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4화
“대화 즐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고나달테스 님도 즐거웠다고 하시는군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마법사들은 기뻐하며 별실을 떠났다·
위대한 대마법사와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이야·
게다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친절한 사람이었다·
“····”
“····”
시끄럽던 마법사들이 떠나자 방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미친 분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했다·
아무리 미쳤다지만 역시 대마법사에게서 떨어져 나온 분신답게 그 명석함은 어디 가지 않았다·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제자를 탓하거나 혼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결국 깨달은 것이다·
대신 미친 분신은 묵묵히 마법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흑제관의 이야기를 다시 하도록 하겠다·”
“예·”
“····”
일렌딜은 이제 두려움과 경악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후배가 미친 분신의 성물함이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친절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저번의 시전은 왕족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지·”
사악한 숙적 아니 발드로가드 학생들을 환영하기 위해 이한은 반강제로 흑제관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뭐어어???”
물론 일렌딜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2학년 후배가 흑제관을 시전했었다는 말에 일렌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언제?!”
“조용히· 예의범절을 모르느냐?”
“죄죄죄송합니다···”
일렌딜은 그대로 쭈그러들었다·
미친 분신이 생각보다 너그럽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직접 마주하자 역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번에 발드로가드 학생들 왔을 때 썼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파수꾼 클럽에서도 말했었는데요? 금지된 고대 마법 이야기 나왔었잖습니까·”
“···?”
갸우뚱거리던 일렌딜은 그제야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봐· 이번에 누가 다른 마법학교 놈들한테 금지된 고대 마법 시전했다는데?
-훗· 난 누군지 안다· 바로 푸른 용의 탑 소속 5학년 부여 마법 학파 수석 위대한 핏줄의 후예 유크벨티레다·
“···너!!”
그리고 별 필요 없는 기억까지 같이 떠올린 일렌딜은 추가로 경악했다·
분명 파수꾼 클럽에서 ‘누가 금지된 고대 마법을 시전한 거지?’ 이야기가 나오자 고나달테스의 가명을 가진 이 후배가 유크벨티레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파수꾼 클럽 회원들은 모두 다 ‘과연 유크벨티레라면 그럴 수 있지’하고 납득했었는데···!
사실 진범은 따로 있었다니· 일렌딜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네? 뭘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누명···! 누명 씌웠잖아! 유크벨티레 선배한테···!”
“기억이 안 납니다만·”
이한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결백하게 눈빛을 반짝였다·
일렌딜은 후배가 정말 모르는 건가 싶어서 혼란스러워졌다·
‘잊 잊은 거야? 진짜?’
“그만· 잡설이 정도를 넘는군·”
미친 분신은 둘의 잡담을 끊어버렸다·
마법과 관련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기다려준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얼마나 기억하고 있지?”
“대략적인 형태는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상은···”
이한은 살짝 눈치를 봤다·
그 때 미친 분신은 마법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지팡이의 움직임 삼왕국 시절의 문자로 새긴 문구 방위와 불꽃 등 거의 모든 요소를 대신 지시해줬었다·
이한이 한 거라고는 사실상 마력을 바친 것 정도가 전부·
어쩔 수 없었던 게 흑제관 소환이 지금의 이한에게는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마법이었다·
본인이 나서서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대략적인 형태라도 기억했다는 것 자체가 이한의 성장을 증명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기억한 건데 설마 화내시진 않겠지·’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니· 괜찮군·”
“!”
미친 분신의 반응에 이한은 아차 싶었다·
상대의 반응을 보니 그냥 모른다고 해도 화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크윽·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고 할 걸·’
굳이 진도를 당겨서 학습 난이도를 올리다니· 뼈아픈 실수였다·
“말했듯이 이 유물은 흑제관의 원리와 유사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미친 분신은 담담하게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태연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와 별개로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복잡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듣는 사람이 4학년 천재와 2학년 제자가 아니었다면 금세 탈락해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이한은 정신을 집중해 어떻게든 정리하고 요약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원래 흑제관 소환 마법을 준비할 때 이한이 미친 분신의 지시를 받아가며 직접 했던 부분들을 이 유물은 자체의 힘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현재는 악신과 엮여 있는 만큼 단절과 정화가 필수적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솔직히 혼자서 시전할 자신은 없으니·’
“저··· 질문이 있는데요·”
일렌딜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친 분신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한이 대신 말했다·
“하셔도 됩니다·”
“해 해도 되는 거 맞아···?”
“질문하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악신과 연결이 끊기면 이제 새로운 신과 접촉해야 하는데 제가 원하는 신과 접촉할 방법이 있을까요?”
일렌딜은 말 한 마디 하고 미친 분신의 눈치를 보는 식으로 느릿느릿 물었다·
이한은 그걸 그대로 전했다·
“악신과 연결이 끊긴 뒤 새로 원하는 신과 접촉할 방법이 있습니까?”
‘앵무새?’
“어렵지 않다· 애초에 이 유물은 신적 존재와의 연결을 위해 신성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으니· 강한 상징성과 신성력을 가진 징표면 충분하겠지·”
긍정적인 대답에 일렌딜의 얼굴이 밝아졌다·
애초에 그녀가 이 유물을 탐냈던 건 숲의 회복과 생장에 어울리는 신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징표 같은 것들은 준비되어 있었다· 미친 분신의 말을 들어보니 그리 어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한의 얼굴도 같이 밝아졌다·
“잘 됐군요· 굳이 흑제관에 집착할 필요 없이 신성력을 빌려오는 아티팩트로 쓰면 되겠습니다·”
유물의 힘이 흑제관과 원리가 비슷하다지만 꼭 흑제관으로 쓰란 법은 없었다·
어렵고 위험하며 사악한 고대 금지 마법보다는 그냥 간편히 선한 신의 힘을 빌려오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한은 나름 신성 마법과 친한 사람 아닌가·
‘아프하 교단이나 플레맹 교단 정도면 날 거부하진 않겠지·’
“인공 반신을 연결할 준비를 해라·”
“···스승님?”
