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화
이한이 도시 곳곳으로 탈주한 친구들을 한 명씩 합류시키는 동안 아리언과 직원들은 북문 쪽 창고 건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붕· 멀쩡하군· 벽돌들 빠진 곳? 없고·”
“저··· 그런데 아리언 님· 괜찮겠습니까?”
아리언의 일을 돕는 상단 직원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는 일이 맞나 싶었던 것이다·
···그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허름한 상단 창고에 묵게 한다니!
떠돌이 마법사도 후하게 대접을 받을 정도로 마법사란 직종의 가치는 특별했다·
그런데 평범한 마법사도 아닌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을 상단 창고에 묵게 하겠다니·
직원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례한 일처럼 보였다·
‘혹시 마법사들과 무슨 문제가 있으셨나?’
“후· 나도 좋은 곳을 준비해주고 싶었지· 하지만 마법사들이 한사코 거절하는 걸 어떡하나·”
아리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직원은 깜짝 놀랐다·
“창고를 마법사들이 고른 겁니까?”
“그래·”
‘정말 마법사들이란 다 하나 같이 괴팍하구나!’
직원은 무슨 마법적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지레짐작했다·
푹신하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면 마법이 약해진다거나···
“왔습니다!”
대화하는 사이 학생들이 상단의 창고들이 모인 구역의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그 모습에 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건물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벌레도 없고, 물도 안 새고· 약간 낡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침대도 없지· 하인도 없고· 욕탕도, 응접실도, 연주실도··· 음··· 너무 없는 게 많나?’
직원의 자신감은 빠르게 사라졌다·
방금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여기 창고 건물들은 너무 허름했다·
2층짜리 주택 정도의 크기로 벽돌을 널찍하게 쌓아 올린 덕분에 겉모습은 멀쩡해보였지만 안에는 상단의 물품이나 재고 같은 게 나무상자 째로 쌓여있기만 한 것이다·
“헉!”
학생 중 한 명이 짧게 비명을 내뱉었다· 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변명했다·
“그, 그게 급히 준비하느라 어쩔 수 없···”
“이···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서 지내도 됩니까???”
“····”
“····”
“야· 저 자식 입 다물게 해·”
“에인로가드 망신은 다 시키는군·”
“으으으읍! 으읍!”
기사처럼 검을 차고 있던 염소 수인족 학생은 친구들에게 입을 막힌 채 끌려나갔다·
직원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방금 호화롭다고 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친구가 마법 실험의 실패로 가끔 헛소리를··· 아니! 이렇게 좋은 곳에서 지내도 되나?”
“살코· 너까지 왜 그러냐 진짜·”
“미안하다···”
학생들은 창고 건물들을 보며 누가 어디를 쓸지 신중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방금 한 실수들이 있어서 다들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여기 궁전은··· 아니, 창고는 연금술 용도로 써도 되나?”
“창고야 넉넉하니까 그래도 되겠지· 저기 저택은··· 아니, 창고는 갖고 들어갈 물자 모아놓는 용도로 쓰자고·”
“워다나즈· 여기 창고 안에 침낭이 있는데 혹시 이 건물은 창고가 아니라 여관 같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여관이 어딨겠냐···”
* * *
침착을 되찾은 에인로가드 2학년들은 식당으로 결정내린 창고 건물에 모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 편안함, 안도감, 뿌듯함 등 에인로가드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여주는 감정이 엿보였다·
짚과 흙, 물과 마법으로 만든 간이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눕힌 살코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들 계획이 어떻게 되지?”
“음·”
“그게 말이지·”
친구들은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봤다·
이들 중 정말 탈주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사람이 없었던 만큼 계획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신나긴 한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친구들이 헤매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살코는 이한을 불렀다· 여기서 유일하게 계획이 있을 놈이었다·
“워다나즈!”
“음?”
소환환 언데드들과 함께 숙소로 쓸 창고 안을 정리하고 보강하던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게 있다!”
