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준비한 게 많이 남았는데·’
이한은 냉정한 상인의 모습에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스테달 나고가 투기 파동 이후 불확실한 마탑 투자 대신 안정적인 광부 길드 투자를 선택해 대성공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스테달 나고가 마법사들을 믿지 않을 만큼 현명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줬다·
마탑이나 마법사 길드는 기본적으로 투자하기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잠깐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귀족 분이 곧 탑승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흐음· 이 분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분이십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지요· 가볍게 인사만 하고 궁전에 도착하신 뒤 다른 분들과 대화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옆에 있던 아무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사람과 왜 같이 가는 것이오?”
“상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지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분 같은 경우에는 후원자를 찾고 계시는데 제가 돕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카아코 상단은 제국에서 그 규모가 상당했고 거기에 소속된 아리언 또한 여러 일들을 다양하게 맡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식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해당됐다·
후원자를 찾는 젊은 귀족을 사교 모임에 소개해주고 분위기를 원활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상단은 귀족 가문과의 인맥은 물론이고 은혜까지 빚지게 할 수 있었다·
“저런· 성격 더러운 사람인가보군요· 상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말을 걸지 않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면 충분하오·”
“감사합니다· 아무르 님· 역시 아무르 님밖에 없습···”
그 때 마차 문이 열리더니 화려한 은색 눈송이 무늬가 새겨진 외투를 두른 펭귄 수인 마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펭에린 님·”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은···”
“나고 가문의 스테달 님이십니다·”
“그렇습니까·”
알시클은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하더니 길쭉한 마차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부리를 딱딱대며 중얼거렸다·
“가기 싫다···”
“펭에린 님!”
“···죄 죄송합니다·”
아리언의 따끔한 훈계에 알시클은 자세를 똑바로 했다·
생각해보니 모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차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임 참가자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분들은 후원자가 아니잖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소문은 언제 어디서 새어나갈지 모르는 법입니다· 이 분들의 입이 무겁지만 펭에린 님도 조심하셔야지요·”
“···대체 왜 후원자들은 연극 모임에만 모이는 겁니까? 마탑에서 마법 실험 구경하느라 모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알시클은 깊은 한이 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펭귄 수인 마법사인 알시클이 굳이 이런 연극 모임에 참가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후원자들이 있으니까!
새 연구를 위해 후원자들을 구해야 하는 알시클은 연극이 재미없고 별로여도 강제로 참가해야 했다·
‘흑흑· 진짜 가기 싫다·’
아무르가 옆에서 의아해하며 속삭였다·
“마법 실험도 인기 좋지 않소? 제국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분명 아무르는 제국 신문에서 <나무뿌리 마탑의 마법 실험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후원자들 전원의 머리카락이 나뭇가지로 바뀌다!> 같은 기사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저런 사고가 나도 계속 사람들이 모일 만큼 마법 실험은 은근히 보는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인기가 좋긴 한데 그게 마법에 따라 많이 갈립니다·”
“아하·”
대표적으로 흑마법 같은 학파는 실험을 보여주겠다고 해도 사람들이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장의사들이나 몇몇 찾아와서 일할 거 없나 물어보는 정도?
그리고 이한이 보기에는 알시클의 연구도 별로 인기 좋을 연구는 아니었다·
일단 너무 추웠다·
‘돈 많은 제국 사람들이 굳이 돈 내고 외진 곳까지 가서 추위에 떨 이유는 없겠지·’
눈송이가 크게 보면 예쁘긴 한데 멀리서 떨어지는 모습은 금세 질렸다·
둘이 소곤거리는 모습에 알시클은 문득 궁금해졌는지 아리언에게 물었다·
“혹시 나고 님께서는 좀 부유하신 편입니까?”
“···음 나고 님께서는 제국 남부의 해적들한테 붙잡혀 있다가 사략함대를 이끄는 토르게르드의 딸 라게사한테 구출되신 적이 있는데 해적들한테 붙잡혀 있을 때 얻은 보물지도를 찾아 크게 재산을 모으셨습니다· 그 이후 연금술에 전념해 몇 가지 물약을 만들어냈고 재산을 더더욱···”
“!”
청산유수 같은 아리언의 설명에 알시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같이 연극 보러 가는 할 일 없는 귀족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유한 사람이었다니!
알시클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정어리 통조림을 가지고 올 걸 그랬군·’
궁전에 정어리가 있길 빌며 알시클은 입을 열었다·
“나고 님· 나고 님의 타고난 행운과 식견에 대해서 실로 감탄했습니다· 뼈살이꽃 투기 파동 때도 재산을 모으셨다니 더더욱 놀랐습니다· 혹시 냉기 마법 연구에 관심이 있으신···”
“알시클 님· 저 변장한 워다나즈입니다·”
“···야!!!”
울컥한 알시클은 소리쳤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 * *
“대체 왜 그런 꼴로 변장해있는 거야?”
“에인로가드 연극 클럽 학생들을 탈주시키려고요·”
“···물어본 내가 잘못했다·”
알시클은 깊게 반성했다·
연극 보러 가기 싫어서 몸을 비트는 자신과 달리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친구들을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대체 에인로가드는 왜 그렇게까지 학생들을 괴롭히는 걸까?”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그보다 알시클 님· 연극에 대해서는 잘 아십니까?”
이한의 질문에 알시클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알시클 또한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썩 자신은 없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준비해왔거든요·”
“!”