원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 사람을 들여다보기 마련이었다·
이한이 미친 분신을 상대하면서 적응했듯이 미친 분신 또한 이한을 상대하면서 적응한 것이다·
무시해도 될 소리는 무시한다!
“스승님· 신성력을 빌려올 수 있다는데요?”
“안다· 하지만 왕족의 제자라면 그런 범부의 방식보다 더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기 싫은데요···’
그냥 선한 신과 다시 연결시켜놓으면 편리한 아티팩트가 되는데 굳이 그걸 암흑 원소로 만든 사악한 인공 반신과 연결시키라는 지시에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범부의 방식이 된 일렌딜도 못마땅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일렌딜은 절대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기에 상대는 너무 두려운 존재였다·
이한은 결국 포기했다·
다른 부분에서는 조금 유해졌어도 미친 분신이 타협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마법 전수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인공 반신은 어떻게 연결합니까?”
“원래라면 새로 만들어야하겠지만 왕족의 제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 저번에 만드신 게 있으시죠·”
얼마 전 대륙 정복 사건을 떠올린 이한은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해보니 그 때 인공 반신 군대를 소환하려고 했으니 숫자는 넘쳐날 것 같았다·
미친 분신은 유물을 들어 올리더니 가볍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저번에 흑제관을 소환했을 때처럼 이질적인 질서가 주변을 감돌았다·
충돌하는 세계들과 서로 다른 규칙 질서· 틈새로 흘러나오는 막대한 암흑 원소···
그리고 이한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륙은왜지배안했나?
“····”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러나 유물 안의 목소리는 다시 이한을 불렀다·
대륙은왜지배안했나?
“제자 너를 부르고 있다· 왜 무시하는 것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음· 그 때는 대륙을 지배하기 좋은 때가 아니었어서···”
일렌딜은 입을 벌린 채 후배를 쳐다보았다·
그럼 대륙을 지배하기 좋을 때도 있단 말인가?
“혹시 저번 일 때문에 원한이 있으신 건 아니시죠?”
반신 군대의 강림을 막기 위해 이한은 제법 치열한 전투를 벌였었다·
상대를 햄스터로 바꾸고 뇌화로 뚫어버리고 조우린의 브레스로 지져버리고···
‘원한이 있을 것 같군·’
아무리 생각해도 원한이 없을 것 같기 힘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반신은 담담히 말했다·
사령관이그렇게생각한다면그런거겠지·
‘아니?’
생각보다 인공 반신은 친절했다·
원한이나 복수를 다짐하는 대신 미친 분신의 제자인 이한의 권위를 존중하고 납득해줬다·
피와 분노에 미친 사악한 신일 줄 알았는데···
“앞으로 이 반신을 길들이도록·”
신이라고 하면 대단하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사실 의외로 어린아이 같은 구석도 있었다·
특히 인공적으로 만든 반신의 경우 어린아이를 넘어 갓난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미친 분신이 소환한 이 인공 반신은 원래 대륙 정복을 위해 최대한 빨리 효율적인 파괴를 학습했어야 됐지만 계획이 변경된 탓에 학습이 백지화 된 상태였다·
인공 반신을 소환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그 힘을 길들여 정교히 이용하는 것이 마법사의 업·
원석 상태나 다름없는 이 인공 반신의 힘을 길들이고 다루는 것이 지금 제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이한에게는 개소리로 들렸다· 정확히는 ‘길들이도록’부터 그냥 다 개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어리석은 질문은 슬슬 삼가도록 해라·”
근처의 언데드들을 모조리 통제하거나 역소환시킨 것 공격을 무효화시키거나 복종시키는 것 모두 만능에 가까운 반신의 힘을 정교하게 모으고 다듬은 결과였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그렇지 않으면 신의 힘이라 하더라도 그저 막연하게 흩어져 낭비될 뿐이었다·
“길들이고 그 힘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해지면 언젠가 흑제관을 직접 소환할 수 있게 되겠지·”
“와· 정말 너무 신나는군요·”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기쁨을 표현하는 건 천박하니 자제해라·”
확실히 이론으로 배우고 학습하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게 더 빠르긴 할 것이다·
그 대상 마법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한은 솔직히 미친 분신의 지시를 따라 흑제관 소환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과 이렇게 유물을 사용해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게 얼마나 차이가 날지 회의적이었다·
둘 다 그냥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이한은 한숨을 참으며 고대 유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어딘가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권능을 부정해봤자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스승님· 이거 정화 제대로 안 된 것 같은데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악신의 목소리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
“···정화와 단절을 하고서 주신 줄 알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지? 어차피 영향을 주지 못할 텐데·”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뭘 그것도 그래···’
일렌딜은 지적을 꾹 삼켰다·
원래 대화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 둘의 대화는 특히나 일렌딜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숲이 눈물겹게 그리울 정도였다·
일렌딜은 결심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한동안 숲에 틀어박혀서 어느 누구도 상대하지 않으리ㄹ···
“그래도 선배님은 이거 숲에 두실 텐데 정화 부탁드립니다· 제가 인공 반신을 길들이는 것만 해도 충분히 신경 쓰이실 텐데 악신까지 들고 갈 수는 없죠·”
“···으응?”
결심하던 일렌딜은 의외의 말에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혹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지만 방금 후배의 말은 일렌딜의 숲에 와서 사악한 금지 마법을 연습하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잘못 들은 게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