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음· 교수님이 잘못했네·”
디레트의 말에 모르툼 교수는 충격과 배신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디레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인로가드 학생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제자는 스승을 배신하고 공격해도 정당방위였다·
그리고 후배와 교수 중 한 명이 상처받아야 한다면 후자가 받는 게 맞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미리 알려주셨어야죠·”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콜록· 못된 녀석들 같으니· 기껏 스스로 배울 기회를 줬는데도···”
모르툼 교수가 기침과 함께 투덜댔지만 디레트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교수님· 본체와 교섭하면 안 되나요?”
“본체와?”
따뜻한 레몬꿀차(이한이 주기적으로 끓여서 흑암관 1층에 배치해놨다)를 홀짝이려던 모르툼 교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체와 직접 교섭을 시도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분신, 그것도 자아가 없는 파편 수준의 분신을 언데드 몬스터로 부리는 건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상대의 허락을 얻었던 만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강력한 언데드 본체와 직접 교섭을 하는 건···
“콜록·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예측하기 힘들고 괴팍했다· 특히 언데드계의 존재들은 더더욱 그랬다·
약해져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 추측이 맞다면 힘을 거의 회복한 것 같은데, 괜히 교섭을 시도해봤자 화만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조심하긴 해야겠죠· 하지만 이쪽도 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디레트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평범한 절도, 아니 협상이었다면 디레트도 굳이 교섭하자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악도 되지 않은 강력한 언데드 존재에게 분신을 돌려달라고 해봤자 별 의미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녀의 후배는 단순히 분신을 이용하기만 한 게 아니라 꾸준히 친분을 쌓고 성장시켰다·
그뿐 아니라 막대한 마력을 추가로 선물함으로써 본체가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
다른 차원의 계약과 법칙은 제국의 성문법보다 엄격한 구석이 있었다· 강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은혜와 원한을 멋대로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점을 지목한다면 상대도 인정하고 합당한 보상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연···”
모르툼 교수는 차를 홀짝이며 제자의 의견에 높은 점수를 줬다·
확실히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의 차기 교수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예리하게 빈틈을 파악했다·
진정한 흑마법사라면 악마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그 창고를 탈탈 털고 나와야 하는 법·
‘훌륭하다·’
제자의 성장에 감탄한 모르툼 교수는 다음 흑마법사 학회 모임에 디레트를 대신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거물 흑마법사들만 있어서 제자가 긴장할까봐 미뤄뒀는데, 지금 보니 제자는 충분히 자격이 됐다·
모르툼 교수는 믿을 만한 제자에게 계속 도전을 던져주는 자신에게 도취감을 느꼈다· 해골 교장과 달리 모트룸 교수 본인은 정말 괜찮은 스승이었다·
“제가 직접 후배와 같이 교섭에 나서보겠습니다· 저도···”
“안 됩니다·”
“?!”
생각치도 못한 2학년 제자의 거절에 둘은 크게 놀랐다·
“어? 왜?”
“선배님은 바쁘시잖습니까· 교수님과 같이 하겠습니다·”
“······”
“······”
그럼 난 안 바쁘단 소리냐?
* * *
“후배· 교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예?”
디레트는 이한과 함께 흑암관의 위층으로 걸어 올라가며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모르툼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살짝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선배를 존경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교수한테도 가끔 존경심을 표현해줘야 했다·
교수도 은근히 마음 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뭘요?”
“그··· 교수님하고 같이 하겠다는 거 말이야· 너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교수님 입장에서는 자기가 안 바쁘단 소리로 들릴 수 있···”
“아· 그거 말입니까·”
“!?”
후배가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디레트는 깜짝 놀라서 날개의 깃털을 곤두세웠다·
아니 알고서 한 소리였다고!?
“알고서 한 소리였어?!”
“예? 당연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근데 왜 그런 소리를?”
“아니··· 선배님이 바쁘시잖습니까·”
바쁜 선배 괴롭히기vs못된 교수가 마음에 상처를 받기라면 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골랐다·
신입생한테 사악하고 강력한 언데드의 분신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교수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그에 비해 에인로가드에서 제일 힘든 선배가 더 힘들어지는 건 지독한 비극이었다·
‘에인로가드에서 제일 힘든 선배가 누구를 말하는··· 앗·’
속으로 의아해하던 디레트는 뒤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내, 내가 그렇게 보이나···?!’
디레트는 앞으로 후배 앞에서 앓는 소리 좀 그만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해보였으면 후배가 저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선배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지금이라도 교수님에게 부탁하면···”
“아니아니아니아니· 그만둬· 교수님도 바쁘셔! 물론 겉으로는 안 그래보일 수 있긴 한데!”
“흠·”
이한은 ‘교수가 아무리 바빠봤자 제자보다 바쁘겠냐 그럴거면 교수 왜 하냐 계속 제자하지’라고 생각했지만, 선배를 존경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맡은 임무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나선 거야· 후배·”
“임무요?”
