳐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폰리그가 화난 것 같은데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우기다니·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하기 힘든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카르넬라는 이런 질문을 하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경기를 앞두고 ‘폰리그가 불참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면 ‘후배 네가 그리폰으로 변신해서 대신 참가하면 허락해줄게’라고 대답할 사람 아닌가·
“후배· 다른 생각하지 마· 내 강아지가 적들의 주의를 끌고 진형을 돌파하면 너는 그냥 뛰어들어· 알겠어?”
“혹시 폰리그가 뛰기 싫어하면···”
카르넬라는 이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뱃전에 건 갈고리마냥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진정 위협적인 건 손가락이 아닌 눈빛이었다·
카르넬라의 눈동자는 깜박임 하나 없이 광기로 번득였다· 버 모 교수나 볼 모 교수 요 모 연금술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눈빛이었다·
“방금 다른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바로 다른 생각이야· 아주 쓸데없는 생각이지· 후배· 네 그리폰은 아주 뛰고 싶어해· 한동안 저주 때문에 뛰지도 못했지· 계속 경기장의 함성 소리만 기다렸을 걸? 어쩌면 적 선수들을 번개걸음 교수님이라고 생각하고 날뛸 수도 있겠네·”
“···예···”
압도된 이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미안하다· 폰리그· 나중에라도 하기 싫으면 말해도 돼·”
폰리그는 초탈한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았다·
괜히 오해받느니 감정 표현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제발 빨리 시작이나 해다오!
* * *
경기 시작 전·
앙라고와 살코는 좌석에서 경기 전 행사를 흠뻑 즐기···
···지 못했다·
“저건 가고일이고··· 미친! 저건 보카밧이잖아! 빨리 자리로 돌아가자 투탄타!”
“흠· 저 철문은 대체 무슨 금속으로 만든 거지? 여러 몬스터들을 안전하게 가두려면···”
“투탄타· 달리라고! 경기 시작에 늦으면 어쩔 건데!”
“조용히 해라·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잖나·”
살코는 우리 근처의 지하 통로를 돌아다니며 지겹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앙라고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지금 보카밧처럼 희귀한 탈것이 나왔는데도 옛날 옛적에 지은 건물만 보고 있다니·
‘역시 괜히 데리고 왔어· 이 자식!’
경기 전 행사를 즐겨도 모자랄 판에 이 가짜 드워프 놈은 지하로 내려와서 건물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저 긴 꼬리를 보라고! 보카밧을 격구 선수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교살자라고 불러!”
“그 정도면 금지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여섯 개의 다리에 길고 유연한 꼬리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파충류 계열의 몬스터인 보카밧은 영악하고 집요해서 이런 경기에서 선수를 저격하기에는 제격인 녀석이었다·
제국 동부에서 희귀하게 출몰하는 놈이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보카밧이라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그리폰과 같이 보니 약간 퇴색되는 느낌이 있군요· 저렇게 잘 자란 그리폰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위쪽 열린 좌석으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앙라고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그 그리폰! 투탄타! 그리폰이래! 그리폰이 있대! 좌석으로 돌아가야 해!”
“그리폰은 에인로가드에도 있잖나·”
“그거랑 그거랑 같냐!”
살코는 ‘뭐가 다른데’라고 하고 싶었지만 앙라고의 눈빛과 표정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순간 압도당했다·
“···그래· 많이 봤으니까 됐지· 이제 슬슬 돌아가자·”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시끄러운 자식 같으니·’
둘은 속으로 서로를 욕하며 계단 위로 뛰어올라왔다·
경기장에는 벌써 우리에서 나온 탈것들이 여럿 묘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 중 그리폰은 역시 타고난 덩치와 위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저거 워다나즈 아니냐?”
“워다나즈가 잡으러 왔다고!?”
앙라고는 기겁하며 좌석 아래로 몸을 숙인 뒤 마법을 시전했다· 망토 위의 색이 좌석처럼 변해서 위장되자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아니· 미친놈아· 저기 그리폰 위에 있는 게 워다나즈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워다나즈가 왜···”
고개를 든 앙라고는 입을 떡 벌렸다·
가고일과 히포그리프 헬하운드 사이에 이한이 그리폰을 탄 채 묘기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워다나즈 격구 클럽 아닌가?”
“아직 2학년이라고! 고작 2학년밖에 안 됐는데 내보내는 미친놈들이 어딨냐!”
“근데 워다나즈는 마법도 빠르게 배웠잖나·”
“···그거랑 그거랑 같냐!”
논리가 무너진 앙라고는 억지를 부렸다·
사실 자신도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마법도 고학년 걸 배우는데 격구라고···
“워다나즈 이 자식· 이걸 왜 나한테 숨긴 거지?”
“딱히 숨긴 게 아니라 네가 안 물어본 거 아닌···”
“워다나즈! 힘내라! 넌 에인로가드 2학년의 자랑이다!”
앙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크게 응원하기 시작했다· 살코는 경악의 눈빛으로 앙라고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은 창피함도 없나?’
그러나 격구 경기장에서 이런 응원은 딱히 창피한 게 아니었다· 벌써 곳곳에서는 격렬한 응원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랑덴 시 격구 클럽 만세!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마법을 써라! 몰래 마법을 쓰란 말이다!
-어디서 그런 비열한 소리를!
-싸움을 중지하십시오! 더 다투면 경기장에서 추방하겠습니다!
