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화
비버펭귄여우 일렌딜은 황당해했다·
현재 일렌딜은 에인로가드 안이 아니라 밖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밖으로 나가는 학생의 주머니 속이었다·
위험한 놈들이 엮여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바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병 깨뜨릴 뻔했네···’
4학년쯤 되면 비상시에 에인로가드를 빠져나갈 수단 한두개쯤은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탈출이 쉬운 건 아니었다·
일렌딜이 선택한 건 정령의 힘을 빌려 유리로 된 물약병 안에 숨어들어가는 것·
당연히 그 주인인 학생한테 말없이 몰래 들어간 상황이었고 들키면 안 됐다·
일렌딜은 황당함을 참고 다시 분필을 움직였다·
비버-펭귄-여우:착각이 있었겠지·
고나달테스:신분 확인하니까 악딘 맞다는데?
비버-펭귄-여우:····
혼란에 빠진 일렌딜은 나뭇가지가 뒤엉킨 머리칼을 붙잡으며 깊게 고민했다·
고나달테스가 미친놈이긴 했지만(특히 작명 부분에서는) 이런 부분에서 되도 않는 허세를 떨 놈은 아니었다·
진짜 잡았다고?
이번에 움직인 용병들 중 여러 악명 높은 자들이 많긴 했다·
그러나 그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할 놈을 고른다면 세 손가락 악딘이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교묘하고 끈질겨서 <가람의 광란>이나 <화염 폭포 습격> 등 온갖 굵직한 사건들을 일으켜오고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그런 놈을 대뜸 잡았다니·
비버-펭귄-여우:온갖 속임수와 기책에 능한 놈이야· 탈출의 경험도 많고··· 정말 악딘이 맞는지 다시 확인해봐·
고나달테스:아· 확인했다· 내가 기습했는데 하필이면 놈의 아티팩트 위로 직격해서 박살났군· 방심했는지 반응도 늦었고·
비버-펭귄-여우:그게 다라고?
일렌딜은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교묘하고 끈질기기로 악명 높은 용병이 무슨 애송이마냥 방심하고 당하다니?
고나달테스는 귀찮았는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고나달테스:그럼 믿지 말던가· 어쩌라는 거냐? 와서 직접 확인하겠나?
비버-펭귄-여우:음· 일단 사과할게· 상대가 상대인지라 집요하게 묻게 됐네· 지금 스완송을 노리는 놈들이 꽤 위험해서 나도 그랑덴 시로 가고 있어·
비버펭귄여우는 그랑덴 시의 마법사들과 기사들에게 직접 상황을 알리고 용병들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원래라면 상관없는 학생은 이 일에서 제외시킬 생각이었는데 고나달테스의 전력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비버-펭귄-여우:고나달테스· 같이 협력해서 움직이지 않겠어?
“!”
의외의 제안에 이한은 놀랐다·
협력 제안이라니·
‘도망친 놈들을 잡긴 해야 한다지만 직접 나선다고?’
볼라디 교수도 아니고 숲의 구석에서 원예 활동만 좋아할 것 같은 선배가 저렇게 나서자 이한은 조금 의아했다·
고나달테스:정보가 있다면 그랑덴 시 사람들한테 맡기면 안 되나?
비버-펭귄-여우:물론 어느 정도는 맡기겠지만 그 사람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고·
고나달테스:아까운 기회라니?
의아해하는 이한에게 일렌딜은 자세히 설명해줬다·
일렌딜이 지금 직접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로서 다른 마법사들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용병들이 갖고 있는 유물 때문이었다·
만약 고나달테스가 협력해준다면 저번에 약속한 보상은 물론이고 이 유물까지도 공정하게 정산해줄 생각이었다·
‘아니· 이 사람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고나달테스:좋아· 같은 에인로가드 학생으로서 협력해줄 수 있다· 대신 앞으로 클럽에서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추가로 조건을 얹는 상대의 모습에 일렌딜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번에 약속한 보상과 얻을 유물의 정산이면 거래 조건으로는 충분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다니·
비버-펭귄-여우:그건 계산이 맞지 않아· 협력한다면 보상과 유물· 여기서 더 추가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고나달테스:잘 생각해봐라· 같이 협력하게 되면 우린 서로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겠지·
맞는 말이었다·
서로 변장하고 정체를 숨긴다 하더라도 마법을 쓰는 걸 옆에서 보다 보면 짐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런 말을?’
