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3화
‘젠장· 너무 까불었군·’
제정신이 돌아온 이한은 깊이 반성했다·
괜히 옛 동화에 사악한 힘에 빠져들었다가 자멸한 마법사들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사악한 힘에는 그 대가가 따라오는 법·
“무슨 말이야···?”
일렌딜은 후배가 벌써 유물의 영향을 받았나 싶어 당황했다·
누가 봐도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왜 아티팩트를 닫는단 말인가·
“···설명하려고 했잖아?”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아리의 돌이 강제로 다시 열렸다·
그리고 미친 분신의 환영이 흘러나왔다·
왕족이 직접 방문해야겠군· 위치를 말하도록 해라·
“사실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습니다·”
미친 분신은 이한을 무시하고 일렌딜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어디지?
“네 네?”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이 직접 말을 걸자 일렌딜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에인로가드 학생이라면 누구나 해골 교장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영혼 깊숙이 새겨지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은 기본 형태의 해골 교장보다 좀 더 광기 넘칠 때가 많았다·
일렌딜이 가장 마지막으로 본 인간 형태의 해골 교장 모습은 제국 서부 지역에서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 접촉을 시도한 마법범죄자들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모습이었으니···
당연히 일렌딜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어디냐고 물었을 텐데·
“그그그··· 그랑덴 시 경비대 제 2 병영이요···”
알겠다·
미친 분신은 메아리의 돌을 껐다· 이한은 일렌딜을 노려보았다·
‘4학년이나 되어서 저렇게 마음이 약하다니!’
디레트 선배였다면 ‘나를 죽일지언정 후배를 팔 순 없다!’라고 버텨줬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선배들이 디레트 같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들은 돌아가는 게 좋겠다·”
“뭐? 왜?”
용병들의 외투를 잘라내던(질 좋은 천이라서 버리기 아까웠다)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 의아해했다·
“곧 다른 마법사가 올 텐데 위험할 것 같아서·”
“워다나즈· 우릴 뭘로 보는 거냐?”
친구들은 우정이 담긴 뜨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위험한 마법사가 온다고 물러날 만큼 그들은 약하지 않았다·
‘와· 진짜 친하구나·’
그 모습에 일렌딜은 속으로 놀라워했다·
어떻게 다른 탑 학생들끼리 저 정도의 우정을?
“교장 선생님의 미친 분신이야· 빨리 돌아가라·”
“···하지만 네 말을 무시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지· 알겠다!”
“워다나즈·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네 의견을 존중해서야· 알겠지?”
친구들은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위험한 상황에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건 모두를 파멸로 이끌 수 있었다·
호다닥 도망치는 친구들을 보며 일렌딜은 황당해했다·
“뭐··· 저런 애들이···?”
“제 말을 잘 듣는 거죠· 그보다 교장 선생님 분신 오는 거나 준비합시다·”
후배의 말에 일렌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신이라 하더라도 교장 선생님의 분신을 상대하는 건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제정신이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촤르르륵-
땅 아래에서 수십 종류의 나뭇가지가 덩굴처럼 피어오르더니 일렌딜 위를 덮었다· 마치 두터운 갑옷 같은 형상이었다·
“···뭐하십니까?”
“응? 어··· 준비하자며?”
“····”
누가 봐도 ‘덜 아프게 맞기’를 준비하는 선배의 모습에 이한은 황당해했다·
“그런 준비 말고요· 와서 마법 가르쳐주실 텐데 이 무너진 지하실에서 배울 수는 없잖습니까·”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선배가 갑자기 에인로가드 1학년 이하의 지능을 보여주자 이한은 왜 이러나 싶었다·
“그거 말고 왜 오겠습니까?”
“응징··· 아 아니야· 알겠어· 준비할게!”
일렌딜은 갑옷을 돌려보내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흠· 일렌딜 선배가 4학년이시긴 하지만 사교 능력은 흑마법 학파보다 떨어지는 거 같군·’
양쪽 모두에게 실례인 소리였다·
* * *
‘정말 괜찮을까?’
