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화
“봉인!”
이한의 입에서 평소보다 몇 배는 거칠고 살벌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모독의 기사가 뿜어내던 악의 넘치는 눈빛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방금 쓰려던 프라흐갈의 권능이 막혀버린 것이다·
-내 앞에서 쓰러질 또 하나의 언데드로구나· 네놈이 어느 잡신에게 꼬리를 흔들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데드인 이상 네놈의 힘은 통하지 않을 것이니!
마후다는 그렇게 외치며 이한의 육신을 움직였다· 오러가 밝게 타오르며 동시에 검이 그걸 흡수하는 과정이 빠르게 반복됐다·
-신기하군!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걱정하지 마라 마법사! 날 배려해 준 은혜는 잊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방심하지 않고 있다· 언데드를 사냥하면서 단 한 번도 방심한 적이 없지!
모독의 기사는 자폭의 권능을 포기하고 다른 권능을 꺼내들었다·
기사의 갑옷이 뭉개지더니 그 형태가 사라졌다· 슬라임 같았지만 그보다는 기체에 더 가까웠다· 순식간에 모독의 기사는 찐득찐득한 부패의 기운로 화해버렸다·
그러나 마후다는 태연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모독자의 권능이로군· 내가 경험한 게 162번인데 아직도 변화가 없다니· 그런 권능이 통할 것 같은가? ···봉인!
다시 한 번 상대의 권능이 봉인당했다· 모독의 기사는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제국의 사람들은 언데드나 악마가 같은 게 아니냐고 착각하기 쉬웠지만(보통 흑마법사들이 이런 오해를 가장 싫어했다) 사실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이도 좋지 않았다·
필멸자들의 영혼이 뿜어내는 감정을 착취해야하는 악마 입장에서 그런 원천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삭막한 언데드들은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후다는 그런 악마들 중에서도 언데드를 특별히 혐오하는 악마였다·
먼 옛날 우연히 소환되었다가 언데드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한 이 악마는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언데드를 사냥하고 모욕 주겠다고 진명을 걸고 맹세했다·
덕분에 어느 악마보다도 언데드 사냥에 관해서는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한 언데드로군· 악신을 숭배하는 언데드라니?
‘악신을 숭배한다고?’
이한은 마후다의 말에 놀라워했다·
기본적으로 언데드들은 신앙심이 부족한 편이었다· 꼭 해골 교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가 신성과는 상극이었다·
그런데 악신을 숭배한다니· 아까 이한이 느낀 게 착각이 아니었다·
“이유야 뭐든 간에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군·”
안 그래도 강력한 적이 악신의 힘까지 빌릴 수 있다면 상당히 까다로울 게 뻔했다·
언데드와 신성의 융합이라니·
-하! 걱정하지 말게· 마법사여·
그러나 악마는 자신만만했다·
-상대가 언데드인 이상 내 봉인의 권능을 뚫기는 힘들 테니까!
“음· 이런 질문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너는 안푸르사스와 달리 친절하군·”
-당연한 일 아닌가? 마법사는 안푸르사스와 달리 내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줬다· 감사할 일이지·
“······”
보아하니 안푸르사스는 팔찌 안으로 깊게 침잠한 뒤 계속 이한을 욕한 모양이었다·
이한은 투쟁과 전투의 악마인 안푸르사스가 얼마나 귀찮게 굴었는지 떠올렸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계속 빌고 빌어서 잠깐 몸을 빌려줬더니 함부로 사용해서 끙끙 앓게 만든 악마 놈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은혜도 모르고 뒤에서 욕을 하다니·
-게다가 언데드 봉인의 권능도 이렇게 마법사 덕분에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봉인!
안푸르사스와 달리 지상에서 언데드를 사냥하느라 비교적 높은 사교성을 가진 마후다였다·
이한이 친절하게 몸을 빌려준데다가 마력까지 넘치게 제공해주자 마후다는 자연스럽게 사근사근해졌다·
원래 친절을 베풀면 친절이 돌아오는 법·
“넌 워다나즈가 아니군· 누구냐!”
