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화
뭐예요? 혹시 지금 저를 속이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통하지 않으니까!
비버-펭귄-여우:미치겠네 정말·
고나달테스:잠깐· 다들 진정해봐라·
이한은 혼란스러워하는 회원들을 일단 진정시켰다·
바콴탈라나가 오기 전까지 어차피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상대를 잘 구슬려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게 나았다·
이악투스:아하!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비버-펭귄-여우:이 상황에서 침착하다니· 역시 가명부터 좀···
고나달테스:혹시 받은 의뢰 취소해도 되나?
이한이 정색하자 비버펭귄여우는 찔끔했다·
생각해보니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었지 상대가 아니었다·
비버-펭귄-여우:내 말은 지금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는 게 대단하단 거였지·
이악투스:와·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좀 추하군·
비버-펭귄-여우:닥쳐·
고나달테스:자· 다들 조용히· 새로 온 발드로가드 마법사· 여긴 제국의 마법학교 학생들이 품위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비밀스러운 클럽이다·
와!
이한의 말에 발드로가드 학생은 깜짝 놀랐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제국 마법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비밀 클럽이라니?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사다운 곳이었다·
발드로가드는 좋은 곳이었지만 솔직히 마법사다운 장소는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그런 곳에 들어오게 되다니 영광이네요!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여기 몇 명 있어요?
고나달테스:서로의 신분을 캐묻는 건 마법사다운 짓이 아니지·
앗· 죄송합니다!
이악투스와 비버펭귄여우는 속으로 황당해했다·
저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란 말인가?
‘아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긴 하군···’
생각해보니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모이는 클럽이어도 제국 마법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클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발드로가드 학생까지 들어온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저렇게 속인 다음 내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여기가 에인로가드 마법사들만 모이는 곳이라고 알려주는 것보다는···
그럼 각자 앞에 붙은 가명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인가요?
고나달테스:그런 셈이지·
정말 멋진 가명이네요·
고나달테스:칭찬 고맙다·
이악투스:······
비버-펭귄-여우:······
철없는 외부인의 칭찬에 기존 다른 회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신입 회원이란!
고나달테스:그래서··· 어떻게 들어왔지? 아티팩트가 있어야 들어올 수 있을 텐데·
잔단니 선배님한테 받은 흑판이 있는데요··· 아· 잔단니 선배님은 누구냐면···
이악투스:안 궁금해·
비버-펭귄-여우:아무도 안 물어봤어·
‘다들 너무 쌀쌀맞군·’
그러나 쌀쌀맞은 대응에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온 발드로가드 학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신나했다·
역시· 다들 신분을 숨기고 비밀을 유지하려고 이러시는 거군요! 멋있어요!
고나달테스:뭘· 기본적인 거지·
이악투스:와· 진짜 넌·
고나달테스:뭐가?
이악투스:아무것도 아니다···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잔단니는 이한도 알고 있는 발드로가드 학생이었다· 예전 가방 아티팩트 사건 때문에 엮인 적이 있지 않던가·
‘혹시 후배를 위해 아티팩트의 가치를 알아내고 선물한 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질문했다·
고나달테스:그럼 그 선배가 이 클럽에 가입하라고 흑판을 선물한 건가?
앗· 아니에요· 선배는 그냥 팔라고 주셨어요· 기부 행사가 있는데, 원래는 쓸만한 가구들을 좀 팔려고 했거든요· 이번에 새로 흑단나무 가구들을 사서 들여놨더니 응접실에 장식장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요···
“······”
파수꾼 클럽의 침묵이 오히려 무서웠다·
이한은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끓어오르는 증오를 종이 너머로 느낄 수 있었다·
고나달테스:···다시 한 번 말하는 건데, 신분을 숨기는 걸 잊지 마라·
앗· 네! 알겠습니다!
이 발드로가드 학생의 신분이 알려지는 순간 진지하게 습격을 걱정해야 했다·
비버-펭귄-여우:그러면 그 흑판은 그냥 우연히 얻은 거고?
네· 선배님도 더 위의 선배님한테 물려받은 물건이라고 하셨어요· 이펠드렘 선배님이라고···
이악투스:안 궁금하다고·
비버-펭귄-여우:아무도 안 물어봤다고·
아하! 알겠습니다!