“응·”
디레트는 지금 자신이 맡은 일을 선선히 설명해주었다·
아마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도 슬슬 알게 되겠지만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기본적인 교육 과정 외에도 여러 의뢰나 임무들을 추가로 맡곤 했다·
그리고 흑마법 학파의 5학년 학생인 디레트는 개인적인 의뢰부터 시작해서 에인로가드 흑마법 학파로 들어온 임무까지 폭넓게 도맡았다·
‘크윽· 불쌍해·’
디레트는 방금 설명 때문에 후배가 한층 더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받은 임무가 악신숭배자 추적 보조거든· 흑마법사들이 얽혀서·”
“안타깝습니다· 마법사들이 악신 숭배에 빠져들다니·”
지혜의 최전선에 위치한 마법사라 하더라도 신앙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해골 교장이나 워다나즈 가주 같은 사람이 특이한 거였지, 마법사들 중에서 신앙에 의지하는 이들은 그 수가 상당했다·
그리고 제국에서 불법인 신앙은 합법인 신앙보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을 약속하기 마련·
그렇게 생각하면 마법사들 중에서 악신숭배자가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흑마법사들이 악신숭배자란 게 아니라, 흑마법사들이 악신숭배자를 추적하고 있단 소리였어· 후배···”
“······”
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디레트도 침묵했다·
“하하!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지!”
둘은 ‘왜 흑마법사가 악신숭배자라고 생각했니’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서로 슬퍼질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악신숭배자들은···”
“어디까지나 보조니까·”
신성 마법은 초능력이나 야생 마법, 원시 마법처럼 변덕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나마 제국의 합법적인 교단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연구가 쌓였기에 어느 정도 이론이라도 있지, 악신숭배자 교단들은 그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불안정이 악신숭배자를 상대하기 까다롭게 만들었다·
기존 제국 마법과는 다른 기묘하고 독특한 힘을 과감하게 흩뿌리는 적인 것이다·
하지만 디레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추적하는 게 아닌 받은 정보를 분석하고 해석해주는 보조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에 받은 의뢰는 악신숭배자들이 계약한 언데드계의 존재를 추적하는 것·
이들이 쓰는 사악한 힘을 본 흑마법사들이 강력한 언데드와 계약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연락해왔다·
“어떤 언데드입니까?”
“부패와 타락의 힘을 쓰는데 그 이상은 몰라· 더 알아봐야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할 거야·”
말을 하던 디레트가 머뭇거렸다·
생각해보니 주말 내에 이 일이 끝나지 못하면 다음 주 강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혹시 후배· 강의를 미룰··· 아니다· 잊어버ㄹ···”
“전괜찮습니다!”
이한은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외쳤다·
“바쁘시다면 강의는 미루셔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진도는 충분히 빠르잖습니까·”
‘그렇긴 해·’
확실히 후배의 말이 맞았다·
지금 <독, 뼈, 피> 강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굳이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꾸역꾸역 다 해내온 후배의 적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디레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의 의뢰 때문에 후배가 배울 기회를 멋대로 미뤄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만약 친구인 유크벨티레였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다다음 주에 보도록 하지’하며 넘겼을 테지만 디레트는 아직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좀···”
“어차피 다음 주는 클럽 활동 주간이잖습니까· 외출하는 학생들도 여럿일 텐데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이한의 말에 디레트는 눈을 크게 떴다·
4학년 때도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꼈는데, 5학년이 되자 정말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시간과 별개로 행동하게 됐다·
디레트는 살짝 씁쓸해하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좋아· 클럽 활동 때문에 외출해야 한다면 강의를 미뤄도 괜찮겠네· 어느 클럽···”
어느 클럽이냐고 물어보려던 디레트는 질문을 취소했다·
생각해보니 이 후배는 그런 질문이 별 의미가 없었다·
“조언해주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으음· 글쎄··· 일단 밖에서 너무 크게 사고를 치지는 마·”
“그리고요?”
“클럽이 폐쇄되게 하지 마·”
“······”
회한 섞인 선배의 대답에, 이한은 슬슬 더 물어보기 두려워졌다·
* * *
“이걸로 언데드계를 탐색할 거야·”
먼지를 털어내고 흑암관의 구석진 방으로 들어간 디레트는 보라색 문을 가리켰다·
나무로 된 낡은 문은 금세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걱였지만, 이한은 거기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락을 배운 뒤 넓어진 시야로 문과 연결된 차원의 흐름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언데드계와 연결된 아티팩트입니까?”
“와· 어떻게 알았어? 맞아·”
디레트는 후배가 설명을 듣지도 않고 알아차리자 깜짝 놀랐다·
보통 이 아티팩트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 능력을 알아차리는 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모르툼의 나무 문>이야· 언데드계에 들어가지 않고 대신해서 탐사, 교섭을 가능하게 해주지·”
“!”
아무리 마법사라 하더라도 직접 차원에 방문해서 탐사나 교섭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
특히 위험한 언데드계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 문은 그런 위험을 줄여주고 대신해서 탐색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강력한 아티팩트였다·
‘대단하군···!’
후배가 놀라워하자 디레트는 만족스러워했다·
“대단하지?”
“그런데 이런 아티팩트를 교수님께서는 혼자 숨기고 쓰신 겁니까? 저번에도 분명 이걸 쓸 기회가 있었던 것 같···”
“그, 그런 건 아니야· 아티팩트 쓸 때 좀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어서 그래·”
디레트는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아티팩트들은 한 번 가동할 때 드는 시약이 만만치 않아서 아무렇게나 쓸 수는 없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습니다· 비용이 있으니 아무나 쓸 수는 없을 테고··· 그래도 선배는 마음대로 쓰실 수 있으시죠?”
“자· 이걸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마음대로 쓰실 수 있으신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