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화
“어? 워다나즈· 뭐하고 있어?”
이한이 후배를 괴롭히고 있는 사이 시험을 마친 친구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현재 에안두르데의 상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침울해진 얼굴로 끙끙대는 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용서해주는 게 낫지 않···
“시험 실수한 거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아하!”
친구들은 재빨리 배낭을 바닥에 던지고 위층 개인실로 도망쳤다·
오래 머물렀다가는 그들에게도 화살이 날아올 걸 깨달은 것이다·
에안두르데는 비겁한 선배들의 뒷모습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야비한 도망자들 같으니!
“힉·”
“왜?”
후배가 갑자기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토해내자 이한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요네르가 친구들과 들어오고 있었다·
“으브브브!”
“이해했다·”
이한은 후배의 다급한 눈빛과 신음소리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책상 위에 올라가있던 묵직한 시험지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워다나즈의 염력>이었다·
에안두르데는 감동과 존경의 눈빛으로 선배를 쳐다보았다·
역시 에인로가드 선배들의 마법은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아· 에안두르데 왔어?”
“네, 넵·”
“시험은?”
“······”
기껏 시험지를 숨겼는데도 바로 시험부터 확인하는 요네르의 질문에 에안두르데의 낯빛이 다시 캄캄해졌다·
“그게··· 음··· 어···”
“나름 최선을 다했어· 낙제도 안 했고·”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후배를 위해 변명했다· 가이난도가 감탄했다·
“낙제를 안 하다니· 대단한데?”
“···야· 너 저리 가·”
“맞아· 넌 저리 가라·”
“아, 아니 왜···”
후배가 못된 영향을 받을 걸 염려한 친구들이 구박하자 가이난도는 시무룩해져서 물러났다·
칭찬도 필요하지 않나?
“시험지 줘볼래?”
“네네넵·”
“왜 시험지가 여기 들어있어?”
요네르는 휴게실 바닥 아래 숨겨진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시험지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변명했다·
“바람에 날아갈까봐 그랬나봐·”
“그런···?”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요네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적부터 확인했다·
“와· 잘 봤는데?”
에안두르데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여기 연금술 시험은 조금 아쉽다·”
에안두르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물론 설락초를 쓴 판단은 아주 좋았어·”
에안두르데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빙한산을 같이 썼다면 더욱 효과가 좋았을 거야·”
“요네르·”
“응?”
“사실 그거 내가 아까 이미 말했어·”
“아· 그래?”
친구들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1학년들은 따로 보호하는구나·’
신입생 때에는 왜 선배들과 따로 떼어놓는지 불평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매 시험 때마다 저러면···!
“자· 에안두르데·”
고통스러운 복습이 끝나자 이한은 후배한테 식료품 바구니를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챙겨줬다·
같이 배웅하던 가이난도가 그걸 알아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어? 평소보다 양이 많지 않아?”
“한동안 안 올 수도 있으니까·”
원래 시험 때문에 혼난 학생은 한동안 접근을 피하기 마련이었다·
당장 가이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괜찮았는데 요네르가 엄격해서 말이지·”
“······”
가이난도는 뻔뻔한 친구의 말에 경악해서 입을 떡 벌렸다·
가이난도가 보기에 둘 다 똑같이 엄격하게 후배를 괴롭히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왜 그러지?”
“존, 존경스러워서! 후배를 이렇게 챙겨주다니! 이한 네가 최고야!”