‘아니?’
다른 회원들의 구박과 달리 이한은 점점 더 흥미를 느꼈다·
이펠드렘이라면 이한이 갖고 있는 <육방(六方)의 배낭>의 제작자였다·
발드로가드 출신으로 에인로가드 학생과 같이 협업했다는 위업을 세운 마법사기도 했고·
그런 사람이 흑판을 갖고 있었다니 꽤 흥미로웠다·
‘혹시 에인로가드 학생과 연락할 때 썼던 건가? 그럼 그 에인로가드 학생도 여기 클럽 회원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혹시 저한테 물어보실 거 없으세요?
상대는 이 품위 있는 마법사 클럽에 들어오게 된 게 매우 기뻤는지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꿋꿋했다·
이악투스:혹시 어느 가문 출신이지? 방학 때 어디로 찾아가면 되는지 알려줄 수 있나?
앗! 저를 시험하시는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비밀이에요!
비버-펭귄-여우:혹시 설황단 좀 갖고 있어? 나 필요한데·
설황단은 주변의 수분을 통제하는 시약으로서 꽤 비싸고 희귀한 재료였다·
다른 회원들은 당연히 상대가 거절할 줄 알고 지켜보았다·
있어요· 저번에 상자째로 사놨거든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
비버-펭귄-여우:잠깐· 우리 따로 이야기하자·
이악투스:이봐! 신입 회원을 속여서 뜯어먹으면 안 되지!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냥 선물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요·
이한이 생각하지 못했던 발드로가드 학생의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외부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막대한 재력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콴탈라나를 애타게 찾던 회원들은 신입의 환심을 사려고 앞 다퉈서 나섰다·
‘아차· 나도 이럴 때가 아니군·’
이한은 재빨리 깃펜을 붙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경쟁자들을 치워버리고 자신을 믿게 해야 했다· 이한은 이악투스와 비버펭귄여우의 험담을 장전했다·
바콴탈라나:···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불가살이:다들 무슨 상황이야? 혹시 알려줄 사람??
뒤늦게 도착한 회원들은 혼란스러운 클럽 상황에 당혹스러워했다·
비버-펭귄-여우:아무것도 아니야·
고나달테스:그래· 둘 다 바쁠 텐데 각자 일 하러 가라고·
바콴탈라나:발드로가드 학생이 들어왔다고? 이건··· 이건 좀 예상 밖인데·
불가살이:잠깐! 발드로가드 학생을 속이면 안 되지! 모두 멈춰!!
제가 그냥 선물드리고 싶어서···
불가살이:동등한 마법사라면 선물을 줄 이유가 없어요· 정당한 교환이라면 모를까! 당장 멈춰! 멈추지 않으면 여길 막아버릴 거야!
바콴탈라나: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불가살이? 이 클럽의 관리 권한은 네게 없···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종이가 잉크를 퍼부은 것처럼 시꺼멓게 칠해지더니 어떤 글씨도 거부하며 튕겨냈다·
회원들은 당황해서 아티팩트를 조종해보려고 했지만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았다·
불가살이:봤지? 멈춰!
비버-펭귄-여우:뭐야? 대체 무슨 마법이야?
바콴탈라나:어떻게 역간섭을??
불가살이: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내봐· 새 회원을 속여서 갈취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통제가 돌아오자 불가살이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저,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알겠어요· 선물은 그냥 안 할게요·
‘이런!’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회원들의 탄식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걸 방해한 불가살이의 인기가 내려가는 소리도···
‘이제 더 내려갈 곳이 없을 것 같군· 그보다 대체 누구지? 내가 모르는 고학년 선배인가?’
다른 회원들도 나름 고학년인데 이들도 짐작하지 못할 마법 간섭이라니·
이한이 모르는 선배거나···
‘교수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 들어올 만큼 한가한 교수는 없을 테니까·’
바콴탈라나:좋아· 그건 나중에 스스로 알아내도록 하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무슨 일이 있나요?