“어· 잠깐만 기다려라·”
이한은 창고 곳곳에 빛의 구체를 띄우고 바닥에는 화염 부여의 각인을 완성시켰다·
그런 뒤 <비블레의 마력 발산 부여>를 시전했다· 창고 안에서 유지될 마법의 추가 마력원이었다·
버두스 교수에게 배운 아티팩트 제작의 비결을 간이 숙소의 편의성을 위해 낭비하고 있었지만 여기에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부여 마법 전공인 아덴아르트만 경악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마법을 고작 저것 때문에 쓴다고?
“커피? 홍차? 코코아? 밖에 나오니까 선택지가 많아져서 좋군·”
“아이스크림 소다도 되나?”
“그래· 여기 있다·”
앙라고는 신이 나서 양철컵을 받았다· 안에는 펄펄 끓는 맹물이 담겨있었다·
“···코코아로···”
“잘 생각했다·”
앙라고는 교훈을 얻었다·
아이스크림 소다를 욕심내다가는 코코아도 뺏길 수 있다는 교훈을·
상단 직원에게 받아 온 과자를(이한이 돈 주고 샀다) 돌린 뒤 이한도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그래· 뭘 물어보려고 했지?”
“네 계획이 궁금하다· 여기서 가장 외출에 능숙한 건 워다나즈 너일 테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음· 난 일단 알시클 님의 후원자를 찾는 걸 도와드리고·”
“?”
듣던 친구들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지?
“그 다음에는 보충해야 하는 물자 구입하고, 필요한 아티팩트나 서적 추가로 구입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의뢰나 몇 개 해결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
“···넌 그럴 거면 대체 왜 밖으로 나온 거냐?”
앙라고는 무심코 말해버렸다·
밖에 나와서 하는 게 에인로가드 안에서 하는 일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이한은 헛소리를 하는 친구를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안에서는 물자나 서적을 쉽게 못 구하잖아·”
“그, 그렇긴 한데···! 좀 더 너만을 위한 시간도 보내야지!”
“남는 시간에 의뢰 해결한다고 했잖아·”
이한은 앙라고가 왜 이렇게 계속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 아이스크림을 안 만들어줘서 저러나?
하지만 이번에는 친구들도 앙라고의 편이었다·
“그건 너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워다나즈·”
“내가 보기에도 아닌 것 같아···”
“?!”
친구들의 비난에 이한은 당황했다·
살코나 요네르, 닐리아나 아산까지 합류해서 비난할 줄이야·
아덴아르트는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솔직히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람차고 뿌듯한 계획 같은데···’
“뭐야· 그럼 너희들 계획이나 들어보자· 얼마나 즐거운지·”
갑자기 화살의 방향이 바뀌자 친구들은 당황했다·
“아, 아니· 난 격구나 보러 갈까 했는데·”
“나는 새 수판(數板)을 사려고···”
“별로 대단하지도 않군·”
이한은 코웃음을 쳤다· 앙라고와 아산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격구 경기 재밌어!”
“각 공방마다 차이가 있다고!”
“닐리아는 뭐 귀족들 무도회 참가할 거고, 요네르는 공방에서 일하겠지·”
“?!?”
닐리아는 귀를 위로 세우며 기겁했다·
아닌데?!
하지만 친구가 먼저 대답해버리는 탓에 닐리아는 해명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한 말이 맞긴 해· 나도 사실 완성해야 할 물약들이 몇 개 있거든·”
“으음· 나도 준비하고 있는 마법에 필요한 마도서를 찾긴 해야 하지·”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학생들 모두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인로가드에 들어온 이상 도중에 외출하더라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그래도 이렇게 나왔을 때 좀 우리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해· 다음 학기는 더 바쁘고 다음 학년은 더 더 바쁠 거라고· 선배들을 생각해봐· 노예나 마찬가지야!”
앙라고의 말은 자리에 있는 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선배들을 들먹인 게 아주 위력적이었다·
매일 매일 시간의 노예가 되어서 허덕이는 선배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오늘이 여유로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한 것이다·
“다 같이 뭐라도 찾아볼···”
“엇· 이거 폐기된 상자인데 안에 시약이 들어있군· 직원한테 물어봐야겠다· 써도 되냐고·”
“뭐? 진짜? 어떤 게 있는데?”