“후후· 뭘 이런 걸 가지고·”
이한은 친구의 칭찬에 흐뭇해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가이난도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간식 때문에 친구한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 * *
중간고사 주간의 주말이 찾아오자 2학년 학생들은 모두 다 게으름뱅이로 변해서 휴게실에 눌어붙었다·
“c4···”
“그럼 dxc4로··· 폰을···”
“나는 그러면··· 퀸을 드래곤으로 변신시켜서··· 브레스로···”
“혹시 환각 버섯이라도 먹었··· 아니다··· 그래, 브레스 써··· 그럼 난 교장 선생님 소환한다···”
평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어떻게든 놀려고 기를 쓰던 학생들도 나른해져서 입으로만 떠들었다·
작년보다 훨씬 힘들어진 중간고사 때문에 다들 반쯤 탈진한 것이다·
허공에 주전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이한은 손가락 끝을 가볍게 움직여 친구들의 잔에 뜨거운 코코아와 커피를 채워 넣었다·
사실 마법사로서 수련의 체감을 가장 강하게 느낄 때가 바로 이럴 때였다·
마법으로 게으름을 피울 때·
이한의 스승들이 듣는다면 뒷목을 잡을 소리였지만···
옆을 보니 가이난도도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워 마법사 카드만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워다나즈·”
“?”
“시험 끝나면 클럽도 본격적으로 외부 활동 한다던데, 혹시 들은 거 있나?”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학년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바쁘고 불행한 편이었다·
그나마 사교 목적으로 모인 클럽이라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험이나 연구 때문에 바쁠 때는 클럽 일정도 미뤄지고, 한가할 때 몰아서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었지·’
이한은 몇몇 선배들에게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시험이 끝나고 나면···
-푸흐· 워다나즈· 조금만 참아라! 시험이 끝나면 밖에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나눠줄 수 있으니까!
-···분명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게까지 신날 일인가요?
-아· 물론이지! 밖에 나가서 활동할 때는 식재료를 마구마구 선물받거든!
‘음· 다른 클럽은···’
-아· 후배· 시험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격구의 시간이 돌아오지·
-예·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조우린 전하를 출전시킬 수는 없겠지? 역시 좀 무리일까?
이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인지 자꾸 이상한 클럽들만 기억에서 떠올랐다·
“주방 클럽이나 격구 클럽은 들어봤는데·”
“오· 그러면 사냥꾼 클럽은?”
“아니· 잘 모르겠군·”
“모험가 클럽은? 마법사 카드 클럽은?”
“외출 클럽은? 조각상 제작 클럽은?”
질문이 쏟아지자 이한은 비스듬히 누워 있던 자세를 고쳐서 바로 앉았다·
“잠깐· 이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 내가 가입한 클럽도 아닌데?”
“어? 안 했어?!”
“······”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친구들을 노려보았다· 친구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다 가입했다길래···”
“생각해보니 비공식 클럽은 다 가입하지 않았었네· 흠흠·”
당연히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도 클럽에 가입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매우 겸연쩍어했다·
“애초에 내가 거기 가지도 않았을 텐데 가입했다는 착각은 어떻게 한 거냐?”
“그야 바빠서 안 보이는 줄 알았지···”
“······”
이한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가입한 클럽도 바빠서 꽤 간헐적으로 모습을 보였으니까·
옆에 있던 요네르가 말했다·
“우리 클럽은 연극 관람한다고 외출한다더라고·”
요네르는 닐리아만큼이나 여러 클럽에게 초대 받은 사람이었다·
주방 클럽이나 다른 여러 클럽에 모습을 보이고 고민했지만, 결국 닐리아와 같이 비공식 클럽인 에인로가드 연극 클럽에 들어갔다(이한이 생각하기에는 혼자 들어가기 싫은 닐리아가 발목을 붙잡고 애걸복걸한 게 확실했다)·
에인로가드 연극 클럽은 비공식 클럽이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교양 넘치는 문화를 그저 향유하는 클럽이었다·
이한 기준에서는 돈이 조금도 안 되니 이름도 기억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클럽 내부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친절했다·
“아니· 멀쩡하잖아?!”