알시클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이한이 겉모습을 바꾸고 있다지만 지금 보여준 권능은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나는 마후다· 언데드 사냥을 위해 마법사가 불러온 악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워다나즈를 불러라!”
알시클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기세를 뿜어냈다·
아직 적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아군끼리 싸우면 어떻게 될지 알시클이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악마가 육신의 통제권을 뺏었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의미였다· 최악의 경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저 괜찮습니다· 잠깐 빌려준 겁니다·”
“······”
너무나도 쉽게 이한이 다시 말하자 알시클은 순간 황당해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뭔···?
* * *
보 아 라!
공중에서의 전투도 점점 더 그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프라흐갈과 결탁한 걸 드러낸 모독자는 아예 대놓고 권능을 빌려서 쓰기 시작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패의 군세들이 재생의 권능을 받자 덩치와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허공을 감싼 데스 나이트들의 쇠사슬 그물도 비명을 질렀다·
-놈이 만만치 않다· 힘이 줄어들지가 않아!
-프라흐갈의 권능인가? 악신이 왜 언데드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전략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데스 나이트들은 빠르게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허공과 차원문을 감은 쇠사슬은 평범한 쇠사슬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인인 고나달테스가 직접 운철(隕鐵)을 벼려서 만들어 준 아티팩트였다·
그렇기에 이 난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궁전 밖은 평소처럼 조용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봉쇄하고 포위한 뒤 공성병기로 놈의 힘을 깎아 역소환시킨다·
그게 데스 나이트들의 처음 전략이었다·
그러나 모독자는 맹수에게 공격당하고 공성병기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꾸역꾸역 덩치를 부풀려나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쇠사슬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지면 사방으로 군세가 퍼져나갈지도 몰랐다·
-고리가 세 개 더 끊어지면 공세로 나선다· 피해가 커지더라도 놈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밖에·
-맹수여! 혹시 더 강하게 공격할 수단은 없는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네!
‘죽여버릴까?’
물어뜯은 모독자의 살점을 권능으로 태워버리며 맹수는 속으로 분노했다·
데스 나이트들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강자라면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라!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지금 상황이 반박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평소 썩히고 타락시키는 것만 할 줄 아는 뚱뚱보 새끼라고 비웃던 모독자였지만 악신과 융합하자 그 힘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맹수가 사방에서 모습을 변화시키며 물어뜯고 찢어발겨도 바로 재생시켰다· 오히려 재생 과정에서 그 덩치가 더욱 커졌다·
여유만 있다면 맹수의 권능을 사용해 놈이 재생하지 못하도록 육신의 성질을 변화시키고 확실하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지만 모독자도 바보가 아니었다·
맹수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서도 교활하게 몸통에 뒤룩뒤룩 달린 눈동자가 굴러갔다· 재빠른 상대가 실수하는 순간 확실하게 붙잡아서 끝장내려는 살의가 느껴졌던 것이다·
비교적 느리지만 사기적인 재생의 권능과 파괴력을 가진 모독자·
빠르고 현란하지만 한 대 맞으면 복구시키기도 전에 역소환될 수 있는 맹수·
후자는 실수가 허락되지 않았···
쾅!
반파된 궁전 지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 한 명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마법사는 지팡이 대신 창을 들고 있었다· 녹색 마력이 이글거리며 주변의 공기를 지글지글 태웠다·
-나고 님!
“죽어라· 언데드들!”
녹색 창이 회전하며 날아가자 주변의 공간이 그대로 휘어져 창에 빨려 들어갔다·
모독자의 하수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나왔다· 언데드들만을 노리는 지독한 권능이었다·
‘검술 아니 창술인가?!’
