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아니?!’
바트렉은 침낭에서 번개처럼 솟구쳐 오르는 친구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떤 예비 동작도 없이 화살처럼 쏘아져나가는 움직임이라니·
워다나즈가 마법사 가문 주제에 기사 가문 친구들을 육탄전으로도 제압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했지만 이번 움직임은 그 차원이 달랐다·
어지간한 기사들도 따라하기 힘든, 전신의 마력을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경지로 다룰 수 있어야 가능한···
“다들 일어나십시오!”
이한은 곳곳에 쓰러진 친구들과 선배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 피곤하다고 담요나 침낭 위에 널브러져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치유 마법 학파 학생들은 이미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누워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에인로가드가 멸망해도 일어나지 않겠다!
아직 그 정도 경지가 아닌 앙라고만 반대쪽에서 힘겹게 일어나더니 물었다·
“뭔데! 왜 그러는데!”
“지금 손님을 보고도 모르겠나, 앙라고!”
“?”
앙라고는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이한 앞에 서있는 손님을 쳐다보았다·
“누군데?”
“!”
이한은 그제야 친구들이 해골 교장의 인간 형태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학생들은 해골 교장의 인간 형태를 만날 일이 많지 않은 것이다·
기껏해야 한두번인데 미친 분신은 복장도 분위기도 달랐으니···
“이 분은 그러니까··· 어··· 스승님· 뭐라고 소개해드리면 됩니까?”
“천것들에게 쓸데없는 낭비하지 마라·”
‘뭐야, 저건!’
앙라고는 속으로 욕했다·
겉으로 욕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친구들(정확히는 이한)과 다른 구역에 배치된 탓에 시험 내내 도움도 받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바로 쓰러질 것 같았다·
‘두··· 고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앙라고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한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자식은 왜 말하다 말고 자는 거야?’
“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한은 쓰러진 친구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했다·
미친 분신이 직접 방문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오지 않겠다고 약조한 만큼 더더욱 그랬다·
‘혹시 한 번 반전하셨다고 약속을 어기시려는 건 아니겠지·’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른 존재이니 약속을 어기겠다는 건 가이난도나 할 법한 억지였다· 이한은 미친 분신을 믿었다·
“세운 공헌에 대한 포상으로 가르침을 주려고 찾아왔다·”
“아까 삼중 변환 마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주신 것처럼 말입니까?”
굳이 매우 하찮은 예시를 갖고 오는 제자의 모습에 미친 분신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속임수일 뿐 가르침이 아니지·”
“충분히 유용한 가르침이었는데···”
“조용·”
이한은 입을 다물었다·
미친 분신이 제정신이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얼마나 회복됐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꾸 자극하면 제자를 공격할지도 몰랐다·
“영락을 쓰는 법을 제대로 깨우쳤다고?”
“제대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정도는···”
“보이나?”
미친 분신은 검지손가락 하나만 펴놓은 채 천장을 가리켰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이라면 별도의 마법을 시전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한은 그 위에 맺힌 영혼이 보였다·
“예·”
“움직여봐라·”
‘쉬고 싶은데·’
이한은 속으로 투덜대면서 집중했다·
그러자 미친 분신이 통제하고 있는 영혼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미 아까도 한 번 했던 만큼 별로 어렵지 않았다·
미친 분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팡이를 쓰지 말라고는 안 했을 텐데·”
“아· 마법으로 움직여야 합니까? 어떤 마법으로···”
“됐다· 계속해라·”
마법을 따로 시전해서 움직이는 것보다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게 훨씬 고등한 영역이었다·
미친 분신은 제자가 보여주는 능력에 적잖게 만족했다· 감히 스승의 연락을 멋대로 끊은 무례함을 넘어가줄 수 있을 만큼의 시연이었다·
“됐습니다·”
“제법 괜찮군· 이제 영혼과 관련된 비전들을 배울 자격이 조금이나마 있다·”
“자격이 풍부해지고 나서 배우면 안 됩니까?”
미친 분신은 제자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영혼을 다루는 마법은···”
“휴식 끝! 휴식 끝! 휴식 끝!”
곳곳에서 학생들이 언데드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 위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건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시험 좀 마저 보고 오겠습니다·”
“······”
미친 분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계단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식을 취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위층은 다양한 증상의 환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바크! 물약 갖고 와!
-예, 예!
-아니, 이런 미친놈들 같으니! 투구 없이 비행 탈것을 타는 놈들은 징벌방에 가둬버려야 해!
-선배님· 엑토플라즘 뼈를 다 썼습니다! 혹시 언데드 뼈 써도 됩니까?
미친 분신은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평범하고 느릿한 동작이라 어떠한 비범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끝나는 순간, 주변에 있던 환자들의 모든 질병들은 한곳에 모여들었다·
팟!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조용히 일어난 일이었기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 뭡니까? 마법사 님?”
“몸이 갑자기 편해졌는데···?”
가장 빨리 반응한 건 역시 치유를 담당하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방금까지 관찰하고 있던 질병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으니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사라졌어!”
“대체 어떻게···?!”
“사라지고 있다고!”
“방금 말했잖아?”
“아니! 질병 말고 후배가! 미친놈아!”
누군가의 외침에 그제야 학생들은 이한이 질질 밖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워다나즈! 너 뭐하냐!?”
