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8화
“뭐? 진정시키는 물약이 왜 필요해?”
앙라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독약이나 괴수 소환 물약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을 겁에 질리고 미치게 만드는 물약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질문에 이한은 마치 쓰레기를 보듯이 앙라고를 쳐다보았다·
“잘못 없는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아 아니··· 그 그냥· 이론상 한 소리지·”
“소란이 일어나면 연극은 잠시 멈출 거다· 관객들도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겠지· 그 때 물약을 나눠줘야 한다·”
아덴아르트와 그녀의 호위 기사인 로웨나는 살짝 감동 받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국 사람들을 위한 헌신을 잊지 않다니·
워다나즈 가문이 괜히 제국의 기둥이 아닌···
“그리고 나눠준 다음에 재료를 더 가지러 가야겠다고 핑계대고서 귀족들 몇몇하고 같이 빠져나가· 귀족들이 옆에 있으면 데스 나이트들도 의심 못 할 거야·”
“······”
“······”
둘이 보내는 실망의 눈빛은 무시하고 이한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주변이 혼란스러워도 다 같이 우르르 나가면 들키기 쉬우니 인원을 이렇게 나눠야 해· 너희는··· ‘물약 탈주 파티’라고 하자· 선배들 중에서 연금술 자신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 합류하라고 해줘·”
“잠깐· 워다나즈· 난 연금술에 썩 자신이 없는데· 메이킨이 낫지 않겠어?”
앙라고는 머뭇거렸다·
치유 마법 학파 소속이라 물약 제조에 대해 어느 정도 추가로 독학하긴 했고 1학년 때도 듣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주전공은 아니었다·
“안 돼· 요네르는 다른 역할이 있어· 요네르는 ‘귀족 현혹 파티’야·”
“······”
요네르는 대체 무슨 이름이 그러냐는 눈빛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귀족들과 미리 대화하면서 속여 놓는 건가·”
“그렇지·”
도중에 연극이 멈추면 기다리는 대신 돌아가는 걸 선택하는 귀족들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요네르를 포함해 대귀족 가문 출신 학생들은 이런 귀족들과 미리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초대를 받아놓는 게 좋았다·
그러면 연극이 멈췄을 때 여기 귀족들과 같이 나갈 수 있었으니까·
“호위인 데스 나이트들 몰래 나가야 한다고 하면 협력해줄 거야·”
“과연·”
‘나는 물약 탈주 파티구나·’
닐리아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금술 전공인 만큼 물약 제조에는 자신이 있···
그 때 요네르가 닐리아의 손을 잡더니 말했다·
“닐리아· 네가 말 잘 해줘야 해·”
“···응?? 난 물약 탈주 파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넌 귀족 현혹 파티지·”
“맞아· 닐리아 님은 귀족 현혹 파티가 어울리십니다·”
“같은 탑인 내가 보기에도 너는 거기가 어울린다·”
“······”
닐리아는 친구들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당황했다·
어째서??
“살코· 너는 그냥 뚫고 나가는 걸 선호하는 선배들과 같이 움직여줘·”
“이름은 ‘드워프 땅굴 파티’라고 해도 되나?”
“···이름은 마음대로 하고· 여하튼 혼란이 일어났을 때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해· 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맡겨만 둬라·”
전부 다 귀족들하고 같이 나갈 수는 없었다·
학생들 중 일부는 정면으로 연극이 진행되는 궁전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감시가 줄어든 만큼 땅굴을 파거나 다른 통로를 찾는 것도 비교적 쉬우리라·
“나는 남아서 문제가 생기는 파티를 지원하겠어· 다들 힘내라·”
이한과 친구들은 비장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 정도로 준비해뒀으니 잘만 풀린다면 몇몇은 잡히더라도 꽤 많은 숫자가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 * *
“잠깐· 달카드· 그러고 보니 넌 왜 귀족 현혹 파티에 참가 안 했지?”
“아· 나는 귀족들 상대하는 게 자신이 없어서·”
“······”
앙라고는 어이가 없었다·
푸른 용의 탑 출신 놈이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의외로 다른 푸른 용의 탑 선배들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맞아· 그에 비해 연금술은 얼마나 편해· 솥 안에 물약은 나한테 말을 안 걸거든·”
선배들의 응원에 아산은 힘입어서 말했다·
“사교는 이제 닐리아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 난 잘 안 어울려· 난 숫자가 더 좋다·”
“확실히 걔는 남다르긴 하지·”
흰 호랑이 탑인 앙라고가 인정할 정도로 닐리아의 친화력은 남달랐다·
아마 30분 정도면 귀족들과 모두 친해졌으리라·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지금 그들은 궁전의 화장실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연금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데스 나이트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물약을 제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위치 이동 클럽의 다른 놈들은 왜 아무도 안 보이지? 한 명밖에 안 온 건 아닐 테고·”
“···어···”
앙라고는 그 말에 머뭇거렸다·
그러게?
아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위치 이동 클럽 소속이 아닌 둘은 짐작가는 게 없었다·
“잘 모르겠네요·”
“혹시 너희 친구 워다나즈가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한 거 아니야? 선배들 앞에서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선배들은 농담을 던지고서 웃었다·
그러나 아산과 앙라고는 바로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 있긴 하지만···”
* * *
닐리아는 15분 만에 다섯 가문에게 초대를 받았다·
‘살려줘!’
