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화
이한은 알지 못했지만 지금 맹수의 안에서는 샤르칸이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다·
맹수가 그냥 계약을 거절하고 끝내려 하자 샤르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배은망덕한 분신의 의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단 걸 깨달은 맹수는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까처럼 또 한 번의 추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으니···
그나마 아까의 추태는 목격자가 마법사들밖에 없었다지만 혹시나 언데드계의 다른 존재들이 새로 목격하기라도 한다면 맹수의 권위와 위엄은 크게 손상될 터였다·
-마법사여· 오직 밤이 가장 긴 날에만 이 맹수를 소환할 수 있··· 아니다· 조금 조건을 완화해주겠다·
“????”
‘혹시 미쳤나? 부상을 크게 입었었다고 들었는데·’
상대가 자꾸 말 한 마디 하고 번복하고를 반복하자 이한은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모르툼 교수의 말에 따르면 상대는 크게 부상을 입었다는데 이 회복 과정에서 광증이나 건망증 같은 게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차원의 강대한 존재가 입을 정도의 부상이라면 그 정도도 분명 남다를 것 아닌가·
“음· 선배· 상대가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더 경계해야겠어·”
디레트까지 동의하자 이한은 확신했다·
상대는 약간 미친 게 분명하다고!
‘왜 내가 계약하는 상대들은 다 이상한 자들이지?’
상대가 알면 극도로 분노할 생각을 하며 이한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입니까?”
-오직 파괴와 살육이 예정된 전투여야만··· 아니다· 조건을 더 완화해주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쳤을지도·’
맹수는 몇 번 더 말을 바꾼 다음에야 조건을 확정했다·
이한이 상대하기 힘든 강적을 만났을 때에만 마력을 대가로 소환에 응하겠다고·
그리고 맹수는 크게 호통쳤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이 멍청한 짐승 새끼야!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너는 맹수의 분신이다! 그렇게 굴욕적으로 복종하는 걸 납득할 것 같으냐!
“예?”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광증이 심한 것 같아· 후배· 소환할 때도 절대 방심하지 마·”
두 마법사는 수군대며 맹수를 관찰했다·
문 너머에서 마법사들이 사악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맹수는 깊게 암흑 숨결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체면 때문에라도 다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겪은 굴욕은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맹수는 나중에 언데드계의 다른 적들을 찢어발기는 걸로 분노를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 것 같았다·
-계약도 끝났으니 꺼져라· ···그럼 어쩌라는 거냐? 직접 찾아오지도 않은 자들을 손님으로 대접이라도 하라는 거냐?
“누구와 대화하시는 겁···”
-꺼져라!
‘페르쿤트라보다 성질이 고약하시군·’
이한은 슬슬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샤르칸의 상황도 확인했겠다 새로운 계약의 문양도 받았겠다 굳이 상대를 더 자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본신과 합쳐진 이상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서 일을 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샤르칸이 강해진 것이니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 맞아·’
“혹시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어냐?
의외로 맹수는 화내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줬다·
빨리 대답해서 돌려보내려는 속셈이었지만 이한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혹시 최근 사악한 악신숭배자들과 계약한 언데드에 대해 아십니까? 부패와 타락의 힘을 쓴다고 들었습니다만···”
물어보면서도 이한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상대의 성격을 보니 언데드계에서도 그리 친구가 많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치명적인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주변 상황에 대해 잘 알 리가···
-알고 있다· 놈은 모독자다·
“?!!”
“!”
이한은 물론이고 디레트까지 크게 놀랐다·
설마 이렇게 쉽게 정보를 얻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독자요?”
-강력하고 역겨운 언데드지· 최근에 공물을 받고 마법사들과 계약했다· 덕분에 놈의 하수인들이 그 군세를 정비하고···
맹수는 죽음과 어둠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잠입과 탐문에 능했다·
힘을 회복한지 얼마나 됐다고 언데드계의 강적들에 대해 이렇게 빠르게 파악하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모독자라고 불리는 언데드는 맹수처럼 강력한 언데드로서 계의 한 구역을 다스렸다·
이 우두머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부하들은 한 번 출정하면 맞붙는 적들을 모조리 썩히고 적지는 철저히 오염시키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디레트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적이 부패와 타락의 힘을 쓴다길래 설마 싶었는데 정말 강력한 언데드와 계약을 끝난 상태였다니·
게다가 지금 말하는 걸 보니 그 힘으로 끝이 아니었다· 군세까지 추가로 소환될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보다 많이··· 까다롭겠는데· 이 정도로 진척이 있었을 줄은 몰랐어·”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모독자라는 언데드의 부하들이 소환될 것 같으면 미리 저한테 경고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법사여· 만 조각으로 갈기갈기··· 해주겠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다!
“앗· 감사합니다!”
거절하는 줄 알았는데 상대가 다시 마음을 바꾸자 이한은 깊게 감사를 표했다·
광증이 있긴 했지만 맹수가 은근히 너그러운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 * *
주말의 끝을 앞두고 푸른 용의 탑 2학년 휴게실은 시끌벅적했다·
“외출할 때 이것 좀 사다줘· 값은 두 배로 쳐줄 테니까·”
“내가 하인이냐? 헛소리 하지 마·”
곧 찾아오는 평일부터 차례대로 클럽에 따라 외출이 열릴 테니 밖에서 심부름을 부탁하는 것이다·
고학년 선배들은 밖에서 물건을 받는 몇몇 수단이 있다지만 아직 2학년 학생들에게 그런 요령은 무리였다·
물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런 심부름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당장 자기 물건을 사는 것도 바빴고 무엇보다 애초에 귀족 가문 출신들이라 은화 좀 준다고 심부름을 해주지 않았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뭐야· 그럼 내가 해줄게·”
“워다나즈!”