바콴탈라나:그쪽과 상관있는 문제야· 신입 회원을 받아들일지 말지 투표해야 하니까·
바콴탈라나는 이 클럽의 관리자 역할을 했지만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새 회원이 발드로가드 학생이라 하더라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 회원이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 명예롭게 행동할 것인지, 해골 교장의 끄나풀이 되지는 않을 것인지···
저를 믿어주세요! 제 가문과 이름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어요· 명예도 지킬 거구요!
비버-펭귄-여우:동의·
불가살이:나도 동의·
고나달테스:그럼 나도···
바콴탈라나:몇몇은 사적인 욕심 때문 같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 좋아· 새 회원을 환영하도록 하지·
와! 정말 감사합니다!!!
바콴탈라나:그러면 가명을 정하도록 해·
워다나즈:이건 어떨까요? 제가 존경하는···
고나달테스:쓰레기 같군· 다른 가명 하지?
이악투스:이봐· 네가 다른 사람한테 가명 지적할 자격이 있어?
* * *
‘후· 다행이군·’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다행히 상대의 고집을 꺾고 새 가명 <이펠드렘>을 추천할 수 있었다·
워다나즈:쓰레기라니요! 알지도 못하면서! 에인로가드에 있는 마법사인데···
고나달테스:별로 대단한 마법사도 아니야· 그리고 발드로가드 학생이라면 발드로가드 이름을 써야지· 이펠드렘은 어때?
이펠드렘:···알겠어요· 제가 양보하도록 하죠· 하지만 고나달테스 당신은 정말 무례한 사람이군요!
···대신 신입 회원에게 미움을 조금 사긴 했지만···
원래 클럽 내에서 인기 없는 회원은 불가살이의 역할이었기에 이한은 조금 걱정이 됐다·
‘나중에 선물 돌릴 때 나만 빼고 주는 건 아니겠지·’
일단 급한 문제를 처리한 이한은 흑암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험이 끝났으니 뒤쪽 묘지를 한 번 관리해줄 때였다· 벌써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모여서 삽을 휘두르고 있었다·
“워다나즈 왔구나·”
“예· 이쪽 흙을 갈면 됩니까?”
“응· 근데 조심해라· 아까부터 아래에서 소리 나더라·”
흑마법사들이 좋아하는 흙은 기본적으로 음하고 사이한 기운이 많아서 사악하고 뒤틀린 존재들이 자주 기어 나오곤 했다·
가이난도가 질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혹시 밴시는 아니겠지?”
“난 밴시여도 괜찮은데·”
“······”
“농담이야·”
“전혀 농담 같지 않거든?”
밴시가 가진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단은 그 섬뜩한 울음소리였지만, 이한에게는 통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이미 저것보다 더 독한 상태 이상 공격도 몇 번 견뎌내 본 있는 이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래쪽에 구멍 있다· 작은데· 소환수를 들여보내야겠어·”
“정령은?”
“정령은 저런 곳에 보내면 엄청 싫어해서 안 돼·”
기본적으로 흑마법사가 활동하는 공간 중에서 정령이 좋아할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무덤 아래 깊숙이 판 땅에 위치한 작은 동굴 구멍은 더더욱 그랬다·
“가이난도· 언데드 보내·”
“내 가시 레버넌트는 저기 못 들어가· 안 그래도 추가로 덩치 강화시켜서···”
“···가이난도··· 소환수 덩치만 키운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니까···”
이한은 친구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흑마법사 중에서 소환수의 덩치를 무작정 키우는 부류들도 있었지만 머지않아 후회하게 됐다·
소환수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지, 한 가지만 할 수 있으면 마법사가 영 불편한 것이다·
“뭐· 됐다· 샤르칸을 불러야겠군·”
이한은 표범 소환수를 불러냈다·
다른 언데드 소환수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구멍이 좀 작다 보니 유연한 사족보행 언데드인 샤르칸이 잘 어울렸다·
그러나 샤르칸은 소환되지 않았다·
“···???”
이한은 다시 소환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이난도는 알았다는 듯이 외쳤다·
“자주 안 불러줘서 토라진 거야! 그 그리폰처럼!”
“가이난도· 그리폰은 토라진 게 아니라니까· 바실이도 아니고·”
-?!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욕을 먹은 새끼 바실리스크가 꼬리를 꼿꼿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