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화
“워다나즈!”
“그 미친 선배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밖에서 귀를 대고 있던 친구들은 비명을 듣자마자 바로 문을 뻥 걷어차고 들어왔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한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친구들이었지만 그 일이 미친 선배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언제 어디서든 경계심을 풀면 안 되는 것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뛰쳐들어온 친구들은 뒤로 쓰러진 일렌딜을 보고 멈칫했다· 앙라고는 슬쩍 검을 집어넣었다· 닐리아도 단궁을 망토 안으로 숨겼다·
“뭐야· 워다나즈가 소리친 게 아니었구나·”
“상대가 기절한 거면 괜찮지· 하하·”
‘괜찮나?’
아덴아르트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선배가 쓰러지셨어·”
“왜? 또 암흑 정령 소환하려고 하셨대?”
‘친구들의 말에 가시가 숨어 있는 것 같군·’
이한은 차가운 친구들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하도 미친 선배들을 많이 상대하다보니 일렌딜 정도면 평균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요네르· 물약 좀 줄래?”
“여기· 그런데 이한· 기절시킨 선배를 굳이 깨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어·”
“···내가 기절시킨 거 아니거든·”
맞나?
이한은 살짝 속으로 뜨끔했다·
일렌딜이 기절한 건 평소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단련을 하지 않은 허약함 때문이겠지만 낮은 확률로 이한의 정체 때문에 충격을 받은 걸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이한이 일렌딜 앞에서는 꽤 공손하게 행동했었으니 말이다·
파수꾼 클럽에서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정체에 놀랐을지도···
‘하지만 원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가면을 써야 하는 법이다·’
일렌딜도 원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느릿하게 숲 구석에서 식물과 정령을 돌보는 사람 아니던가·
그런 사람도 파수꾼 클럽 안에서는 날카롭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특히 이한한테는 별명 하나 때문에 계속 구박해왔었고·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내 내가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교장 선생님이 바뀌는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니· 꿈이 아니었네·”
일렌딜은 충격 경악 혼란 질색 가득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착한 후배가 고나달테스였다니!
“대체 어떻게··· 전혀 다르지 않아···?”
“위장이죠·”
“그 그런 거야?”
후배의 말에 일렌딜은 살짝 솔깃해했다·
확실히 생각해보니 위장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이 됐다·
정령을 사랑하는 착한 후배가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굴었던 것도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렌딜 본인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니 훌륭한 위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으 으응·”
일렌딜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파수꾼 클럽에서 말하면 동의해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으응···”
수긍하면서 일렌딜은 뭔가 함정에 빠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늪에 발을 잘못 디뎠을 때처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라···?
“그래서 그 유물을 회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사악한 후배 때문에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일렌딜은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일단 그랑덴 시의 기사들하고··· 마법사들한테는 말해뒀어·”
일렌딜은 천천히 손가락을 꼽으며 여기 오기 전 했던 일들을 설명했다·
먼저 그랑덴 시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만일을 대비해 데스 나이트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에인로가드 학생들 중 발이 넓고 사교적인 이들에게도 지금 상황을 전달해 외출 시 있을 불상사를 대비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신 겁니까?”
“응? 정령들한테 부탁했어·”
“····”
이한은 짜증을 깊숙이 눌러서 삼켰다·
아르실과 이야기할 때 느꼈던 말도 안 되는 박탈감이 다시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용병들이 부리는 정령이 몰래 사실을 알려주다니· 정령이 그런 식으로 배신도 가능한 겁니까?”
이한은 혹시 몰라 물었다·
만약 이한이 계약한 정령도 나중에 일렌딜의 편을 들어준다면 매우 씁쓸할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정령은 배신 안 해·”
‘그럼 선배님한테 알려준 건 뭡니까?’
후배의 미심쩍은 눈빛을 눈치챘는지 일렌딜은 서둘러 변명했다·
물론 자기 딴에는 나름 서둘렀다지만 여전히 느릿느릿한 목소리였다·
“그 그건··· 용병들이 정령을 정식으로 계약한 게 아니라··· 억지로 가둬서 그런 거야· 정령은 계약한 사람을 배신 안 해···”
“···혹시 억지의 범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입니까?”
“??”
“아닙니다· 유물 이야기나 계속하죠·”
현재 용병들이 갖고 있는 고대 유물의 정확한 명칭은 <반신의 메아리>·
놀랍게도 원래는 신적 존재와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유물이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그렇지?”
일렌딜은 후배가 놀라자 뿌듯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사들 중에 신적 존재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 존재까지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작동 원리야 이견이 많았지만 일단 힘 자체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 마법사· 당연히 신적 존재의 힘을 이용하려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하긴 예전에는 반신도 인공으로 만들어서 소환했다지·’
당장 흑제관 마법만 해도 반신을 소환해서 가둔 뒤 그 힘을 착취하는 방식의 마법이었다·
그에 비해 <반신의 메아리>는 이미 존재하는 신적 존재의 힘을 끌어내는 아티팩트 같았다·
“악신숭배자들은··· 이걸 오염시켜서 활용하고 있어·”
제국에서 탄압 받는 악신 신앙은 그 전도도 쉽지 않았지만 이 아티팩트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불성실한 용병들도 순식간에 신의 뜻을 따르고 있지 않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꽤 요긴한 유물 같은데 이걸 과감하게 용병들한테 주는 게 신기하네요·”
“악신숭배자들의 사고방식은 많이 뒤틀려 있으니까···”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악신숭배자들의 행동원리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뒤틀려 있고 광기로 가득차 있는 만큼 더더욱·
일렌딜이 예측하기로는 아마 신의 명령을 과신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신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이들이라면 유물을 잃어버릴 리 없다!
