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화
디레트는 못 들은 척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문 너머에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앞에 준비해놓은 시약들을 흡수해갔다·
황금으로 만든 삼각형 모양의 뼈와 영체추적자의 척수가 사라지자 텅 빈 문 너머는 언데드계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보이지?”
“예· 놀랍군요·”
아티팩트를 활용하면 언데드계에 진입하거나 분신을 보내지 않고서도 탐사가 가능했다·
이 문이 일종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정령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일을 피할 수 있겠습니다·”
“···고, 고작 그거 때문에 이런 아티팩트를 쓰려고?”
디레트는 후배의 말에 당황했다·
다른 차원에서 겪을 수 있는 위험 중 정령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건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사실 문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정령이 덤벼드는 게 문제지 도망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역시 시약 낭비겠죠?”
“아니야! 써도 돼!”
디레트는 당황하며 후배를 달랬다·
후배가 정령 때문에 몇 번 곤욕을 겪은 걸 알고 있었던 만큼 매몰차게 대할 수가 없었다·
흑마법 학파의 다른 후배였다면 ‘징징대지 말고 받아들여’라고 훈계했겠지만 눈앞의 후배는 학파를 위해 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시약 비용이 비쌀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 내가 교수님 시약 금고에서 가져다 줄 테니까· 한두번 정도는 모르실 거야·”
자연스럽게 모르툼 교수의 시약 금고를 팔아넘기며 디레트는 탐사를 진행했다·
다른 차원은 제국의 지역을 탐사할 때처럼 평범한 지도로 구역을 오고 가기가 힘들었다· 그 차원이 괴팍한 언데드계라면 더더욱 그랬다·
디레트는 스크롤 형태의 지도를 꺼낸 뒤 주문을 외웠다·
“다리 여덟 개의 창백한 말이여, 상하가 반대고 독안개 자욱한 곳으로 인도하라·”
말과 함께 문 너머에서 다리 여덟 개 달린 유령마가 나타났다·
유령마가 아티팩트를 등 위에 태웠는지 시야가 갑자기 뒤바뀌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언데드계의 풍경에 이한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저 멀리서는 거대한 스켈레톤 드래곤이 사방으로 얼음을 토해내며 어두컴컴한 언데드계의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고, 가까운 늪은 어둠을 쭉 빨아들이더니 위치가 반전되어 새로운 하늘로 변해버렸다·
깊은 지식과 적절한 순발력이 없다면 대부분의 언데드계 지역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다·
“다리 여덟 개의 창백한 말이여, 연기를 토해내는 곳으로 인도하라·”
디레트는 모르툼 교수가 직접 작성한 지도를 들고 다시 주문을 외웠다·
이건 단순한 지도가 아닌 모르툼 교수의 기억과 뜻이 담긴 간이 아티팩트라고 봐도 좋았다·
복잡한 언데드계에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 정도 작업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찾았다·”
문 너머에서 연기를 토해내는 흑요석 거울들을 발견한 디레트가 손짓했다·
끊임없이 형태가 변화하는 궁전의 모습을 보니 모르툼 교수가 말한 곳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해· 후배·”
아티팩트가 보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언데드계의 존재와 교섭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말 한 마디나 동작 한 번의 실수로 분노를 사 공격당할 수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후배 네가 할 일은 지켜보는 것밖에 없어·”
디레트는 자신감을 담아서 말했다·
처음 아티팩트를 쓰는 2학년 학생한테 일을 시킬 만큼 디레트는 가혹하지 않았다·
후배는 어디까지나 옆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하면 됐다·
“자,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시여· 안녕하십니까·”
-꺼져라·
“······”
“······”
궁전 안에서 으르렁대는 맹수의 목소리·
디레트는 오랜만에 수치심을 느꼈다· 후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쫓겨나다니·
‘아, 아니· 이상해!’
무언가 이상했다·
원래 강대한 존재들은 자신과 계약했거나 인연이 있는 자를 이렇게 성급히 쫓아내지 않았다·
최소한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텐데?
“선배?”
“이, 이상하네· 하하·”
“언데드계의 존재니 괴팍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언젠가 제가 꼭 복수하겠습니다·”
이한은 감히 하늘같은 선배에게 모욕을 가한 언데드계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자기가 언데드계에서 강한 세력을 자랑한다지만 이렇게 모욕을 주다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후배가 지나치게 강한 존재한테 복수할 계획을 세우자 디레트는 더더욱 당황했다·
부끄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배가 다른 차원의 거물과 원한 관계를 맺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언데드계에서 이 정도 말은 그냥 흔한 거야· 알겠지?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마·”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냥 물러납니까?”
“마지막으로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디레트가 보기에 질문 하나 정도 던질 여유밖에 없어보였다· 그 뒤에는 대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물러나야 했다·
“샤르칸은 잘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알겠어· 샤르칸의 상태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이대로 물러나겠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디레트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물러나야 할 것 같다· 미안· 후배·”
“괜찮습니다· 상대가 나쁜 건데요·”
이한은 마음 속 원한을 한층 더 키웠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그 때였다·
계속해서 형태가 변화하던 궁전이 일순 멈추더니 정문의 모양을 갖췄다·
그리고 그 정문 안에서 거대한 네 발 맹수가 튀어나왔다·
“!!”
“?!!”
‘속마음을 들켰나?’
이한은 깜짝 놀랐다·
나중에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읽은 게 아니라면 저렇게 궁전의 주인이 뛰쳐나올 이유가 없었다·
앞에 있지도 않고 에인로가드에 있는 이한의 속마음을 읽어 내다니·
-크르릉!