일렌딜은 다이할 달카드가 빌려준 별실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서성거렸다·
후배야 ‘마법 가르쳐주러 오시는 겁니다’라고 했지만 일렌딜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였던 것이다·
해골 교장의 미친 분신이 고작 그런 이유로 온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맞지 않을까???’
메아리의 돌을 부순 다음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게···
그러는 사이 이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일렌딜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산만하신 거야?’
일렌딜 본인은 몰랐지만 이번 의뢰로 인해 이한 안의 선배 평판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디레트 아래에서 시작한 평판이었는데 현재 평판은 유크벨티레 밑이었다·
벌컥!
“오셨습니까?”
“그래·”
문을 열고 들어온 미친 분신은 안을 휙 둘러보더니 하인을 불렀다·
“왕족의 제자에게 돼지우리 같은 방을 내놓다니· 당장 주인에게 전해라· 제대로 된 방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묻겠다고·”
“예 예!”
기겁한 하인이 뛰쳐나가려고 하자 기겁한 이한이 먼저 몸을 날려서 막았다·
“잠깐 잠깐! 여긴 제가 부탁해서 정한 겁니다!”
“그 사이 거지처럼 사는 취미가 생겼나? 하긴 마법학교에서 지내는 꼴을 보니 그럴 법도 하지·”
‘당신 탓이잖아!’
이한은 조금 억울했다·
물론 미친 분신도 진짜 당사자는 아닌 만큼 억울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주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가 급히 부탁드린 입장이라 일부러 이런 방을 빌린 겁니다·”
아산의 형은 건물에 머무르는 발드로가드 마법사들을 쫓아내고 가장 커다란 별실을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제국 신문에 <오만방자한 에인로가드 학생의 무례 이래도 괜찮은가?>로 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친 분신의 신분을 생각해봤을 때 소란을 피우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해골 교장이 따질 곳이 없으면 누구한테 따지겠는가· 자신의 평판을 가짜가 훼손하는 동안 뭘 했냐고 혼날 수도 있었다·
미친 분신은 이한의 말에 어디부터 설명해줘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인타렌달스한테 따로 예절 교육을 맡겼어야 했나· 어떻게 생각하지?”
“···느에?”
구석에 숨어 있던 일렌딜은 갑자기 미친 분신이 자신을 지목하자 기겁해서 펄쩍 뛰었다·
사실 아까 들어왔을 때부터 구석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후배가 뭐라고뭐라고 떠들긴 했는데 일렌딜은 너무 무서워서 전혀 듣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왕족의 제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의전을 거절하고 돼지우리에서 마법을 배우려고 하는 이 작태에 말이다·”
“나··· 나··· 나쁜가요?”
“그렇지·”
미친 분신은 제대로 대답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일렌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일렌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배의 눈빛에 섞인 경멸이 한층 더 짙어졌다는 것을·
‘저 사람 선배 맞아?’
두려움에 외부인 편을 들다니·
이한은 속으로 투덜대며 입을 열었다·
“흥· 전 여기가 좋습니다· 에인로가드에서 거지처럼 지내서 그런지 이곳이 친숙하네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털썩!
이한은 아예 옆 소파에 몸을 던졌다· 누가 봐도 배째라는 그 모습에 일렌딜은 더더욱 공포에 떨었다·
상대는 진짜 배를 쨀 수도 있는 대마법사인데!
“그 그만··· 일어나···”
“···알겠다· 일어나라·”
결국 먼저 양보한 건 미친 분신이었다·
마법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시간에 쓸데없이 낭비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까 보여준 유물인가보군·”
“예· 맞습니다·”
이한은 별실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물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반신의 메아리>는 간이 봉인 아티팩트 세 겹으로 묶여 허공 속을 부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거로도 모자라 추가 마법진으로 혹시 모를 악신의 영향을 억제하고 있었다·
팟!