“그리고 용병들도 다들 노련하고···”
“잡혀간 용병은 좀 어설퍼 보이던데요·”
“악신한테 오염되어서 이상해진 거 아닐까?”
“과연·”
이한은 선배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했다·
확실히 악신에 오염되면 사람의 지능이나 판단력도 좀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구들은··· 다 같이 돕는 거야?”
“예· 혹시 불편하십니까?”
일렌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좁은 공간에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작업을 위해 돌아다니는데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일렌딜이 궁금한 건 다른 것이었다·
“유물의 권리는 어떻게 나누려고?”
둘이야 유물의 권리를 나눠 가질 수 있다지만 저렇게 숫자가 많아지면 힘들어졌다·
보상도 그렇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아· 그냥 도와주겠다고 온 건데요·”
“····”
일렌딜은 후배의 막강한 교우관계에 경악했다·
파수꾼 클럽에서 스스로를 고나달테스라고 칭하는 후배가 저렇게 친구가 많을 줄이야·
갑자기 마음속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으응··· 뭐 잘됐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왜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야·”
* * *
그랑덴 시는 넓은 도시였고 숨을 곳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곳에서 노련한 용병을 찾는 건 아무리 대단한 추적자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후후· 하지만 저희에게는 그림자 순찰대 출신이 있습니다·”
앙라고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닐리아는 기겁해서 친구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어떻게 용병을 찾는단 말인가?
‘이··· 이 흰 호랑이 탑 자식!’
“그럴 필요 없어· 정령이 있으니까·”
일렌딜은 느릿하게 말했다·
처음에 일렌딜에게 정보를 전해 준 정령은 아직도 용병들 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용병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눈에 띄게 행동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방향은 추적이 가능했다·
“그보다··· 호위가 더 필요하겠는데·”
“호위라면 모험가들이요? 아니면 기사들?”
일렌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용액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
“이건···!”
다들 놀랐지만 연금술을 배우는 학생들은 특히 더 놀랐다·
형상을 기억시키거나 특정 명령을 기억시킬 수 있는 용액이 있다지만 이렇게 사람 형태로 정교하게 만들어 내다니·
“정령인가?”
“정령과 계약해서 혼으로 삼고 겉은 몇몇 연금술 시약으로 육체를 구성한 거 같아·”
“그게 가능해? 어떻게 그걸 담고 다니는 거지?”
학생들은 신기해하며 연금술 병사를 콕콕 찔러봤다·
후배들의 귀여운 행동에 일렌딜은 미소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형상 변화 용액에··· 모험가를 녹여 넣어서 기억하게 만들었어·”
“····”
“····”
신기해하던 2학년 학생들의 표정이 굳더니 싸늘하게 바뀌었다·
나름 회심의 농담을 던졌던 일렌딜은 당황해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왜 왜? 농담인데? 안 웃겨···?”
“저는 웃었습니다· 근데 선배님은 앞으로 농담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아까보다 살짝 더 울상이 된 일렌딜의 뒤를 쫓아(친구들의 거리는 더 멀어져 있었다) 일행은 말없이 묵묵히 움직였다·
“어·”
“왜 그러십니까?”
“정령이 말하기로는 여기에 숨었다는데···”
머뭇거리는 일렌딜의 모습에 이한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랑덴 시 경비대 제 2 병영·
외부인들이 멋대로 들어가기는 좀 애매한 곳이었다·
“조용히 허가 받고 들어가죠·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을 부를까요?”
“안 돼· 그랑덴 시의 사람들이라면 유물의 소유권이 복잡해질 수 있어· 데스 나이트들도 마찬가지야· 교장 선생님이 가져갈 수 있으니까·”
일렌딜은 이제까지 했던 말들 중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누가 에인로가드 마법사 아니랄까봐 욕망 앞에서는 절대 포기가 없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어·”
일렌딜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4학년 선배에게 좋은 방법이 있나 싶어 이한은 물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공터에 불을 질러서 사람들을 쫓아낸 다음··· 강제로 침입하는 수밖에···”
“···그냥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경악한 이한은 선배를 제지했다·
디레트와 어울리다가 유크벨티레를 만나고 나서 ‘와 이런 선배도 있구나’했던 이한이었지만 일렌딜까지 대하게 되자 ‘와 진짜 이런 선배도 있냐’의 영역으로 도착하게 됐다·
유크벨티레도 최소한 이런 상황에서 불 지르고 강제침입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지 않아?”
“수백 가지도 넘을 것 같은데요· 아· 여기 달카드 가문의 다이할 님이 특수 행정관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한의 말에 일렌딜은 깨달은 표정으로 말했다·
“달카드 가문이 있어?”
아산이 손을 들었다· 그제야 일렌딜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네·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면 설득이···”
“아· 제가 아니라 워다나즈가 갈 겁니다· 형은 저보다 워다나즈를 더 좋아해서요·”
아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산· 다이할 님이 널 생각 안 하는 건 아니다· 저번 체스 모임 때도 널 칭찬했다고 하더군·”
“뭐?! 체스 모임이 있었어!?”
“···하여간 갔다 오마·”
이한은 아산의 형한테 부탁하러 떠났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일렌딜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나만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