“멀쩡한 시약을 버릴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
이한의 말에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서 ‘이거 버린 거면 우리가 써도 되나?’로 이야기하는 모습에, 앙라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포기했다·
‘나도 그냥 마도서나 몇 개 찾아가지고 들어가야겠다···’
* * *
붉은 색의,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처럼 보이는 염목근(焰木根)은 강한 화염의 기운이 응축된 시약이었다·
하지만 폐기된 나무 상자 안에 든 염목근들은 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 시약들은 운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폐기한 겁니다·”
“버리실 거면 저희가 써도 됩니까?”
“네? 폐기 상자 안에 든 재고는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만, 쓰실 곳이 없을 텐데요···”
직원들은 의아해했다·
기본적으로 마법 관련 물품들은 그 취급이나 운송이 훨씬 까다로워 폐기되는 양도 많았다· 당연히 창고 안에는 이런 폐기 물자들이 꽤 됐다·
하지만 이런 건 사용할 곳이 없었다· 있었다면 여기 상인들부터 활용했을 것이다·
“시약이 필요하신 거면 멀쩡한 시약을 쓰시죠?”
“아니· 괜찮습니다·”
허락을 받은 이한은 친구들과 함께 돌아왔다· 요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허락을 받은 건 좋은데, 이거 활용할 방법이 있어?”
“과연!”
아산이 감탄한 표정으로 외쳤다·
“??”
“잘 위장해서 기운이 남아 있는 척 꾸미고, 멍청한 마법사들한테 팔아먹으려는 거군! 바로 발드로가드 놈들한테!”
“천, 천재적이군···!”
요네르를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감탄했다· 심지어 아덴아르트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속임수는 좋지 않았지만 상대가 발드로가드라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사기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었냐?”
“당연히 아니지·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나 찾아볼 거다·”
“그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잠깐· 먼저 물어보고· 안 된다고 하면 그 때 포기하지·”
“??”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누구한테 물어본단 거지?
이한은 창고 뒤쪽으로 혼자 걸어가더니 지팡이를 들고 누군가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차갑게 내뱉은 욕설도 조금 들린 것 같았다· 요네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이한이 돌아왔다·
“방법이 있다는군!”
“뭐!? 정말?!”
방법이 있다는 말에 놀란 친구들은 누구와 대화했는지 캐묻는 걸 잊어버렸다·
사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 * *
“알파· 흠집의 위치가 틀렸다· 10도 정도 옆으로 돌려야 해·”
“윽· 또 실수했네·”
학생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해 작업으로 들어갔다·
기운을 잃어버린 염목근을 다시 회복시키는 건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손이 많이 갈 뿐·
먼저 불의 기운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게 문양 모양의 칼질을 해준 뒤 특수한 연금술 기름과 함께 화염이 응축되어 끓어오르는 솥에 던져 넣어야 했다·
그 뒤 정확한 시간과 주문으로 염목근이 파괴되거나 덜 회복되는 걸 막아야 했고···
“흐음· 메이킨· 기름 좀 봐주겠나?”
“괜찮은 것 같은데··· 점성이 약간 부족해· 강화 마법을 걸어야 할 것 같아· 두 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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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닐리아와 아덴아르트는 서로 소환한 불의 정령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와· 어떻게 저렇게까지 키웠지?’
‘저 많은 정령들과 어떻게 계약을?’
그리고 로웨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워다나즈 님· 화, 화염이 이렇게까지 필요한 겁니까?”
“물론· 망가진 시약을 회복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
이한은 솥 안에서 끓어오르는 응축된 화염의 정수를 더더욱 강화시켰다·
푸른색 불꽃이 아낌없이 투입되자 부글거리는 정수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그 모습에 로웨나는 왜 시약을 회복하는 방법이 실전됐는지 깨달았다·
제국 어디에도 이렇게까지 마력을 낭비해서 시약을 회복하려는 마법사는 없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