알시클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저렇게 말하니 꽤나 든든했다·
안 그래도 대귀족 가문 출신인데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지금 간단한 연극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적대하는 두 가문의 후계자들끼리 사랑에 빠지는데···”
“둘 다 죽고 리치 나와서 부활시켜주는 거? 그건 알지·”
“······”
이한은 충격과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연극에 대해 잘 알면서 왜 모르는 척을 했단 말인가?
‘사람이 이렇게 비겁할 줄이야?’
“아 아니···! 이건 기본 교양 같은 거잖아! 이거 안 본 놈이 어디 있어!”
“···혹시 이것도 아십니까? 가난한 집의 소녀가 무도회장에 가고 싶어서 펑펑 울었는데···”
“리치가 나와서 드레스와 유리 검을 주는 그거 말하는 거지? 왕자로 위장한 악마를 죽이는? 나중에 진짜 왕자가 검 휘두르는 모습으로 소녀의 정체를···”
“알시클 님은 제가 안 도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그 그래라·”
알시클은 워다나즈 같은 마법사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북부 산맥에 사는 나무꾼도 마을에 내려가면 저 연극은 봤을 것 같은데···
슬슬 저 멀리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옛 왕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그랑덴 시의 명물로 과거 왕국 시절에는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도시 사람들의 연회 장소로 쓰이는 곳이었다·
벌써 먼저 도착한 화려한 마차들이 여러 대 보였다· 알시클은 이한에게 속삭였다·
“혹시 내 연구에 투자할 것 같은 사람 있으면 말해주겠어?”
“그러면 알시클 님도 제 친구들 탈주시키는 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두 마법사는 굳게 악수했다· 아리언과 아무르는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면 잘 다녀오십시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배웅을 받으며 두 마법사는 각오의 발걸음을 옮겼다·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며 쓸만한 사람들을 확인했다·
“알시클 님· 저기 몽환포영 출신 마법사 같습니다·”
“워다나즈·”
“예?”
“마법사들은 다 돈 없는 거지새끼들이라 관심 없어! 후원자를 찾아!”
‘발드로가드 같은 예외도 있는데·’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한이 보기에도 여기 와서 마법사들과 굳이 친해질 이유가 없었다·
후원도 받기 힘들고 나중에 이한이 문제 일으킬 때 괜히 방해될 수도 있으니···
“클빅 님· 연극이 시작할 때 시간은 어떻게 맞춰야 합니까?”
“노력과 반복일세! 여기 모인 마법사 분들은 모두 다 재능을 갖고 있지만 그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피땀 어린 노력이 필요하지·”
클빅은 환상 마법사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클빅이 여기 궁전에 찾아온 이유는 연극에 필요한 마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금 돌보고 있는 환상 마법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자기들끼리 폐쇄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마탑이 있다면 제국을 돌아다니며 학파 전체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정보를 퍼뜨리는 단체도 있는 법·
클빅이 소속된 몽환포영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고닌부터가 환상 마법 학파의 거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클빅은 그랑덴 시에 모인 인근 환상 마법사들을 아무 대가 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환상 마법사들의 눈빛은 존경심으로 반짝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이 클빅이 하나부터 열까지 확인할 테니까· 각자 맡은 마법을 준비하게!”
환상 마법사들의 대화에 이한은 흥미를 가졌다·
들어보니 연극에 필요한 마법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저기에 참가할 수 있다면 나중에 학생들을 탈주시키기 좋지 않을까?
“연극에 필요한 마법을 준비하는 모양인데요? 저기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크윽· 돈 안 된다니까···”
알시클은 불평하면서도 이한의 주장을 반대하진 않았다·
확실히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탈주시키기 위해서는 저런 연극 준비에 참가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았다·
워낙 감시가 철저한 만큼 빈틈을 몇 번은 찔러야 승산이 보이리라·
“나고 가문의 스테달보다는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 부탁하는 게 낫겠지· 그보다 가명이 낯익은데 진짜 있는 가문인가?”
“아뇨· 교장 선생님 거꾸로 한 건데요·”
“······”
알시클은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한 번 짓고는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알시클의 가문과 이름을 듣자 클빅은 흔쾌히 수락했다·
“영광일세! 얼마든지 도와줘도 좋네· 여기 마법사들에게 가르침을 줘도 좋고!”
“감사합니다· ···됐지?”
알시클은 돌아와서 이한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한의 표정은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어있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냐?”
1 “저기 발도르오른 님이 계십니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눈만 보였지만 이한은 바로 알아보았다·
저건 필로네 마을의 위대한 환상 마법사 발도르오른이었다·
“···어? 진짜?!”
알시클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워다나즈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환상의 마법사에 대해서는 알시클도 방학 때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발도르오른 님이···
-새삼 발도르오른 님이···
-발도르오른 님이 솔직히 오고닌 님보다 대단한 것 같은데요?
-생각은 자유인데 그거 환상 마법 학파 사람들 앞에서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누군데? 저 사람인가? 아니 평범해 보이는데?”
“원래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한은 살짝 존경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 강자는 발톱을 숨기는 법·
“안 그래도 마법에 대해 몇 가지 고민하던 게 있었는데 이야기 좀 나눠봐야겠다·”
“잠깐· 잠깐· 알시클 님· 지금 발도르오른 님을 보십시오·”
이한은 상대를 가리켰다·
상대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을 거의 가린 상태였다·
즉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
“저희처럼 다른 목적이 있으실 겁니다· 괜히 방해하지 말죠·”
“과연··· 아쉽게 됐군·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무슨 목적으로 저런 허드렛일을 하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