미친 분신이 손을 흔들자 주변 모든 봉인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일렌딜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지만 저런 유물의 안전장치를 모두 풀어버리다니·
그걸로도 모자라 미친 분신은 서슴지 않고 유물을 손으로 붙잡아 들어올렸다·
“오염됐군·”
“네··· 네?!!!”
휙!
미친 분신은 확인을 끝낸 뒤 가벼운 동작으로 유물을 이한에게 던졌다·
후배가 그 유물을 침착하게 받자 일렌딜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무슨···?!’
“??”
“왜 저러지?”
“선배님이 건강이 좀 안 좋으십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일렌딜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태연한 목소리로 오고 가는 사제(師弟)의 대화에 집중했다·
“멀··· 멀쩡해?”
“네? 전 괜찮습니다· 저항력이 강해서··· 애초에 스승님께서 못 견딜 물건을 주실 리 없잖습니까·”
“····”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미친 분신의 모습에 일렌딜은 간신히 붙잡았던 정신이 다시 한 번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새삼 저 후배가 어느 정도 수준의 괴물인지 실감한 것이다·
“악신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필요 이상의 간섭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신이란 것들은 무릇 숭배자들만 치워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앉아라· 설명해주겠다·”
이한은 미친 분신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일렌딜을 불렀다·
“선배님도 앉으시죠·”
“····”
일렌딜은 후배를 한 번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얌전히 앉았다·
미친 분신 앞의 이 자리는 마치 타오르는 지옥의 옥좌처럼 고통스러웠다·
‘흑흑·’
“흑제관은 기억하겠지·”
“예·”
“?”
“아· 흑제관이 뭐냐면요·”
이한은 일렌딜에게 대신 설명해줬다·
옛날 마법사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반신을 가두는 마법인데 그 마법의 명칭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어쩌다보니 돕게 됐습니다·”
“····”
일렌딜의 마음 속 거리감이 살짝 더 멀어졌다·
정령을 사랑하는 착한 후배에서 해골 교장의 미친 분신에게 직접 마법을 전수 받고 있는 후배로·
“이 유물의 원리는 흑제관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염을 제거해 악신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면 보조용 도구로 쓸 수 있겠지· 그리한다면 너 제자도 흑제관을 홀로 시전할 수 있을 터·”
“선배님· 들으셨습니까?”
“····”
후배가 자꾸 미친놈처럼 반항하자 일렌딜은 울고 싶었다·
혹시 후배가 미친 분신한테 같이 죽고 싶은 것일까?
“헛소리는 그만하고 집중···”
-계십니까?
별실 문을 누군가 두드리자 미친 분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일렌딜은 속으로 벌벌 떨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붙잡아주신 용병들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귀찮게 구는 외부인들의 행동에 미친 분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꺼지라고 하도록·”
“들어오십시오!”
“····”
“····”
그랑덴 시 마법사들은 감사 인사를 표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악신숭배자들의 잔당을 붙잡은 것과 그 보고는 이미 받았지만 역시 자세한 이야기를 직접 듣는 건 달랐던 것이다·
“이 분은···?”
“어··· 고나달테스 님이십니다·”
“헉!!! 영광입니다! 해 해골 상태만 멀리서 목격했었는데···!”
“고나달테스 님도 반갑다고 하시는군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차가운 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미친 분신 옆에서 이한은 통역을 진행했다·
미친 분신은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보였지만 마법사를 죽이지도 별실을 으깨버리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일렌딜의 후배를 삼켜버리지도 않았다·
‘···혹시··· 두 번 미쳐서 제정신이 된 걸지도 몰라·’
일렌딜은 그 명석한 두뇌로 기막힌 가설을 세웠다·
해골 교장 본인이 워낙 미친 사람이었으니 해골 교장의 미친 분신은 상대적으로 제정신인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저 인내심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