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이 정도면 미리 확인하고 탈출할 수 있겠군·’
이한은 냉정하게 창문 바깥과 계단 아래 주변에 앉은 카페 손님들의 기운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모를 에인로가드의 첩자들은 없는 것 같았다·
팅-
맑은 소리와 함께 이한이 수정으로 된 작은 팽이를 회전시켰다· 마력이 소모됨과 동시에 팽이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2학년에 올라와서 새로 배운 점술 중 하나인 <수정 팽이 점>이었다·
팽이가 계속 회전하고 있으면 비교적 안전하단 소리였고 팽이가 멈추면 위험이 접근하고 있단 뜻이 됐다·
대가는 대가대로 치러야 하는 주제에 결과가 모호하고 사용처가 한정적이라 예지 마법 학파 선배들은 이 점술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이한은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외워놓았었다·
무엇보다 별도의 시약 없이 마력만 지불하면 되는 점이라는 게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안전하군··· 일단은·’
에인로가드 내에서는 이한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워낙 많아 잘 쓸 일이 없었지만 밖은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에인로가드에 매수된 첩자들이 다가온다면 이한이 점술로 잡아낼 확률이 높으리라·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 무슨 클럽의 일로 외출하셨습니까?”
“일단 연극 클럽과 관련된 클럽의 일로 외출했고···”
“아· 연극 클럽· 어울리시는군요·”
“그 뒤에는 주방 클럽 석공 클럽 격구 클럽 도서관 클럽···”
“······”
아리언은 마시던 커피를 뱉을 뻔했지만 상인의 노련함으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이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은 그 가문의 명성답게 특이하고 괴짜다운 면모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저렇게 다양한 클럽에 가입해서 사교 활동을 즐기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은 별로 사교적이지 않은 가문인데 역시 특이하시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이한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외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지만 동시에 외부인에게 목적을 숨겨야 하는 상황·
말을 잘 선택해야 했다·
‘음· 첫 번째 회수물품은···’
마법사 우압이 갖고 있는 <아센의 편광경>를 회수해서 버두스 교수에게 전달·
우압은 도시 서쪽 구역 <드워프들의 맹세> 공방에서 확인됨·
‘시작부터 하기 싫어지는군·’
종이를 확인한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버두스 교수를 위해 선량한 제국 시민의 물건을 도둑질해야 한다니·
아무리 교수의 의뢰라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마법사 우압에 대해서 아십니까?”
“예· 아· 도련님께서는 혹시 에인로가드의 아이템을 회수 중이십니까?”
이번에는 이한이 커피를 뿜을 뻔했다·
오늘 만난 사람이 에인로가드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런· 제가 눈치 없게· 죄송합니다·”
아리언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에인로가드 학생 앞에서 이걸 대놓고 물어보다니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건지 이유가 궁금합니다만·”
“그···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 그게 말입니다· 에인로가드의 아이템 회수는 생각보다 유명합니다·”
아리언은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싶어 조심스러워하며 말했다·
긍지 높은 에인로가드 학생 앞에서 그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예?”
“생각해보십시오· 귀중한 마법 아이템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데 도둑질 당한 사람들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곳은 몇 되지 않잖습니까·”
“······”
이한은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에인로가드 진짜 괜히 들어왔나?’
그래도 나름 안 들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외부 상인도 알고 있을 정도라니·
혹시 수도로 올라가면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라며?’ ‘쉿· 다들 주머니 숨기게’같은 대화를 뒤에서 들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무리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제국법 없이 산다고 하더라도 그게 말이 됩니까? 도둑질 당한 사람들이 침묵하다니!”
“네?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아무 잘못 없는 선량한 제국 시민들의 물건을 강탈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예·”
“···아하하! 농담도 정말!”
아리언은 물론이고 아무르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저 조각상 같은 소년의 농담이 적절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런 농담이라니!
“···어 아닙니까?”
“하하하하하! 농담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아리언은 웃느라 눈물까지 눈가에 고여 있었다· 눈물을 닦으며 상인은 다시 설명했다·
흔히 제국 신문에 언급되는 빈도나 소문 때문에 에인로가드 마법사들만 특히 사악하다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그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은 능력이 있어서 치는 사고의 규모가 큰 거지 마법사들 중에서 특별히 사악하진 않았던 것이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다 사악한 편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마법밖에 모르는 족속들!
