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일렌딜이 생각하기에 정령과 사이가 좋은 사람들은 그 외의 관계가 대부분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일렌딜 본인부터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조금 심하게 사교적이었다·
심지어 친구의 가족과 따로 연락하면서 모임 이야기까지 하다니·
일렌딜이 잘못 본 걸 수도 있었지만 이건 아무래도···
‘헉· 그럴듯해·’
닐리아는 일렌딜의 말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정령과 사이가 좋으면 그 외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니·
북부 산맥의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갓 잡은 짐승의 피와 간으로 잔치를 벌일 때 그림책에 나온 케이크를 꿈꿨던 닐리아로서는 매우 공감 가는 말이었다·
“에이· 닐리아는 친구도 많고 정령도 많은데·”
“내 생각에는 저 선배가 자기 친구 없다고 억지 부리는 것 같아· 그리고 친구가 없는 건 숲에 인공 정령을 몰래 소환해서 그런 거지·”
“····”
그러나 친구들은 일렌딜의 말에 시큰둥했다·
심지어 아덴아르트까지 거들었다·
“정령과의 친화력은 사교력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역시 그렇죠?”
자신의 사교력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은 아덴아르트까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부정하자 친구들은 더더욱 확신했다·
그러는 사이 이한은 허가장을 받고 돌아왔다· 특이하게도 다른 팔에는 새 외투를 들고 있었다·
“···워다나즈· 그건 뭐냐?”
“여기· 아산· 다이할 님이 널 위해 옷을 준비해놨다더라·”
“뭐!? 시험 성적을 탓한 게 아니라?”
“···그것도 조금 하긴 했는데 하여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자· 받아라·”
아산은 매우 의심쩍어하며 외투를 확인했다·
안에 혹시 ‘100점에 만족하지 말고 200점을 받아라’ 같은 편지가 있나 싶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흐음· 내가 형님을 너무 의심한 걸지도 모르겠군···”
“다이할 님이 널 생각 안 하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이한이 방문했을 때 다이할은 ‘워다나즈! 안 그래도 다음에 보면 선물하려고 준비해놨었는데 잘 됐군’하며 새 외투를 선물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산의 마법적 성취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달할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아산· 여기 하이단 님의 용돈이다·”
“잠깐· 주머니에 ‘이한 워다나즈’라고 쓰여 있는데?”
“그건 내가 나오면서 내 금화 주머니에 바꿔 담아서 그래·”
‘이한이 쓰기에는 너무 고급 천이지 않나?’
요네르는 위화감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선배님· 들어가게 되면 어디부터 수색할까요?”
그랑덴 시의 경비대들과 선임 기사들이 머무르는 병영은 생각보다 넓었고 안에 건물들이 여럿 있었다·
괜히 잘못 들쑤셨다가는 적들이 먼저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지하 임시 감옥·”
“과연· 확실히 가장 가능성 높겠습니다·”
이한은 일렌딜의 지목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경비대 막사나 무기고 창고 같은 곳들도 숨어 있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다·
막사 같은 경우는 거기에 속한 인원들을 전부 매수해야 했고 무기고나 창고 같은 경우는 만약의 일이 벌어질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해 지하실을 파서 만든 임시 감옥은 어둡고 공간이 많은데다가 별로 눈길도 받지 않을 테니···
‘바로 그걸 파악하시다니· 역시 대단하시군·’
“응··· 방금 정령이 말해줬어·”
“···그럼 들어갑시다·”
이한은 홱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일렌딜은 살짝 당황해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내 내가 뭐 잘못했어···?”
“숲에서 인공 정령으로 워다나즈를 습격하려고 하셨잖아요·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죠·”
‘그게 언제 때 일인데···!’
일렌딜은 속으로 억울해했다·
* * *
“큰일이군· 하필 악딘이 붙잡히다니·”
“그런 놈 없어도 알아서 할 수 있어·”
“지금 허세 부릴 때냐? 이 사악한··· 아니 이 물건도 해결 못 했는데?”