고나달테스:그런데 나는 그쪽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나만 정체를 알리는 셈이니 내 손해잖나·
비버-펭귄-여우:···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마·
일렌딜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답장했다·
이 교활한 자식이 더 많은 걸 뜯어내려고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수꾼 클럽에서 일렌딜이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고나달테스는 비교적 늦게 들어온 편 아니던가·
고나달테스:그렇게 말해도 아는 건 아는 건데·
비버-펭귄-여우:말해보시지· 만약 맞힌다면 앞으로 파수꾼 클럽 일에 관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도와줄게·
일렌딜은 코웃음을 쳤다·
절대 상대가 맞힐 리 없었···
고나달테스:일렌딜 선배·
비버-펭귄-여우:····
고나달테스:맞았지? 앞으로 아티팩트에서 이야기할 때 잘 부탁하지· 이악투스 욕할 때 좀 도와주고·
비버-펭귄-여우:얻ㅇ더덯게?
고나달테스:그건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보다 선배 용병들이 꾸미고 있는 일은 어떻게 안 거지?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는 걸 물었다·
나름 그랑덴 시를 돌아다니고 있는 이한도 전혀 몰랐던 일을 일렌딜이 꿰고 있다니·
대체 어떤 방법으로 알아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버-펭귄-여우:용병 중 한 명이 부리는 정령이 나한테 와서 알려줬어·
“····”
이한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 * *
“애들아· 모여 봐라·”
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불렀다·
아까 쓰러진 용병부터 시작해서 지금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깨달은 친구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너희가 부리는 정령도 배신할 수 있다· 계약 내용을 자세히 확인해봐·”
“···뭐 뭔 소리야?”
“저 용병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
“그것도 지금 할 거야·”
이한은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놀랍게도 지금 이 용병 무리들이 날뛰는 이유는 악신숭배자들 때문이었다·
악신숭배자들이 혼자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사실 거대한 계획에는 여러 수족이 필요한 법·
이번에 그랑덴 시에 온 용병들도 악신숭배자들에게 거액의 금화를 받고 따라 온 이들이었다·
-우린 지금부터 따로 갈 곳이 있소· 그대들은 이 유물을 받아 동료들에게 전해주시오·
‘병신인가?’
용병들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소리였다·
대체 뭘 믿고 용병들한테 유물을 넘긴단 말인가?
옆에서 감시해도 모자랄 판에 그냥 순순히 유물을 전해주라니·
용병들은 서로 갈라진 뒤 바로 유물을 암시장에 팔아넘길 생각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약속한 거요·
-그래· 약속했소·
유물을 받은 용병들은 낄낄대며 그 날로 도시를 뜰 계획을 준비했다·
잡일 몇 개 하고 금화에 고대 유물까지 챙기다니· 이렇게 수지맞는 의뢰도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랑덴 시에는 악신숭배자들이 소환한 괴물이 강림했고 동시에 유물을 받은 용병들에게도 지독한 저주가 발현됐다·
명령을··· 들을지어다···
증상은 악신의 환청과 환각·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용병의 전신으로 저주가 즉각 퍼져나가 심장을 움켜잡았다·
용병들은 그제야 악신숭배자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했던 행동 중 저주를 발현시키는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각자 현상금이 걸린 만큼 궁전 괴물 강림 사건으로 언제 정체가 발각될지 모르는 상황·
최대한 빨리 도망가야 했지만 용병들은 그러지도 못하고 악신의 목소리를 따라 명령을 수행했다·
가게를 습격하고 스완송을 훔치는 것도 그 명령 중 일환이었다·
집중해서 경청하던 앙라고가 물었다·
“그런데 용병들의 수준이 그렇게 대단해보이지 않던데 그랑덴 시 소속 마법사들이나 기사들이 나서면 금방 잡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그런데 선배는 저 유물을 손에 넣고 싶어 하시더군· 귀한 물건이긴 한가봐·”
‘이··· 건방진 마법사 새끼들이···!’