뛰쳐나온 네 발 맹수는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더니 좌우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작에 디레트는 혼란스러워하며 외쳤다·
“저게 대체 무슨 동작이지?”
“···장난치는 거 같은데요? 선배· 제가 직접 물어봐도 됩니까?”
“해봐· 절대 네 이름이나 위치를 밝히지는 말고· 자칫하면 보복당할 수 있거든·”
“알겠습니다· ···샤르칸?”
이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네 발 맹수는 반가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디레트는 더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저게··· 샤르칸이라고? 후배 네 소환수?”
“그런 것 같은데요···”
사실 이한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건 누가 봐도 강력한 언데드 존재였지 일개 소환수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강력한 언데드 존재가 하고 있는 짓은 아무리 봐도 샤르칸이었다·
신나서 구르고 바닥을 파는 걸 보니···?
뚝!
네 발 맹수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는 위엄 넘치게 우뚝 일어나더니 천천히 궁전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꺼져라·
“···방금 뭐였습니까?”
당연히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꺼질 리 없었다·
이한은 어떻게든 답을 듣겠다는 마음으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꺼지라고 했다·
“대답 듣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마법사여· 네가 감히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의 인내심을 시험하느···
말이 끊기더니 갑자기 궁전 안에서 다시 맹수가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이한을 찾으며 짖어댔다·
“······”
“······”
뚝!
네 발 맹수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과연 언데드계의 강력한 존재 답게 이런 추태를 보이고 나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꺼져ㄹ··· 크르릉!
하지만 그 위엄도 세 번째까지 버티지는 못했다·
세 번째로 바닥에서 좌우로 뒹굴고 나자 네 발 맹수는 더 이상 꺼지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비열한 마법사 같으니· 이런 함정으로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를 붙잡다니!
“?!”
상상도 하지 못한 누명에 이한도 할 말을 잃고 당황했다·
* * *
결국 맹수는 포기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분신이 강해지면 본체 또한 따라서 힘을 회복하기 마련·
샤르칸이 마력을 흡수할 때마다 본체인 맹수 또한 힘을 꾸준히 회복해왔다·
마력의 품질이 어찌나 순수하고 뛰어났는지, 원래라면 훨씬 더 걸렸을 회복 기간이 순식간에 단축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샤르칸 또한 자아를 가지게 됐다는 점이었다·
원래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는 자아 없는 파편 같은 분신을 잠시 내줄 생각이었지 이렇게 새로운 인격을 가진 하위 분신을 만들어 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새로 인격을 가진 분신이라고 하더라도 주인으로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샤르칸은 생각보다 고집이 셌다·
-너 샤르칸이여· 너는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에게서 갈라져 나온 분신이다· 마땅한 품위를 가지고 적들을 찢어발겨야 할 지어다·
-크르릉!
-···너 샤르칸이여· 계약자에게 친근감을 가지는 건 이해하지만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할지어다·
-크르르르릉!
-···크르릉! 너그러이 대해줬더니 감히!
맹수는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샤르칸을 붙잡아서 자신의 존재 안에 가둬버렸다·
반성하고 꼬리를 내리면 풀어줄 생각이었다·
마법사의 방문을 냉혹하게 대한 것도 이래서였다·
괜히 마법사들과 접촉했다가 계약자의 소식이라도 듣는다면 반항 기간만 길어질 것 아닌가·
그러나 샤르칸은 고집뿐만이 아니라 능력도 본체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잠잠히 있길래 반성하나 싶었더니 계약자가 오자마자 미친듯이 날뛰어 본체의 통제권을 잠시 빼앗은 것이다·
원래라면 크게 칭찬해도 모자랄 성장이었다·
수많은 적들이 가득한 언데드계에서 자신의 분신이 이렇게 강해지다니·
뿌듯한 일이 분명했다·
···그 강해진 걸로 한다는 일이 고작 계약자 앞에서 추태를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알겠나, 비열한 마법사여? 네 선물이 맹수의 분신을 타락시켰다·
“제가 억지로 준 것도 아니고 도중에 안 흡수했으면 됐잖습니까·”
이한은 당연히 항의했다·
자기 힘 회복할 때는 좋다고 먹어놓고 이제 와서 항의하다니·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언데드들은 다 양심이 없나?’
맹수는 낮게 그르렁댔다·
원래라면 마법사의 항의 따위는 가볍게 묵살했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럴 수 없었다·
힘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분신과 계속 다툴 수는 없는 것이다·
-마법사여· 원하는 걸 말해보도록 해라· 그 대가로 샤르칸을 설득할지어다·
“혹시 샤르칸을 돌려주시는 것도 됩니까?”
-그건 불가하다· 현재 샤르칸은 예전 같은 하찮은 언데드 몬스터가 아님을 명심하라·
약한 언데드 몬스터는 비교적 가볍게 소환이 가능했지만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는 차원의 장벽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본체인 맹수가 힘을 회복하고 깨어난 이상 샤르칸은 맹수이자 분신이었다· 불러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대가가 필요했다·
“마력이라면 소환할 때마다 지불 가능합니다·”
-······
생각치도 못한 곳을 찔린 맹수가 낮게 그르릉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몰라도 대마력으로 맹수를 회복시킨 마법사였다· 그런 마법사라면 소환에 필요한 대가를 마력으로 지불하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안에서 샤르칸이 뛰쳐나오려는 걸 초인적인 의지로 억누르며 맹수가 말했다·
-마법사여· 새로 계약을 맺는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는 맹수를 소환하기 위한 대가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재물을 긁어내도 모자랄··· 됐다· 마력이면 된다·
“???”
상대가 갑자기 양보하자 이한은 당황스러워했다·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