용병들은 지하 임시 감옥 뒤쪽 숨겨진 공간에 모여 있었다·
원래는 죄수용 식량을 담아두는 나무통을 쌓아 놓는 장소였는데 이제는 잊혀지고 몇몇 하인들이나 도둑들만 아는 장소가 됐다·
노련한 용병들은 도시에서 일을 벌일 때 이런 곳들을 몇 군데 확보해서 임시 은거지로 삼았다·
보는 눈 많은 여관이나 선술집 근처에 머무르는 건 잡아달라고 목을 내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경험과 기지에도 불구하고 악신의 힘은 점점 그들을 파먹어가고 있었다·
사악한 빛을 발하는 고대 유물·
던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이 유물이 그들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여라··· 내 명을 따를 지어다···
‘빌어먹을!’
마음 같아서는 신전이나 마법사들을 찾아가서 풀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바로 밀고당할 가능성이 컸다·
용병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팅!
“!”
구석에 매달아놓은 실이 끊어지자 용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은 그냥 숨어 있는 게 아니었다· 입구와 출입로 쪽에 움직임을 탐지하는 가벼운 장치를 설치해놓은 상태였다·
매수한 하인은 정해진 시간에만 올 테니 이건···
“경비대원인가?”
“쉿·”
용병 중 한 명이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쇠뇌를 꺼내들었다·
무려 젠바야가 직접 마법을 걸었다는 이 쇠뇌는 두꺼운 금속 갑옷도 진흙 꿰뚫듯 뚫어버리는 관통력을 자랑했다·
이런 아티팩트들로 무장했다는 것 자체가 여기 용병들의 전투력을 증명했다· 아무래도 용병들은 개인적인 수련이나 훈련보다는 이런 식의 전력 상승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니·
‘안 들어와?’
문만 열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용병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안쪽에 연기가 훅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경악해하며 수신호를 보냈다·
-입 막고 스크롤!
연금술사가 조제한 유독성 연기를 그대로 마셨다가는 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수 있었다· 용병들은 급히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 썼어·”
위쪽에서 유리병을 던진 뒤 대기하고 있던 요네르가 스크롤 발동을 확인하고 말했다·
용병들의 착각과 달리 지금 던진 물약은 단순한 연막용이었다·
상대한테도 독 방어 수단은 있을 테니 초반부터 강력한 공격을 날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마법사라면 이 정도 속임수는 기본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덴아르트는 차크람 형태의 아티팩트를 연기 속으로 쏘아 보냈다· 생기를 감지하는 아티팩트는 시야의 불리함과 상관없이 날뛰었다·
-마법사들이다! 위에 마법사들!
-포위망 뚫고 나가!
습격이 확실시되자 용병들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갖고 있는 물약과 스크롤들을 즉시 발동시킨 뒤 옆쪽 벽으로 달려 나간 것이다·
이 지하 감옥은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용병들은 얇은 벽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여길 부수면···
콰르릉!
괴력 물약을 마신 용병이 망치를 휘둘러서 벽을 부수자 그 너머로 마법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화 마법을 걸고 바위 바리케이드 뒤에서 버티고 있는 앙라고와 로웨나는 흔들기 쉽지 않아 보였다·
“다른 쪽으로!”
“늦었다· 그냥 뚫어버려!”
악딘이 없는 탓에 용병들 사이에 혼선이 일어났다· 그 순간 자색으로 빛나는 화살이 용병 한 명을 정확히 저격했다·
“왼쪽으로 틀어서 한 명 더!”
“놈들이 연막을 꿰뚫어본다!!”
예지 마법을 시전한 아산이 닐리아를 보조하자 지하실 안의 어둠과 연기는 용병들에게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장애물이 됐다·
“크악!”
버티지 못한 용병 한 명이 일시적으로 증폭된 힘만 믿고 뛰쳐나왔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가까이 붙는 게 언제나 정답인 만큼 몇 대 맞더라도 돌진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마법사들은 그것까지 대비한 상태였다· 앙라고가 공격을 날려 자세를 무너뜨리자 로웨나가 스태프를 휘둘러 기절시켰다·
“투탄타! 횃대 쪽 벽을 무너뜨려서 덮어버려!”