귀족들이 단체로 북부 산맥 사냥을 가겠다고 제안해오자 닐리아는 등에서 진땀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험준한 북부 산맥에 사냥을 즐기기 위해 오는 귀족들은 보통 사냥감에게 죽거나 발을 잘못 디뎌서 죽거나 수상쩍을 정도로 그림자 순찰대가 쓰는 것과 비슷한 화살을 맞고 죽거나 하는 것이다·
“저기 북부 산맥은 조금 위험할 수 있는ㄷ···”
“사냥은 원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메이킨 양!”
“위험할수록 더더욱 재미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에인로가드에 입학하시던가···’
요네르는 속으로 울컥했다·
그렇게 위험한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극장 앞에만 모여 있단 말인가?
“저기· 황녀님· 좀 도와주시겠어요?”
“···음···”
망설이던 아덴아르트는 결국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황녀로서의 책임감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닐리아의 눈망울이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여러분·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이 외투 정도면 북부 산맥에서도 괜찮겠지요?”
“거기에 목도리 정도는 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참· 북부 산맥에도 극장이 있을까요?”
“······”
아덴아르트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가이난도와 달리 황녀를 지지하는 제국의 후원자들은 그 숫자가 제법 됐지만 불운하게도 오늘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신나서 북부 산맥에 언제 갈지만 떠들어댔다·
“여러분··· 여러분···”
생전 처음 겪는 경험에 주눅든 아덴아르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모습에 로웨나가 분노해서 소리치려고 하자 요네르가 다급히 말렸다·
“지금 그러면 황녀님만 더 망신이야!”
“하 하지만 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진정해! 그냥 자기들끼리 신나서 그런 거니까!”
이제 사람들은 사냥하기 좋은 날짜를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 닐리아는 지나가는 이한을 발견하고 다급히 불렀다·
“스테달 씨! 스테달 씨!”
“??”
이한은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잘 오셨습니다· 스테달 씨! 혹시 저희와 같이 북부 산맥에 사냥가시겠습니까?”
“얼어 죽기 딱 좋을 겁니다·”
“!”
충격적인 말에 떠들던 사람들이 일제히 굳어버렸다·
그래도 말을 꺼낸 사람은 머뭇거리며 다시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 닐리아 양은 <그림자 순찰대> 소속의 노련한 사냥꾼이시고··· 다른 분들도 계실 테니까···”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북부는 제국의 땅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가혹하고 사나운 땅· 그리고 북부 산맥은 북부 안에서도 특히 가혹하지요· 저는 예전에 북부를 떠돌다가 모라디 가문의 기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한은 지젤의 가문을 팔아먹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스테달의 무례한 말에 충격 받고 굳었던 사람들도 어느새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무기와 미노타우로스 악신숭배자들까지 나오자 경악한 사람들은 신중하게 바뀌었다·
“그럴 수가! 북부가 이렇게 위험한 땅이었을 줄은··· 다음 달에 모라디 가문에 방문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미뤄야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아니 아닙니다·”
이한은 약간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방금 말한 몬스터들은 이한이 직접 듣거나 옆에서 같이 경험한 일이었다·
‘북부는 위험한 게 사실이니까·’
* * *
셋 중 의외로 살코 쪽 파티가 제일 안정적으로 진행됐다·
환상 마법사들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 뒤쪽의 창고를 찾아낸 살코는 선배들과 함께 지하 통로를 즉석에서 파내려갔다·
이한은 그 솜씨에 감탄하며 말했다·
“에인로가드도 이렇게 탈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힘들지· 지하에도 장벽이 있거든·”
‘진짜 개쓸데없이 돈을 쓰시는군·’
해골 교장을 한 번 욕해준 뒤 이한은 물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아직 눈치 못 챈 것 같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던데·”
‘내가 말한 것 때문인가?’
이한은 자신이 마드프를 수상하다고 신고한 것 때문에 저러나 싶었다·
아직까지 데스 나이트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주지 못할 정도라면 생각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
‘후후· 이대로라면 바로···’
-나고 님·
“!”
걸어 나오던 이한은 데스 나이트들이 앞에서 다가오자 깜짝 놀랐다·
‘···들켰나?’
“무슨 일입니까?”
-마드프는 악신숭배자였습니다· 심문했더니 놈들이 궁전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토해내더군요·
“······”
이한은 순간 멍해졌다·
궁전 탈출만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악신숭배자 이야기가 나오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무슨···?’
생각해보니 최근에 디레트한테 악신숭배자들이 기승을 부려서 사람들이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가까이에서 일어날 줄이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계획들을 전부 취소해야 하나?’
-나고 님·
“예?”
-지금 궁전에 계신 분들 중 협력 가능한 분들은 모두 모아서 상황을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와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니 에인로가드 학생들부터 시작해서 환상 마법사들 그리고 알시클까지 홀에 모여 있었다·
전력이 되는 마법사들은 전부 부른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악신숭배자라니? 설마 여기에도 숨어 있진 않겠지·”
“연극을 중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악신숭배자들한테 겁먹어서 일을 멈추는 게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여기 모인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거고요!”
“그래도 귀족들에게 말은 해야 하지 않겠나·”
“안 됩니다· 귀족들 중 누가 협력자일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앙라고가 슬쩍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워 워다나즈· 설마 네가 준비한 소란이란 게 악신숭배자들은··· 아니지···?”
“······”
이한은 앙라고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그 모습에 데스 나이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난폭한 마법사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