“두 배나 쳐준다고? 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
덕분에 이한은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넉넉한 심부름 요청을 하나씩 메모하며 이한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제국의 모든 의뢰들이 이렇게 쉬워야 할 텐데·’
“···젠장· 나도 해주면 되잖아·”
이한이 친구들의 부탁을 전부 적어주는 걸 보자 아산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기 친구는 전 학파를 수강하면서도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자신은 바쁘고 자존심 상한다고 거절하다니·
“나도 도와줄게· 워다나즈·”
‘이런 비열한 자식!’
이한은 은은한 경멸과 분노로 아산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는 안 하겠다고 한 친구가 갑자기 나서다니·
이한이 독점으로 수입을 올리는 걸 보니 생각이 달라진 게 분명했다·
역시 친구들도 2학년이 되니 확실히 지혜로워졌다· 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점점 깨닫는 것 같았다·
“빨리 완성해· 내일까지 완성 못 하면 못 나가!”
“알고 있다니까!”
구석에서는 급히 마법 물약을 만드는 학생들이 보였다·
클럽 활동 덕분에 강의는 정당하게 빠질 수 있었지만(사실 클럽 활동 없어도 그냥 빠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생이 해야 할 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작업하던 게 있거나 작업 중인 게 있다면 미리 끝내놓고 가야 했다·
덕분에 이한도 일주일치 작업을 미리 주말에 해야 했다·
돌보는 동물들과 식물들 텃밭 비밀기지 먼저 할 수 있는 과제들···
“요네르· 진짜 안 빠져나갈 거야?”
“······”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빨강머리 친구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꼭 빠져나갈 필요는 없어· 그냥 물어본 거야·”
“그게···”
연극 클럽은 해골 교장이 증오하는 만큼 그 감시가 특별히 삼엄했다·
이한이 설명을 듣고 가입 생각을 버릴 정도였으니···
물론 그러지 않았어도 이한이 가입한 클럽은 지금도 너무 많긴 했다·
어쨌든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언제나 무모하고 겁이 없기 마련·
연극 클럽 내에서도 ‘도중에 빠져나와서 필요한 걸 사가지고 들어가자’라고 하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유를 위해 투쟁하게 되어 있었다· 밖에 나간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탈주를 시도하는 건 너무나도 자명했다·
“···힘들지 않을까?”
요네르는 부정적이었다·
현실적인 성격인 만큼 지금 상황에 내포된 위험을 누구보다 정확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용이 밑에서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데 아래로 뛰어내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메이킨· 이번 기회가 아니면 학기 안에 필요한 물건을 보충하기 어렵습니다·”
아덴아르트가 뒤에서 조용히 끼어들자 이한은 속으로 놀랐다·
‘아니· 황녀님도 연극 클럽이었나?’
“맞아· 메이킨· 계산에 따르면 해볼 만하다고· 잡히거나 안 잡히거나· 50% 50%이지·”
‘아산까지!?’
이한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연극 클럽 가입 비율이 높은 것에 크게 놀랐다·
‘이 자식들· 힘든 클럽에 가입하지 않고 놀고 먹는 클럽에 가입하다니·’
물론 이한이 강제로 가입당했다고 해서 친구들까지 강제로 힘든 클럽에 가입당할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억울한 게 사람 마음이었다·
이한은 아산의 엉터리 억지 계산을 지적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확실히 아산의 계산이 설득력 있어· 잡히거나 잡히지 않거나· 50%지·”
“······”
가이난도가 뒤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한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저런 계산을 하면 불같이 화를 냈으면서!
“워다나즈·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서 가장 전문가인 네가 판단해줘· 워다나즈·”
“전문가가 뭘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희들의 능력을 믿는다·”
이한은 진지한 눈빛으로 친구들을 응원해줬다·
아덴아르트나 아산이 가이난도처럼 승산 없는 승부에 나서는 사람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마 나름 계획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러다 붙잡히더라도 뭐 어떤가· 그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요네르· 너도 친구들을 믿어·”
“혹시 같이 탈주하는 거 아니라고 이러는 건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 *
‘음· 요네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을지도·’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세비우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위치 이동 클럽은 의뢰의 특성 때문에 가장 먼저 학교에서 출발했고 모이는 시간도 가장 빨랐다·
‘내가 참가하는 일이었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 수도 있다·’
확실히 이한이 연극 클럽 소속이었다면 탈출에 좀 더 신중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한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친구들의 능력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연극 클럽이 조금 얄밉고 회원들이 징벌방에 조금 간다고 하더라도 상관없긴 했지만 이한이 아무 근거 없이 친구들을 부추긴 건 아니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을 막을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지·’
“왔군·”
“예· 선배님· 언제 출발합니까?”
“30분 후에· 참· 의뢰 하나 추가됐다·”
“또 버두스 교수님입니까?”
이한은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급히 회수 물품을 추가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아냐· 이번에는 교수님이 아니다·”
“??”
“연극 클럽 회장한테 금화를 받았어· 도중에 탈주를 좀 도와달라더군·”
“······”
이한은 깊이 반성했다·
영락을 배워놓고서도 아직도 선한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