정신을 차린 악딘은 황당해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의 수준이 낮다는 비웃음을 받다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당장 악딘 본인만 해도 용병들 앞에서 신분을 밝히면 그 이름만으로도 의뢰에 동참하겠다는 놈들이 여럿 나오는데!
‘초조해졌나?!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악딘은 이를 악물었다·
산전수전 겪은 그가 가게에 들어온 손님을 얕봤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될 줄이야·
설마 적이 그렇게 턱밑까지 추적해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니다· 놈들은 날 비웃을 자격이 있다·’
적을 방심시키고 끌어낸 뒤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 위로 일격을 먹여 제압한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악딘은 설마 상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마법을 준비하고 가게 안을 확인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티팩트가 박살난 것도 실은 행운의 일격이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랑덴 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달려오자 이한과 친구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말렸다·
“잠깐! 어디 소속의 어느 마법사십니까? 은혜를 갚게 알려주십시오!”
“어···”
“그게···”
학생들은 당황했다·
물론 에인로가드 소속이긴 했지만 지금은 변장한 상황 아닌가·
게다가 상황의 중요성을 봤을 때 에인로가드 소속인 걸 밝히면 데스 나이트들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어 보이는데···
“그 저희 나고 가문 소속 마법사입니다·”
“아! 그래! 나고 가문 소속입니다 저도!”
“오오···!”
직원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신기해했다·
최근에 그 소문이 자자한 나고 가문에 다른 마법사들도 있었단 말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저번에 에인로가드 죽음의 기사들에게 아는 가문이냐고 물어보니 아주 비범한 가문이라더군요·”
“정말 놀랍군· 제국에 비범한 가문들이 많다지만···”
‘나고 가문··· 앞으로 주의해야 할 이름이다·’
힘이 꽁꽁 봉인된 악딘은 머릿속으로 깊숙이 기억했다·
노련한 용병은 자신을 쓰러뜨렸다고 원한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하고 최대한 회피했다·
강자와 싸워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지금 나고 가문 소속 마법사들의 실력을 보니 앞으로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 * *
일렌딜은 근처 화원에서 고나달테스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본적으로 일렌딜은 다른 마법사들과 실제로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호칭을 고나달테스라고 붙이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법·
귀한 유물을 확실히 손에 넣으려면 에인로가드 학생과 협력하는 게 맞았다·
고나달테스의 실력은 확실했으니···
‘악딘을 저렇게 쉽게 제압할 정도면 4학년 아니 5학년인가? 누구지?’
충격 때문에 일렌딜은 상대가 자신을 ‘선배’라고 불렀다는 것도 놓치고 있었다·
“계십니까?”
“···아아니!”
일렌딜은 우르르 들어오는 마법사들을 보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가장 앞에 있던 마법사가 일렌딜을 알아보더니 물었다·
“일렌딜 선배?”
“왜 왜 이렇게 많아?”
“뭐가요?”
“마법사들이···”
“협력할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한데···”
일렌딜은 말끝을 흐렸다· 이한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뭇거리던 일렌딜이 느릿하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나는 이렇게 사람 많은 건 좀 거북해서···”
“····”
파수꾼 클럽에서는 그렇게 활발하게 말해놓고서!
이한은 황당했지만 일단 친구들한테 잠깐 나가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밖에서 기다려줄래?”
“저 사람이 너 공격하면 바로 소리 질러라· 워다나즈·”
“···설마 그러겠나·”
“저 사람 저번에 숲에서 암흑 정령 소환한 미치광이 아니야? 워다나즈만 내버려둬도 돼?”
‘부정할 수가 없군·’
일렌딜이 좁은 공간에 낯선 사람 여럿 있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2학년 학생들도 숲에 인공 암흑 정령을 풀어버린 선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2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일렌딜은 ‘그 미친 선배’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었다·
끼익-
문이 닫히자 일렌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변장한 겁니다·”
이한은 변장을 풀었다·
정령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착한 후배가 앞에 나타나자 일렌딜은 비명과 함께 뒤로 혼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