괄괄한 관객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벌써 누가 이기느냐로 진흙을 던지고 돌을 던져댔다·
보다 못한 경비대원들과 기사들이 달려와서 떼어놓을 정도였다·
“투탄타· 워다나즈는 2학년인데도 반강제로 출전하게 됐다·”
“워다나즈가 반강제로 출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살코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선배들이라 하더라도 이한의 뜻을 꺾고 억지로 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앙라고는 확신했다·
에인로가드 격구 클럽의 최근 처참한 전적 때문에 반강제로 이한이 차출당한 게 분명하다고!
“그리폰 때문에 억지로 나간 게 분명해· 우리라도 응원해야지! 우리 아니면 누가 응원하겠어!”
“···과연· 그건 맞는 말이다·”
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앙라고가 출전했다면 응원 대신 자신도 진흙을 슬쩍 만들어 경기장에 던졌겠지만 워다나즈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이 응원해주지 않으면 누가···
-저 그리폰을 타고 나온 학생은 누구요?
-워다나즈 가문의 직계랍디다·
-허!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격구도 관심이 있단 말입니까?
-대귀족 가문인데 격구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소?
-이 사람 워다나즈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모르는군그래·
-그보다 워다나즈 가문의 학생이라면 작년에 마법범죄자를 쓰러뜨린 그 학생 아닌가?
-바실리스크가 아니라?
-어 반마법주의자 아니었소?
“···우리가 안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조용히 해! 시작한다! 에인로가드 만세!”
나팔과 북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격구가 시작되었다·
드넓은 경기장에 탄탄하게 진형을 갖춘 그랑덴 시 격구 클럽은 보는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고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퍼뜨리는 법·
앙라고는 이를 갈았다·
“얼마나 훈련을 한 거야? 저렇게 진형을 바로 갖추다니!”
“저게 대단한 건가?”
“대단한 거다! 저렇게 수비가 단단하면 이쪽이 먼저 공격하기가 힘들어!”
“그럼 기다리면?”
“에인로가드 격구 클럽은 상대에 비해 수비가 약해서 기다리면 안 돼!”
“···?”
공격도 약하고 수비도 약하면 그건 그냥 약한 거 아닌···
쾅!
-워다나즈 학생이 그리폰을 타고 질주합니다!
“너··· 너무 무모한 것 같은데?!”
앙라고는 비명을 질렀다· 앙라고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상대가 빈틈이 없다면 차근차근 깎고 흔들어야지 저렇게 혼자 돌격해봤자 포위당해서 자멸할 뿐이었다·
후배와 같이 보조를 맞추려던 카르넬라도 예상 밖의 돌격에 놀랐는지 한 박자 늦었을 정도였다·
“후배! 너무 빠르다! 후방이 완전히 비었···”
이한이 영역으로 들어오자 사방에서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빈 후방으로 가고일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르르릉!
그리폰의 눈빛에서 살벌한 불꽃이 튀었다·
수백 년 넘은 원수한테 덤벼들 때도 저 정도로 살기등등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늘의 왕이 뿜어내는 위엄에 가고일은 자신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퍽!
거대한 사자의 발굽이 가고일을 뻥 차서 날렸다· 어찌나 멀리 찼는지 데굴데굴 굴러갈 정도였다·
···크아아아아아앙!!!!!
잠깐의 교전으로도 그리폰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겁먹은 헬하운드가 그리폰의 몸통박치기에 튕겨져 날아갔다· 눈치를 보며 꼬리를 날리려는 보카밧이 부리 한 방에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리폰 위에 매달려 있는 이한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얘가 대체 왜 이러냐?’
나름 산전수전 겪은 검사인만큼 이한은 폰리그가 날뛴다고 떨어지진 않았다· 능숙하게 자세를 유지하고 밀착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워했다·
폰리그가 너무나도 의욕적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격구를 정말 좋아했던 건지···
“···살면서 이런 인마일체(人馬一體)를 볼 줄이야·”
수비수 하다각은 두려움과 경외심 섞인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상대를 완전히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진영을 붕괴시킬 줄이야·
“얕본 걸 사과하겠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 그리폰에 대한 알량한 제 지식보다 둘의 유대가 훨씬 더 강력···”
“비키십시오!”
이한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폰이 다음 상대를 찾아서 덤벼들었다·
하다각은 히포그리프를 몰아 옆으로 재빨리 비켰다· 살기등등한 그리폰을 상대로 정면승부할 생각은 없었다·
“···설마 겁을 먹은 건가?!”
상대를 관찰하던 하다각은 자신의 히포그리프를 보며 깜짝 놀랐다·
상대를 관찰하느라 정작 자신의 탈것이 이상하단 걸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가 훈련했던 걸 떠올려라! 더 무시무시하고 강한 몬스터들도 많이 만났잖나!”
-····
주인의 외침에도 히포그리프는 머뭇거렸다·
그리폰보다 더 무시무시한 몬스터들도 만나봤지만 지금 앞에 있는 그리폰처럼 무시무시한 존재들을 여럿 태우고 있는 그리폰은 처음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 없다· 회피해! 놈은 너의 동작을 따라오지 못한다! 놈도 많이 지쳤어!”
히포그리프는 간신히 용기를 되찾았다·
주인과 함께 훈련한 고도의 곡예 동작과 속임수 동작은 단순무식한 적이 따라오기 힘들었다·
옆으로 비켜서는 듯 시늉한 뒤 뒷다리의 탄력을 이용해 방향을 바꾸는 이 속임수는 적들을 여럿 쓰러뜨리느라 지친 그리폰이 절대 따라올 수 없···
쾅!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그리폰은 숨을 헐떡대면서도 급정거 후 쫓아가 다시 박아버렸다·
속임수고 뭐고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적을 갈아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현재 이한이 타고 있는 그리폰은 제국 역사상 가장 전력을 다해 뛰는 그리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