“켁켁·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신데···”
이한은 오해를 풀고 제대로 된 시험 평가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질질 끌려가면서·
길고 복잡한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충격을 받는 대신 자기들이 좋은 대로 해석했다·
“후배! 앞으로 자주 부르면 안 되나?”
“원래 교장 선생님보다 훨씬 나은 것 같군!”
“······”
후배가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저런 반응을 하는 선배들을 보며 이한은 한탄했다·
에인로가드에서 아무리 마법을 잘 가르치면 무엇한단 말인가?
인간성을 말살당하는데!
‘에인로가드의 교육은 달라져야 한다·’
“교수님!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딱히 오해하지 않았는데·”
알카시스 교수는 평소처럼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말했다·
이 다크 엘프 교수는 제자가 끌려가든 말든 환자들 중에 잘못된 사람은 없나 확인하고 있었다·
“참·”
“?”
“기말 때도 교장 선생님의 분신을 데리고 오면 또 만점을 주도록 하지·”
“······”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이한은 그대로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 * *
“정말 힘든 한 주였어·”
휴게실로 돌아온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를 소매 속에 넣어주며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원래 보금자리로 돌아온 새끼 바실리스크는 신이 나서 피가 안 통할 만큼 꽉 매달렸다·
-맞아요!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고대의 사악한 악마들을 상대하는 건!
“그걸 말한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가르침 받은 걸 말한 거였는데·”
솔직히 고대로 가서 사악한 존재들을 대면했던 것보다, 돌아와서 미친 분신에게 추후 무슨 마법을 배워야 할지 일장연설을 강제로 들은 게 더 피곤했다·
-······
새끼 바실리스크는 속으로 주인의 감각이 어긋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돌아온 보금자리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제 안 오세요?
새끼 바실리스크가 어딘가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로 쉿쉿대자 이한은 미소지었다·
있을 때는 그렇게 투닥대더니 역시 조우린이 떠나고 나니 외로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찾아갈 테니 너무 외로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전하께서 오늘 나오는 파이는 저 주기로 하셨거든요· 대신 저번 파이는 먼저 드렸는데···
“······”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에안두르데한테도 알려줘야지·’
마침 아래 휴게실로 내려가 보니 주변을 기웃거리는 후배가 보였다· 이한은 반갑게 후배를 불렀다·
“에안두르데!”
“!!!”
깜짝 놀란 후배는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매우 당황스럽고 죄지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뭐지?’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찬장에서 간식 빼먹다 걸렸을 때 짓는 표정을 후배에게서도 발견하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에안두르데· 간식 찾고 있었어? 말하면 줬을 텐데·”
“···아님니다!”
에안두르데는 다시 펄쩍 뛰었다·
새끼 바실리스크나 조우린도 아니고, 에안두르데는 식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면 뭐지? 아· 알겠다·”
“!!!!”
“시험이군· 낙제했구나? 요네르한테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에안두르데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멍청이도 아니고 낙제라니·
“전하께서는···?”
“아· 조우린은 돌아갔어·”
“?!!!!”
이한은 있었던 일들을 다시 설명했다·
조우린이 천외천을 뛰어넘는 천외천외천의 지략을 선보인 것 때문인지 에안두르데는 여전히 혼란스러워보였다·
“이해해· 누가 예상했겠어·”
“어··· 그게··· 제가··· 그···”
에안두르데는 ‘혹시 용석 사건의 용의선상에 제가 없습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서 머뭇거렸다·
조우린과 새끼 바실리스크가 쫓겨난 뒤 에안두르데도 일이 들켰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선배의 반응을 보니 에안두르데를 딱히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안 들켰나?
“전하께서 아무 말도 안 하셨슴니까??”
“응? 급히 가셨는데·”
“······”
에안두르데는 조우린이 자신을 위해 비밀을 지켜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차가운 에인로가드에서 이런 신의를 보여주다니·
아니, 이건 신의가 아니었다·
우정이었다·
꾹-
에안두르데가 주먹을 꾹 쥐는 걸 보자 이한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에안두르데·”
“그게···”
“너도 새끼 바실리스크처럼 전하한테 음식으로 속은 거겠지· 내가 좀 더 챙겨줄 테니까 화 풀어·”
“···아님니다!”
에안두르데는 처음으로 선배한테 발끈해서 화를 냈다·
조우린을 처음으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였는데!
후배한테 설명을 듣자 이한은 매우 머쓱해졌다·
“너 때문이잖아!”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한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후배의 감동적인 순간을 새끼 바실리스크 때문에 오해해서 망친 것이다·
-억울해요···!
파이도 떼먹히고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혼나기까지 하자 새끼 바실리스크는 정말 억울했다·
조우린이 떠나자마자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여하튼 잘 됐다· 둘이 친해지다니·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거지·”
“친구···”
“그래· 친구·”
“그런데 저는 전하의 식사를 매끼마다 차려드리기 싫슴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말하던 이한은 후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경악했다·
설마 나였나!?
“난 돈 받고 하는 거야!”
“푼돈이라고 들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절대 아니야·”
이한은 후배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자 단호하게 해명했다·
에안두르데는 경험이 부족한 만큼 이상한 오해를 하기 쉬웠다·
“누가 헛소리 하면 네가 강하게 해명해줘야 한다· 알겠지?”
“예···”
“자· 그럼 시험지 꺼내봐·”
“···!”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오는 선배의 말에 에안두르데의 얼굴이 경악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라도 낙제했다면 요네르한테 비밀로 해준다고 했지, 성적을 확인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