“마법 아이템 중에서는 위험하고 오염된 물품이나 불법적인 경로로 구한 물품들도 많습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이런 물품들을 회수하는 거지요· 당연히 물품을 뺏긴 마법사들도 자신이 잘못했으니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리언은 경험 많은 상인이었고 제국 곳곳의 소문에도 박식했다·
그런 만큼 가끔 사악하고 평판 나쁜 마법사들이 아티팩트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일들을 에인로가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회수하려고 하거나 구매한 아이템들을 건드린 놈들만 도둑질을 당하면···
“<드워프들의 맹세> 공방의 마법사 우압을 이야기하셨을 때 제가 여쭤본 것도 그래서입니다· 우압은 안 좋은 소문이 많은 마법사지요· 최근에는 에인로가드 교수의 아티팩트를 훔쳤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회수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혹시 그 교수님이 버두스 교수님이십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세상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외부 마법사가 버두스 교수의 아티팩트를 훔치다니·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이 사실을 한다면 훈장은 물론이고 동상을 마법학교 영지 내에 세워줄지도 몰랐다·
‘솔직히 나도 세워주고 싶다·’
이한은 아까와는 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학생들을 대신해 버두스 교수를 징벌한 의적을 자신의 손으로 처벌해야 하다니·
‘하지만··· 이건 의뢰지·’
이제야 선배들이 말한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란 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이한은 동정심을 멈추고 상대의 물품을 회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노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도련님· 우압 그 작자는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마법사!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아· 예·”
아리언은 이한이 제자로서 분노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설마 감사 동상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하겠는가?
* * *
그랑덴 시의 서쪽 길드 구역은 길거리의 소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소음들이 가득했다·
연금술에 실패한 물약이 폭발하고 연기를 뿜어내는 소리 재배에 실패한 약초가 밭에서 탈주해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 재봉사 길드의 폭주한 마법 바늘이 벽을 무너뜨리는 소리···
그리고 지금 <드워프들의 맹세> 공방에는 시끄러운 망치 소리가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쉬지 마라· 멍청이들아! 이래서 동부 드워프 놈들은!”
드워프 마법사 우압은 망치를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제국에는 술과 음식 잔치를 좋아하는 동부 드워프들과 달리 서부 드워프들은 고독과 황금만을 사랑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우압은 그런 부정적인 편견을 모아놓은 것 같은 서부 드워프였다·
드워프 일꾼들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망치를 휘둘렀다·
‘빌어먹을 마법사 놈 같으니·’
‘쉿· 괴팍하기 짝이 없다니까·’
“저녁 전까지 주괴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네놈들의 일당을 전부 깎아버릴 테니 잘 알아둬라!”
우압은 고함을 지른 뒤 지하실로 향했다·
1층의 넓은 공간은 여러 일꾼들의 작업을 위해 시설과 장비를 배치한 공방으로 개조했지만 지하실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마법사의 개인적인 공방이었다·
세 겹의 봉인을 풀고 문을 열자 안에서 기묘하고 복잡한 마력의 흐름이 훅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압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제기랄! 마력 아깝군·’
공방 안을 고밀도의 마력으로 유지하는 것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구두쇠인 우압에게 이런 지출은 언제나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두컴컴한 지하 공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우압은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갔다·
순은으로 만든 작업대 위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눈부신 상자가 있었다·
바로 <아센의 편광경>이었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아센은 정말 천재였다니까·”
옛 마법사의 지혜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던 우압은 갑자기 인상을 확 썼다·
천재란 독백에 싫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두스 이 놈!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네놈의 명성을 꺾어놓겠다!”
버두스 교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우압은 그 중에서도 조금 특이한 이유로 싫어했다·
상대의 천재성을 질투했기에 싫어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들었다면 ‘왜 싫어할 이유 99가지를 두고 굳이 그런 이유로 싫어하십니까?’라고 했겠지만 우압은 버두스 교수의 인격이나 성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마법이 완성만 된다면 놈의 명성 놈의 제자 놈을 돕는 마법사들 모두 내게 모이리라!”
우압은 허공을 향해 선언하듯 외쳤다·
사실 여기에도 착각이 좀 있었다·
버두스 교수의 명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자나 돕는 마법사들은 딱히 좋아서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만약 우압이 마법을 완성해서 걸출한 업적을 세운다 하더라도 교수의 제자나 인근 마법사들은 우압한테 모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버두스 교수한테도 모였다는 표현을 쓰기 힘들었다· 제자나 인근 마법사들 모두 각자 자기 일을 하면 했지 버두스 교수를 따르진 않았다·
“···으윽· 어지럽군·”
편광경 안을 들여 보던 우압은 갑자기 비틀거렸다·
요즘 들어서 저 편광경을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과 현기증이 몰려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당장 멈추고 이상을 확인해봐야 했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우압은 그런 생각을 차마 떠올리지 못했다·
‘다시 올라가봐야겠군·’
잠시 휴식 후 정신을 차린 우압은 다시 올라가려고 했다·
여기 일꾼들은 틈만 나면 놀려고 하는 만큼 우압이 계속 채찍을 휘둘러줘야 했···
퍽!
우압은 옆으로 쓰러졌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와중에도 우압은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방어 마법이···!’
지하 공방은 입구부터 시작해서 각종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문은 <아센의 영혼 비명>이라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침입자가 건드리는 순간 상대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했고 그 밑에 깔린 마법진은 강력한 환상 저주 마법이 장전된 상태였다·
그걸 제외한 다른 마법들도 충분히 침입자를 갈아버릴 위력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기습이?
우압은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감각을 확장시켰다·
놀랍게도 문부터 시작해서 우압의 앞까지 모든 마법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침입을 가정해서 치밀하게 대책을 세웠던 우압이었지만 이런 야만스러운 침입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괴 괴물? 악마?’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이런 식으로 습격해온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휴· 환상 마법사라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