이한은 마후다의 창술에 놀랐다·
이 악마는 놀랍게도 창술을 단련해 권능을 구현하고 있었다·
물론 마법을 쓰는 악마가 있듯이 검술이나 창술을 쓰는 악마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악마들의 마법은 사람의 마법과는 그 궤가 달랐다· 타고난 힘을 가진 종족이 쓰는 마법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검술이나 창술은 훨씬 더 단련과 수련을 필요로 했다· 굳이 다른 힘이 많은 악마가 저걸 익혔다는 게 신기했다·
-지상에서 언데드를 사냥하기 위해서다· 마법사·
마후다는 이한의 의문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악마가 타고난 힘과 권능은 난폭하고 강력했지만 그만큼 단순한 면이 있었고 언데드들이 대응하기도 쉬웠다·
그렇기에 마후다는 기나긴 시간 동안 단련하고 단련했다·
오로지 언데드들만을 죽이기 위해서·
-한 번 더!
“!”
다시 날아가는 녹색 창과 순식간에 줄어드는 모독자의 군세·
두 번째로 목격한 이한은 방금 공격이 단순한 창술이 아닌 소세계와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다!’
뛰어난 검사가 의념으로 무기에 오러를 담아서 싸우는 것도 마법과 유사한 기술을 쓰는 것도 봤었지만 소세계 수준까지 단련된 기예는 정말로 놀라웠다·
오로지 언데드 살해를 위해 만들어진 투창!
-저건··· 마후다의 창이다! 어떻게 마후다의 창술을?
데스 나이트들 중 몇몇이 스테달의 창술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이들도 그 역사가 긴 언데드인 만큼 지독하게 언데드를 증오하는 악마의 전승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귀족이 고대의 창술을 사용할 줄이야·
사용하는 마법도 그렇고 창술까지·
정말 정체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놀랍구나! 저런 자가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에인로가드 교수로 초대해도 손색이 없다!’
쇠사슬 영역 안으로 훌쩍 날아 들어온 스테달은 초월자들의 혈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오연하기 그지없었다·
힘의 차이가 얼마나 나든 필멸자로서의 긍지를 가진 전사만이 가능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데스 나이트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수없이 겪은 게 분명하다·’
이번 전투만 끝나면 데스 나이트들은 해골 교장에게 새로 나타난 뛰어난 마법사의 이야기를 보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에인로가드의 새 교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겸사겸사 버 모 교수도 좀 내보내면 안 되냐고 청원하고···
죽 인 다!
기껏 불려놓은 군세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모독자의 분노가 이한한테 튀었다·
데스 나이트들이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한은 다급히 외쳤다·
“놈이 이쪽을 본다!”
그러나 마후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증오 서린 눈으로 모독자를 오만히 마주보았다·
-와라· 언데드·
건 방 진!
‘아니 미친 놈이·’
이한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싸우는 건 좋지만 굳이 추가로 도발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언데드를 증오하는 건 알겠지만 이한 입장에서 계획을 벗어나는 일은 사양이었다·
-나고 님을 도와라!
“아니· 물러서십시오!”
이한은 잠시 입을 빌려 외쳤다· 데스 나이트들은 멈칫했지만 군말 없이 물러났다· 노련한 기사들다운 태도였다·
맹수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알아서 거리를 벌렸다· 오로지 모독자만이 돌진해왔다·
“봉인!”
외침과 함께 모독자의 거대한 덩치에서 힘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일개 하수인들처럼 바로 무력화시킬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투창!”
이제까지 보인 투창은 전력이 아니었다· 마후다는 이한의 마력과 근육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언데드 살해의 창을 던졌다·
제대로 맞은 모독자의 육신은 아까처럼 재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공세는 여전히 유지됐다·
-역시 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언데드로군· 잡신과 결탁해서 힘을 빌릴 줄이야· 이런 건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온다· 집중해!”
-알고 있다!
모독자가 오염의 포효를 터뜨리며 이한 앞까지 도착했다· 창을 찌르든 선언을 하든 그대로 삼켜버릴 기세였다·
그리고 그 순간 궁전 안에서 뇌성과 벼락의 격류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거대한 기둥을 만들며 모독자를 꿰뚫어버렸다·
죽어라 역겨운 놈· 감히 뇌공왕을 어둠 속에서 매복하게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