“그럼 멀쩡하지···”
이한이 놀라자 요네르는 어이없어했다·
외부 활동이 멀쩡한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미안· 당연히 클럽 활동이라면 눈에 띄는 성과와 넉넉한 금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내 친구지만 가끔은 미친 것 같아·’
“그 말도 맞아· 애초에 비공식 클럽은 외출도 힘드니까·”
요네르의 말을 듣자 이한은 잊고 있었던 규칙을 다시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외출 권한이 있는 것도 공식 클럽이었다·
비공식 클럽인 연극 클럽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알겠다· 에인로가드의 비참한 현실을 연극으로 재현해 금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계획으로 교수님들을 설득한 거군·”
“···아, 아닌데· 우리 그냥 초대 받았어·”
학생들은 가끔 잊곤 했지만 에인로가드는 제국에서 으뜸가는 마법학교였다·
그런 곳에 있는 학생들을 초대해서 자신들의 예술을 보여주려는 제국의 명사들은 넘쳐났다·
해골 교장이 아무리 심술을 부리더라도 이런 초대를 모조리 다 거절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한은 경악했다·
문화와 예술 쪽 클럽이라 관심도 두지 않았었는데 이런 빈틈이 있었다니?
“그런···! 지금이라도 당장 가입해서 밀수를!”
“···진정해! 그 정도는 아니야·”
요네르는 친구를 진정시켰다·
해골 교장이 이런 무위도식한 행위에 친절을 베풀 리 없었다· 연극 클럽이 나갈 때는 역대급 감시가 뒤따랐다·
평소 ‘어디 능력 있으면 뚫어봐라’ 수준의 감시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감시·
“어느 수준인데?”
그래도 이한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시의 대로와 골목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치우고, 상점이나 가게들도 전부 비우게 한대· 죽음의 기사들이 빙 둘러싸서 호위하고·”
“···가입은 취소해야겠군·”
이한은 빠르게 포기했다·
보아하니 연극 클럽은 에인로가드 클럽 중에서도 해골 교장이 특히 미워하는 게 분명했다·
하긴 클럽 소속 학생들이 모두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니 미워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흥· 그래도 연극 클럽은 운이 좋은 거지·”
가이난도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그래?”
“내가 소속된 클럽은 외출도 힘들어서 궁리 중이라고·”
마법사 카드 클럽, 아니, 마법사 카드 수집 클럽(둘은 엄연히 다른 클럽이었다)은 비공식 클럽이었다·
당장 밖에 외출할 계획도 불투명한 만큼 가만히 있어도 외부 초대가 날아오는 연극 클럽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공식 클럽이 낫지···”
‘완벽한 클럽은 없는 법이군·’
이한은 새삼 느꼈다·
공식 클럽은 외출이 쉬운 대신 해야 하는 일들이 가혹했고, 비공식 클럽은 해야 하는 일들이 자유로운 대신 외출이 쉽지 않았다·
···연극 클럽 같은 돌연변이도 있긴 했는데 저런 건 좀 예외였고···
‘잠깐· 그러면·’
이한은 간단하게 계산해보았다·
가입한 클럽들 중에 공식 클럽들은 각자 다 외출할 것 같았고, 비공식 클럽들은?
일단 에인로가드 사교 클럽은 사교와 가장 거리가 먼 유크벨티레가 만든 유령 클럽이었으니 활동할 리 없었다·
그리고 위치 이동 클럽은···
‘···무리겠지?’
아무리 그럴듯한 계획을 짜도 비공식 클럽 중의 비공식 클럽은 외출이 힘들어보였다·
어떤 미친 교수가 저런 클럽의 외출을 허락해주겠는가·
아마 위치 이동 클럽은 학교 안에서 활동할 게 분명했다· 이한은 한동안 바깥 창고 단속을 철저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아냐· 우리도 외출한다·”
“···예?! 도서관 클럽 이야기입니까?!”
햄스터 수인 4학년, 세비우스 선배의 말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아니· 위치 이동 클럽 이야기야·”
“아하· 탈출 말하시는 거군요·”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한도 탈출할 때는 ‘외출’이라고 표현했다· 누가 그걸 곧이곧대로 발언하겠는가·
“진짜 외출한다고· 계획 제출하고 특별 허가 받은 거야·”
“···대, 대체 무슨 계획을 제출하셨는데요??”
“교수님들이 원하는 마법 물품 회수·”
“······”
이 정도면 그냥 공식 클럽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