“기다려· 그랬다가는 통로가 너무 넓어진다!”
제대로 걸렸다는 걸 깨달은 용병들은 욕설과 함께 다시 안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요네르가 또 한 번 물약을 던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공격용 물약이었다·
‘또!?’
흔히들 하는 말로 파티에 괜찮은 마법사 한 명만 있어도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는 말이 있었다·
마법사 한 명만 있어도 파티의 빈틈이 채워지고 전력이 다양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용병들 앞에는 그런 마법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것도 서로 협력해서 움직이는 데에 매우 능숙한!
따로 활동하는 마법사도 까다로운데 이렇게 철저하게 연계해서 움직이는 마법사들이라니·
용병들 입장에서는 거의 악몽 수준이었다·
“항··· 항복· 항복하겠다!”
“알겠다! 거기서 연기 계속 마시면 된다!”
“····”
기회를 만들어보려던 용병들은 치를 떨었다·
그랑덴 시 놈들이 대체 어느 마탑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 건진 모르겠는데 보통 지독한 게 아니었다·
용암조 마탑도 이렇게 성질 더럽지는 않을 것 같은데···
털썩!
“다 쓰러졌나?”
“혹시 모르니까 좀 더 기다렸다 들어가자· 요네르· 물약 하나만 더 던져줄래?”
이한의 말에 일렌딜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어떻게···!”
“···그 그렇게 낭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 그게 아니라· 다들 어떻게 이렇게···”
“???”
선배가 보여주는 뜻밖의 반응에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우리가 너무 심했나?’
‘아니· 에인로가드는 우리한테 더 심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손발이 잘 맞는 거야···?”
“아·”
일렌딜의 말에 그제야 학생들은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낯선 모습이긴 했다·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다니·
“다들 친한 사이야?”
“무 무슨· 저희 안 친합니다!”
“알파 이 자식· 저리 안 비켜?”
각 탑 학생들은 치를 떨며 서로를 밀어냈다·
매우 불쾌한 오해였다· 역시 이상한 선배답게 착각도 불쾌했다·
방금까지 같이 싸웠던 친구들이 쓸데없이 싸우려고 하자 이한이 나섰다·
“친하진 않고 그냥 같이 협력한 적이 많을 뿐입니다·”
‘···그게 친한 거 아닌가?’
일렌딜은 도저히 2학년 학생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도 후배들을 잘 이해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번 2학년들은 특히···
‘정말 모르겠어!’
* * *
“엇· 마법 쇠뇌다· 닐리아· 가져가·”
“고마워·”
“이 갑옷은 앙라고한테 잘 맞을 것 같은데· 잠깐· 지능 감소의 저주가 있군·”
“상관없지 않나?”
“뭐가 상관없다는 거냐 투탄타 이 자식아·”
“여기 지능 증가의 팔찌와 같이 착용하면 되니까 상관없단 건데·”
“···아· 그런 뜻이었어? 하하·”
“그럼 무슨 뜻으로 생각한 거냐?”
이한 일행은 용병들을 탈탈 털어먹었다·
그 기묘한 광경을 지켜보던 일렌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원래 목표에 집중했다·
고대 유물 반신의 메아리·
-■■■■■■!
“으윽·”
생각보다 안에서 느껴지는 오염도가 심하자 일렌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쉽게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오염도가 생각보다 심해서··· 정화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렌딜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악신과 연관이 있는 물건인 만큼 어중간한 방법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가 잠깐 물어볼까요?”
“누구한테?”
이한은 대답 대신 메아리의 돌을 열고 미친 분신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또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스승님· 이 유물을···”
유물을 발견하자 미친 분신의 분노가 누그러졌다· 아까보다 훨씬 친절한 목소리로 미친 분신이 말했다·
···용서해주지· 제법 기특하군· 다음에 익힐 마법을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
팟!
이한은 즉시 메아리의 돌을 꺼버렸다·
“···으응???”
“이런· 아무래도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